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2대 정조
■ 새로운 정치세력을 찾아서
정조는 노론도 등용하긴 했으나, 노론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대신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찾았다. 그들이 바로 남인이었다. 사대부들만 놓고 보았을 때
조선 후기에 차별받은 지역은 영남이었다. 남인들의 근거지가 영남이었던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숙종 20년(1694)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들은,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 때 영남 지역 전체가 반역향으로 낙인찍히면서 출사길 자체를 봉쇄당했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된 후 영조와 노론은 대구 입구에 '영남을 평정한 비'란 뜻의 '평영남비'를
세워 영남 전체를 반역향으로 규정했고, 그 이후로는 사실상 노론의 일당독재가 계속되었다.
노론 집권이 계속되는 한 남인이 조정 진출은 요원했다. 영남 남인은 비노론 국왕이 등장해야
자신들이 조정에 진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기대를 걸었던 사도세자가 비참한 죽음을 당하자
실망했던 영남 남인들은 그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환호했다. 그들의 기대대로 정조는 재위 12년에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했다. 80여 년 만에 남인이 정승 자리에 오른 것이다.
남인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인들은 정조와 하나가 되기를 희망했는데 그 연결고리가 바로 사도세자였다.
채제공이 우의정이 된 그 해 이진동을 대표로 하는 영남 유생들은 <무신창의록>과 상소문을 갖고 상경했다.
<무신창의록>은 무신난, 즉 이인좌의 난 때 이인좌 군에 저항한 영남 사대부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었다.
이 책은 영남 사대부들 모두가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지는 않았고 안동 등 13개 고을의 사대부들은 서로
편지와 격문을 주고받으며 이인좌 군에 맞서 싸웠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영조 4년(1728)에서 꼭 한 간지가 되는 정조 12년(1788)이 책자를 올려,
영남이 반역향이 아니란 판정을 받고 자신들을 신원하려 했다.그러나 그 해 8월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승정원에서 봉입하기를 거부해 상소문과 책자를 올리지 못했다. 이들은 계속 기회를 보다가 그해 11월,
경희궁으로 거동하던 정조가 종로 상인들을 만나는 틈을 타 이 책자와 상소문을 올렸다.
예조에서는 이를 받지 말도록 권했으나 정조는 오히려 밤을 세워 이 책자를 다 보았다.
정조는 채제공에게 <무신창의록>간행과 대상자 포상을 명한 다음, 유생의 상소로는 이례적인
소두 이진동 등을 친히 접견해 돈유했다.
"당이 한 번 생긴 후 취미가 각기 달라져 근래에는 조정에서 영남을 거의 다른 나라 사람처럼 보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인재가 부족한 이때에 영남 사람들 중에도 반드시 등용할 만한 사람이 많을 터이니
함께 등용해 조정에 늘어서게 한다면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하는 도에 부합할 것이다."
정조의 이런 돈유에 영남 남인들은 환호했으나 승지 이민채는 <무신창의록>을 반포할 수 없다며
명령을 거부했다. <무신창의록>에 노론 대신 김창집을 논박하다 죽은 조덕린과 황학재 등이 뒤섞여
기록되어 있는 것이 지극한 협잡이란 이유였다. 그러나 정조는 이들의 반발을 무시하면서 조덕린과
황학재를 모두 사면시키고 이진동에게 교서를 내려주며 격려했다. 나아가 정조는 재위 16년 3월
남인의 종주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에서 별시를 실시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는 영남 사대부들을 끌여들이려는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조치였다.
도산서원 별시는 오랜 세월 노론의 일당 전횡에 눌려왔던 영남 사대부들의 잔치였다.
이날 별시장에 입장한 유생은 7천 2백여명이 넘었고, 거둔 시험답안지만 3천 6백여 장이 넘었다.
구경꾼을 합쳐 1만여 명 이상이 운집해 인산인해를 이루어, 이때 "영남에 유생이 만 인"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정조는 직접 채점에 나서 강세백과 김희락을 합격시켰다.
이렇듯 도산서원 별시는 정조와 영남 남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행사였다.
또한 그 직후 발생한 '영남 만인소' 사건도 이 도산서원 별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 명 이상이
연명한 상소문이라 하여 만인소라 불리는 이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별시 다음달인 정조 16년 4월
노론 유성한의 상소에서 비롯되었다. 유성한은 정조가 "경연은 참석하지 않고 유흥만 즐겨 여악들이
금원에까지 들어오고 광대가 대가앞에 외람되이 접근했다"고 공격했다.
