늘푸른 봄날처럼 2019. 5. 8. 13:06



■ 제22대 정조

■ 연훈방 처방

그로부터 이틀 후인 6월 16일  약원에서는 사순청량음 두 첩과  금련차, 그리고 우황고를 올렸다. 
그러나 진찰을 받으라는 내약원의 두 번에 걸친 주청을 거부할 정도로 정조의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같은 날 정조는 서용보를 체직한  지 이틀만에 이병정을 내의원 제조로 삼고 그 다음날에는 
가감소요산  세첩과 금련차 한 첩을 달여  오라고 명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6월 18일 약원의 진찰을 
거부하고, 그 다음날에도 직숙하겠다는 약원 제신들의 청을 거절할 정도로 상태가 그리 심각한 편은 아니었다. 
6월 20일에는 가감소요산을 중지하고 유분탁리산 한 첩과 삼인전라고 및 메밀밥을 지어 오라고 명했다. 
메밀밥은 종기에 붙여 고름을 빼는 데 사용하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정조는 약원의 제신과 대신,  각신들을 불러 고통을 호소했다.
"종기가 높이 부어 올라 당기고 아파 고통스러우며 한열도 있어서 정신이  흐려져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어의 강명길 등은 진찰한 후  "맥의 도수는 일정하여 기운이 부족한 징후는  없고 
보편적으로 빠르고 센 것 같으나 특별한 종기의  열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정조는 "대체로 한열이 일어날 때 가슴의 기운이 올라와 식히기 때문에 열은 조금 줄어든  것 같다"고 
처방했다. 즉 종기의 차가운 한열을 가슴 속의 화기가 식히기 때문에 열이 줄어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조는 자신의 종기를  대신들은 물론 의관들에게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내의원 도제조 이사수의 건의가 이를 말해준다.
"종기의 부위를 진찰해본 뒤에야 붙일 처방을 의논할 수 있는데 의관들이 다 진찰하지 
못했다 합니다. 그들에게 자주 진찰하도록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상의 병환이 
이러한데도 신들이 아직 종기가 난 부위를 진찰해보지 못했으니 더욱 초조하고 답답합니다."
정조는 왜 자신의 종기 부위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이는 내의원 제조를 자주 교체한 것과 관련이 있다. 
정조는 그만큼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기 부위를 보자는  이시수의 건의에 정조는 
저녁 무렵 조금  쉰 후에 보여주겠다고 대답했으나,  다음날인 6월 22일에야 의원의 진찰을 허용했다. 
정조는 이때 어의 피재길에게 지방 의관 김한주, 백동규와 함께 들어와 진찰하라고 명했다. 
어의는 매수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다음날인 23일 정조는 도제조 이시수에게 고통을 호소했다.
"고름이 나오는 곳 이외에 왼쪽과  오른쪽이 당기고 뻣뻣하며 등골뼈 아래쪽에서부터  
목 뒤 머리가 난 곳까지 여기저기 부어 올랐는데 그 크기가 어떤 것은 연적만큼이나 크다."
이날 노론 벽파 이시수는 어의 강명길의 말을 인용해  경옥고를 쓰자고 주청했다. 
이시수는 인삼이 들어가긴 했으나 온제와는  달라 해롭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정조는 처음 열 증세의 원인이 5푼의 인삼이 들어 있는 육화탕에 있는 것  같다며 거부했다. 
6월 24일 이시수가 밤 사이의 열 증세에 대해 묻자 정조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젯밤 같은 무더위 속에 어찌 잠이 오겠는가마는 그제 밤에 비해서는 나은 것 같다. 
일어나 앉아보고 싶어 경들을 불러 접견했지만 이또한 힘이 든다."
이날 정조는 서정수가 사용해 효과를 본 이른바 민간요법인 연훈방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연훈방 요법은 정조 사후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연훈방을 건의한 심인이 
노론 강경파 영수 심환지의 친척이란 점에서 남인들의 의심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성전고와 연훈방을 사용한 6월  25일 정조의 증세는 한결  좋아졌다. 
연훈방을 사용한 후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속적삼과 요자리에 번질 정도로 피고름이  흘러나왔다. 
정조는 몇 되가 넘을 정도의 피고름이 나왔다고 말했다.
약원 제신들이 지켜본 후 "반갑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다"며 기뻐하였고, 
정조가 새벽 연석에 들어오지 않은 각신들에게 고름에  젖은 이부자리를 살펴보게 하자 
이들 역시 서로 돌아보고 기뻐했다.
"피고름이 다 나왔으니 근이 녹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사스럽고 다행하기 그지없습니다."
정조는 심혈을 기울여 키운  규장각 신하들과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때 
"피고름이 많이 나온 뒤라 뱃속이 필시 허약할 것인데 먹지 않아도 배가 불러  무엇을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니 이상한 일"이라면서 의문을 표시했다. 
이 역시 가슴의 화기때문이라고 자가 진단했다. 6월 26일 이시수가 다시 경옥고를  권유하자 
정조는 한 번 먹어보겠다고 답했다가 곧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의논하자고 물러섰다.  
그런데도 이시수가 계속 권하자 정조는 이렇게 답변한다.
"경들이 나의 체질을 몰라서 그러는데 나는 원래 온제를 복용하지 못하는데  
음산하고 궂은 날에는 그와 같은 약들을 더윽 먹지 못하니 그 해로움이 반드시 일어난다. 
여러 해 궁중에 출입한 각신들은 나의 체질을 알 것이다. 체질과 사리를  따져볼 때 
오늘은 결코 복용할 수 없다."
그러나 이날 연훈방을 다시 사용한 정조는 이시수와 여러 의관들이 종기 부위가 눈에 띄게 좋아져 
며칠 가지 않아 나머지 독도 없어질 것이라고  하자 드디어 경옥고를 들었다. 그러나 경옥고를 든 후 
정조는 잠자는 듯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계속되어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6월 27일, 정조는 이렇듯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정사를 걱정하였다. 그만큼 정조는 
강인한 자기 제어 의지를 지닌 인물이었다.
"도목정사(매년 두 차례 관리들의 고과평점을 심사하는 것)를 치를 때가 되었는데 
이조판서의 사정이 딱하게 되었구나. 혹시 백성들의 일에 관한 사항이 있으면 
비록 이런 상황이라도 자주 여쭈어 조치하도록 하라."
이날 정조는 계속 정신없이 혼미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6월 28일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았다. 정조는 지방 의관 김기순 등이 대령했다는 말에 
"오늘날 세상에 병을 제대로 아는 의원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불러들여라"라고 
냉소적로 대답하였다.  그리고 창경궁 영춘헌에 거동해 새로 임명한 좌부승지 
김조순등을 접견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미 정조는 위독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 유일한 목격자, 정순왕후

이런 정조의 병세 진행 상황을 볼 때 정조 독살설과 관련해 문제가 되는 것은, 
노론 강경파 이시수가 여러 차례 권한 경옥고와 정조가 세상을 떠나는 28일 동안 
등장한 한 여인, 바로 정순왕후 김씨이다.
"이번 병세는 선왕의 병술년(영조 42)증세와 비슷하오. 그 당시 성향정기산을 드시고 
효과를 보셨으니 의관에게 논의해 올리게 하시오."
이때 혜경궁 홍씨도 등장하였다.
"동궁(순조)이 방금 소리쳐 울면서 나아가 안부를 묻고 싶어하므로 
지금 함께 나아가시려 하니 제신은 잠시 물러나 기다리도록 하시오."
이 말에 심환지 등이 문 밖으로 물러났다. 혜경궁이 돌아간  후 부제조 조윤대가 들여 온 
성향정기산을 이시수가 숟가락으로 떠 올렸으나   넘기기도 하고 토해내기도 하였다.  
다시 인삼차와 청심혼을 올렸으나 마시지 못하자 제신이 둘러앉아 소리쳐 울었다.
비상 사태에 대비해 궁성을 호위하는 가운데 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다시 등장하였다. 
도제조 이시수가 "인삼차에 청심환을 개어서  끓여 들여보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드실  길이 없으니 천지가 망극할 따름입니다"라고 말하자. 김씨가 의외의 명을 내렸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이에 심환지 등이 명을 받고 담시 문 밖으로 물러나왔는데 잠시 후 방안에서 곡하는 소리
가 터져 나왔다. 노론 벽파 심환지가 같은 당파 이시수가 문 밖에서 말했다.
"지금 4백 년의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되었는데 신들이 우러러 믿는 곳이라고는 왕대비 전하와 
자궁저하(정조비 효의왕후 김씨)뿐입니다. 동궁저하께 나이가 아직 어리므로 감싸고 보호하는  
책임이 두분께 있는데 어찌 그  점을 생각지 않고 이처럼 감정대로 행동하십니까.  
게다가 국가의 예법도 지극히  엄중하니 즉시 대내로 돌아가소서."
여기에서 말하는 "지극히 엄중한 국가의 예법"이란, 비록 대비나 왕비라 하더라도 
국왕의 임종을 지킬 수 없게 한 조선의 예법을 말한다. 즉 이순간 정순왕후가 
다른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정조의 병석을 지킨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정조실록>에 정조의 임종 장면과 시간을 상세히 기록하지 못하고, 
"이날 유시에 상이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했다"고 두루뭉실하게  기록한 것은,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이 정순왕후 김씨였기 때문일 것이다.
영조이 계비였던 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의  병세가 심각하다 해서 목놓아 
통곡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영조 35년(1759) 15세의 나이로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린 
김씨는 아버지 김한구와 함께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다. 정조 또한 이런  사실을 잘 알았기에 
즉위하자마자 김씨의 동생 김귀주를 유배 보냈는데, 그는 10년 후 귀양지 나주에서 병사하였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 그랬던 것처럼 영조 말년 권력을 누리던 김씨의 친정 역시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급전직하 몰락의 길을 걸었으니 정조에게 원한이 없을 수 없었다.
따라서 대비 정순왕후 김씨와 정조는 법적으로 따지면 모자지간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원수였다. 
또한 정조 24년인 이 해 세자(순조)의 나이 열한 살로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순왕후의 집안이 섭정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면 정순왕후의 친정이 
다시 살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정순왕후가 정조를 살리기 위해 
성향정기산을 올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정순왕후가 김씨는 계획대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이는 몰락했던 친정의 부활로 나타났다. 정조 때 귀양갔다가 사망한 김귀주는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살아 있는 그 일족은 다시 기용되었다. 그리고 다시 노론의 세상이 되었다.