유성한은 이런 사건들이 별시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 발생했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도산서원 별시에
대한 노론측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성한의 상소는 명분이 약했다.
당시 국왕의 행차는 백성들의 잔치였다. 국왕이 행차하면 백성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구경했으며
그 뒤를 광대들이 따르며 흥을 돋우었다. 조선국왕중에서도 특히 정조는 이런 행차를 즐겼고
이를 통해 백성과 일체가 되기를 원했다. 게다가 여악을 불러들인 것은 정조가 아니라 궁중 건너편의
방마원이란 점에서 유성한의 상소는 사실 관계를 왜곡한 것이었다.
유성한의 이 상소는, 경종의 능 앞을 지나며 "노론은 경종에게 신하의 의리가 없다"며 말에서 내리기를
거부한 윤구종 사건과 맞물려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이 유성한의 상소에 대한
영남 사대부들의 조직적 대응이 영남 만인소였다. 실제로 만 명이 넘는 1만 57명이 이 상소에 서명했다.
그러나 영남 만인소는 정조에게 전달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관료가 아닌 유학의 상소는 성균관 장의로부터 찬동을 받는 '근실'이란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노론인 성균관 장의가 이 상소 내용에 놀라 근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남 남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현직 관료들의 상소인 진신소는 근실 과정이
필요 없다는 점을 이용해 전 교리 김한동에게 상소케 하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영남 만인소'는 정조의 손에 닿을 수 있었다.
노론에서 영남 만인소의 봉입 자체를 막으려 한 것은 그 내용이 노론의 아킬레스건인
사도세자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했기 때문이었다.
"아! 신들은 하나의 의리(사도세자의 신원)를 마음속에 간직한 지 30여 년이 되었으나
감히 입을 열지 못해 가슴을 치면서 죽고만 싶다가 감히 발을 싸매고 문경새재를 넘어
피를 쏟는 정성으로 대궐문에 부르짖으니 전하께서는 굽어살펴주소서."
이어서 이들은 사도세자가 영명한 것을 우려한 "조정의 권력을 잡은 당여"들이
세자를 모함했다고 주장했다.
"무인년(영조 34) 이후 5년동안 그들은 각종 재주와 수단을 부려, 심지어 상소로
세자를 욕하는 자도 있었고 급서로 고자질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세자께서 수심에 차고 우울하면서 이를 이야깃거리로 삼아 안팎에서 선동하고
교묘하게 참언하고 소문을 퍼뜨려 끝내 차마 말 할 수 없는 변고를 일으켰습니다."
또한 이들은 영조 말 세손을 제거하려 했던 일도 비판했다.
"세자께서 변을 당하신 후 이제 전하의 영명함을 걱정하여 이미 사용했던 기술로 병신년
(홍인한이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고 한 영조 52)에 다시 추악하게 뭉쳤으니,
동방 사람들 중 누가 이 무리와 같은 하늘 아래 사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영남을 돌보아주시고 예로 대우해주시니 영남인들은 모두 전하를 위해 목숨을 바쳐
보답하겠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선세자(사도세자)를 신원함이 제일의 의리이니
신들은 한 번 죽을 각오로 이르 진달합니다. 선세자에게 불충한 자(유성한)가 위로 경종에게까지
그 불충이 미친 것(윤구종)은 그 형세상 필연적인 것이니 이는 참으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빨리 노적의 율을 사용해 귀신과 사람들의 분을 풀어주시기를 빕니다."
이때는 정조가 어느 정도 왕권을 강화시킨 뒤였다. 정조는 즉위 직 후 사도세자 문제를
과격하게 거론한 이덕사와 조재한을 사형에 처한 적이 있었으나 그때는 사도세자의 신원까지
나갈 수가 없었다. 이는 영조의 처사를 부인하는 것으로 노론의 격한 반발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영남 만인소를 올린 소두 이우와 소하 유생들을 불렀다.
"너희들이 천 리 먼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부른 것이니, 소두는 올라와 읽어보라."
이우가 상소문을 읽는 도중 정조는 감정을 억제하느라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했다. 이런 목메임을
여러 차례 되풀이한 뒤에야 정조는 겨우 입을 열었다.
"만약 한 마디 말도 없다면 너희들이 억울해할 뿐 만 아니라 영남 몇만 명의 인사들이 장차
그 의혹을 풀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을 졉견하는 것이다."