■ 정순왕후의 세상

정조가 세상을 떠나던 날에는 삼각산도 울었다. 뿐만 아니라 그 며칠 전에는 
양주와 장단 등의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갑자기 하얗게 죽기도  했다. 
이를 본 노인들이 슬퍼하며 "이는 상복을 입는 벼"라고 말했는데 그 얼마  후 대상이 났다. 
시골 노인들이 벼가 상복을 입었다고 전할 정도로 백성들을 사랑했던 개혁군주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조선은 점차 나락으로 떨어졌다.
먼저 사상적으로 유일 사상 체계가 강화되었다. 당시 성리학에 도전한 사상은 천주교였다. 
정조 15년(1791)경 천주교를 둘러싼 견해 차이로 정파가 분열되는데 남인과 일부 노론 시파는 
이를 받아들여 신서파를 형성했고, 집권당인 노론 강경파  대부분은 이를 공격하는 공서파를 형성했다. 
정조는 노론 강경파를 의식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윤지층과 권상연 등을 사형시켰지만 
대체적으로 천주교에 관대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천주교에 대한 극단적 탄압은 없었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한 후 정권을 잡은  정순왕후는 노론 강경파와 함께 1801년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사옥을 일으킨다. 명목은 사학인 천주교를 금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신서파인 
남인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 후에는 정권을 장악한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조순이 안동 김씨 일당전제를 여는 세도정치를 시작하였다. 
노론 일당전제라는 폐쇄적 사회에서 보다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 
오히려 한 가문이 정권을 잡는 일족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조선사회는 농업과 상업의 발달에 의한 신분제의 해체라는 시대적 요청을 
받고 있었다. 즉 아래로부터의 변화에 의해, 사대부라는 소수 지배층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전근대적 사회 체제의 개혁을 요구받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이런 변화를  적절히 수용하려 한 군주였다. 
그러나 그의 사망과 함께 전개된 세도정치는 이런  변화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수구정치 체제였다. 당시 조선뿐 아니라  
전세계적 추세였던 개혁과 개방을  외면하고 오히려 
보수와 폐쇄로 전환한 세도정치는, 역사의 반동이자 후퇴였으며 
사실상 조선의 멸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