정조에게 사도세자 사건은 진퇴양난의 협곡이었다. 그 비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
정조 자신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부인 영조, 생모인 홍씨, 외조부인 홍봉한,
고모인 화원옹주, 이들이 없었다면 정조의 존재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정조는 유생들에게 김상로와 문녀(숙의 문씨), 홍인한과 홍계희 등을 사도세자 죽음과 관련해
치죄한 내용을 설명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영남 남인들이 원하는 것은 이런 설명이
아니라 노론을 역적으로 몰아 제거하는 것이었지만이는 당시의 정치 구조상 불가능했다.
정조의 왕권이 노론을 제거할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영남 사대부가 1만여 명이지만 벼슬아치라고는
기껏해야 정5품 교리 한 두명 정도였으니 정조의 왕권과 합친다 해도 노론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정조가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위로의 말이었다.
"영남은 바로 국가의 근본이 되는 지역으로서 위급할 때에 믿는 곳이니, 내가 영남에 바라는 것은
다른 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나의 본뜻이 이와 같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나의 본뜻을 가지고
돌아가 영남 인사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옳겠다."
정조의 이 말은 아직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는 뜻이었다. 대신 정조는 음직 제수 대상자가 아닌
소두 이우를 의릉 참봉으로 삼았다. 참봉은 종 9품 말단직이지만 의릉은 경종이 묻힌 곳이므로
대단한 상징성이 있었다.
당시는 노론 윤구종이 "노론은 경종에게 신하의 의리가 없다."며 말에서 내리기를 거부한 사건이
벌어진 직후였으므로, 이는 직급을 떠나 영남 만인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영남 사대부들은 열흘 후 1차 상소보다 311명이 더 많은 1만 368명이 연명한 2차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신들이 한 도가 같은 소리로 1만 명이 서로 호응하여 천릿길을 발을 싸맨 채 생사를 무릅쓰고
달려온 것은 반드시 30년 동안 맺혀온 선세자의 무함을 분별하고자 한 것입니다.
흉적을 주토하는 일은 분별한 다음에 할 일입니다. 선세자의 영혼이 신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며 전하 앞에서 일제히 호소하게 하였습니다."
정조는 "만여 유학자의 의론은 곧 국가의 공론이다."라는 비답을 내렸을 뿐 재조사를 명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영남 사대부들은 2차 상소 때보다 687명이 더 많은 1만 1,055명의 연명 상소를 준비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정조가 귀향을 종용하자 영남 유생들도 임금의 교서를 갖고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
영남 만인소는 직접적으로 정국을 변화시키지는 못했으나, 상당한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특히 노론은 영남 만인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은 정조와 영남 남인이 하나임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 매개체가 사도세자였으니
이는 상황에 따라 정국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사건이었다. 영남 만인소는
사도세자 사건을 공론화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다음해 정조는 2품 이상 신하들을 불러
영조가 남긴 <금등비서>가운데 두 구절을 베껴 보여주었다.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동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란다."
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의 절절한 심정이 표현된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절절함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분노를 가슴 속에 고스란히 간직한 채 때를 기다리며 힘을 길렀다.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신진관료를 키워냈고 수원 화성을 건설했으며 장용영을 기르고
영남 남인들과 사도세자를 매개로 결합했다. 노론이 볼 때는 어느 하나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조는 남인들이 성장하기를 기다렸다. 정조가 남인들을 중용하려는 뜻을 밝힌 것은 재위24년(1800)
5월 30일의 연석에서였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시대 상황에 따라 의리가 달라지는 것과 인물을
등용하는 문제에 대해 말했는데, 바로 이 말 속에 남인을 정승으로 등용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판부사 채제공, 봉조하 김종수, 우의정 윤시동을 거론하며, 이들을 등용하고
내보낸 주기가 모두 8년이었음을 밝혔다. 8년의 시련기를 주어 당사자들로 하여금 신망을 기르게
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등용하고 물리치는 기준이 없었던 선왕들과 달리 자신은 이런 기준을 두고
재상을 등용했음을 밝혔다. 이 기준에 따르면 다음 번 재상 후보는 남인 이가환이나 정약용이었다.
그러나 남인들의 이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이 연석이 있는 불과 20여 일 후에 정조가 급서하기 때문이다.
나의 가슴 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회연교라고 불리는 정조의 이 발언은 의리의 개념과 인재 등용의 원칙을 밝혔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 5일 후인 11일에는 훗날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과 함께 실학 4대가로 불리는
이서구가 상소를 올려 연석 발언을 칭송하기도 했다. 혼납 오한원은 이를 조보로 반포하자고까지
건의했는데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무렵인 초열흘 전부터 정조가 종기가 나서 붙이는 약을 사용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정조는 재위 24년 6월 14일 내의원 제조 서용보 등을 편전으로 불러 진찰을 받았다.
정조가 무슨 약을 붙이는 것이 좋겠냐고 묻자 지방 의관 정윤교는 여지고가 고름을 빨아내는 데
가장 좋다고 대답했다. 이에 다시 정조가 상처를 침으로 찢는 것이 어떠냐고 물으니 정윤교는
이미 고름이 터졌으므로 다시 침을 쓸 필요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조는 종기와는 다른 증상을 이야기했다.
"두통이 많이 있을 때는 등 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 때문이다."
그렇다. 정조는 가슴에 화기가 있었다. 대리청정하던 생부를 뒤주속에서 죽게 만든 정당과
정사를 논의할 수밖에 없었으니 어찌 홧병이 없으랴. 반년 전인 1월 17일, 수원 화산의
현륭원에 행차해 두루 돌아보던 정조는 엎드려 땅을 치며 목메어 흐느꼈다.
대신과 각신(규장각 관료)이 재실로 돌아갈 것을 청하자 정조는 말했다.
"금년의 경사를 당하여 선대를 추모하는 중에 크나큰 아픔이 북받쳐 올라 그러는데
어찌 나더러 진정하란 말인가."
금년의 경사란 세자가 가례를 올린 일을 말한다. 노론 강경파 영수 심환지가 부축하겠다고 청하자
정조는 "혼자 일어서겠다"며 일어나 겨우 한두 발자국을 걷고는 또 울며 엎드려 흐느꼈는데,
이런 일을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이처럼 정조에게 사도세자는 씻을 수 없는 한이며 홧병의 근원이었다.
정조는 6월 14일 내의원 제조 서용보를 체직했다. 종기가 머리뿐만 아니라 등 쪽으로도 퍼졌으며
열기까지 올라와 후끈후끈했다. 이때 정조는 국왕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처방과 약 조제를 직접 관장했다.
이사수가 소요산이나 백호탕이 지나치게 찬 약이라고 염려하자 정조는 "이것이 맞는 약이므로
어쩔 수 없이 쓴다"고 대답했다. 정조는 소요산에다 황금과 황련등을 추가해 사용할 정도로
어느 어의 못지않은 해박한 의학 지식을 갖고 있었다.
정조는 자신의 열 증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대개 이 증세는 가슴의 해묵은 홧병 때문에 생긴 것인데, 요즘에는 더 심한데도
그것을 풀어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조정에서는 두려울 외자가 있는지 알지 못하니
나의 가슴 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정에서는 두려울 외자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말은 심상한 말이 아니었다.
이는 곧 대숙청과 정계개편을 뜻사는 말이었다.
"오늘날처럼 살피고 엿보기를 잘하는 습속으로 혹시 나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안다면
또한 어찌 얼굴을 바꾸고 마음을 고치는 길이 없겠는가. 숨어 있는 음침한 장소와 악인들과
교제를 갖는 작태를 내가 어찌 모를 것인가. 만일 내가 입을 열면 상처를 받을 자가 몇이나
될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 참고 있는데 지금까지 귀 기울이고 있어도 하나도 자수하는 자가
없으니 그들이 무엇을 믿고 이런단 말인가?
이른바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도 한 군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비밀히 내통하는데 이것이 사대부들이 할 짓인가.
내가 그들을 사대부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에 우선 방치하고 있으나
내가 한 번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결판이 날 판인데 그들은 오히려 무서운 줄을
모른단 말인가."
이사수가 "과격한 어조는 몸에 해롭다"며 만류했으나 정조의 어조는 한층 격해진다.
"경들이 하는 일이 한탄스럽다. 이런 하교를 듣고서도 어찌 그 이름을 지적해달라고
말하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그들이 종기처럼 스스로 터지기를 기다리고 싶으나
끝내 고칠 줄 모른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다."
앞서 남인 중용을 시사한 연석 발언과 대숙청을 예고한 이 말은 서로 연관이 있었다.
남인 등용과 대숙청! 집권당인 노론에게 이는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