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사색당파의 이해 8. 영조시대와 탕평책 -II 늘푸른 봄날처럼 2019. 5. 3. 01:00 ■ 탕평(蕩平)정국-2 때를 같이 하여 전국 곳곳에 이 같은 내용의 괴문서가 돌아다녔다. 이들은 이 소문에 동요를 일으킨 양민, 노비, 화적 등을 군사로 모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반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어려움에 봉착하고 말았다. 동기가 모호해졌던 것이다. 때문에 동조자들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급기야 용인에 퇴거하여 있던 소론의 원로 최규서에 의해 모반계획이 조정에 고변되기까지 하였다. 또한 김중만 등은 반역세력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영조는 모반자들의 색출을 명령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반역세력이 선수를 치고 나왔다. 1727년 3월 15일 청주의 이인좌가 청주성을 습격하여 병사(兵使) 이봉상(이순신의 손자), 군관 홍림 등을 살해한 뒤 성을 접수하였다. 그리고는 권서봉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임명하고 스스로를 대원수라 지칭하며 곳곳에 격문을 만들어 붙이고 관의 곡식을 풀어 민심의 동요를 획책하였다. 그는 모든 군사에게 흰옷을 입히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하여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냄으로써 반란의 명분을 세우려고 하였다. 이인좌의 반군은 청주에서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향하였다. 이때 권서봉은 안성으로 진출하였으며, 신천영은 청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북상하던 반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새로 도순무사(변란이 일어났을 때 지방에 파견되어 군무를 맡기도 하고 지방관들의 비정(秕政)도 살폈던 벼슬)에 임명된 병조판서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 대패하고 말았으며, 청주성을 지키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웅 등에 의하여 성에서 밀려나온 뒤 상당성에서 패함으로써 이인좌의 난은 진압되었다. 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앞장선 것은 소론이었다. 그러나 주모자 대부분이 소론측 인사였다는 이유로 인해 이후 소론의 입지와 발언권은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반면, 영조는 이 사건으로 국정의 제1목포로 설정하였던 탕평책을 더욱 강력히 추진해 나갈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소론측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반란이었고, 영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지론을 정책에 반영할 명분이 제공된 고마운(?) 반란이었던 셈이다. 왕을 제거하려 한 반란이 도리어 왕에게 큰 도움을 주었으니, 이런 역설이 세계의 반란사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 이인좌의 난이 진압되고 정국이 안정을 되찾아가자 영조는 당파싸움 타파에 의한 탕평의 실현이라는 명목 하에 새로운 정국운영방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것이 조문명․조현명 형제와 송인명에 의하여 주장되었던, 노․소 안배의 공동정권을 구성하는 탕평책이었다. 그는 노․소론간의 ‘충역(忠逆-충신과 역적)시비’를 똑같이 인정하고 똑같이 처벌한다는 ‘양시쌍비(兩是雙非)’ 논리에 의해 편파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때까지 노론과 소론 간에 충역시비가 상반되었던 신임옥사에 대한 판정을 절충해 이른바 ‘기유처분’(己酉處分)‘을 내렸다. 그리고 소론의 조문명․조현명․송인명․서명균 등과 노론의 홍치중․김재로․조도빈 등 탕평파 인사를 주축으로 ’노․소연합정권‘을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탕평정책을 실현하였다. 영조는 관직을 임명할 때에도 반드시 노․소론 관원을 1:1로 배치하는{쌍거호대(雙擧互對)} 정책을 시행하였다. 예컨대, 노론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삼으면 소론 이태좌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吏曹)의 인적구성에 있어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앉히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을, 참의에 소론 서종옥을 앉히면, 전랑에는 노론 신만을 앉혀 상대하게 하는 식이었다. 이리하여 정국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지만, 늘 명치 깨에 무언가 꽉 막힌 듯한 채증 증세 같은 걸 떨쳐낼 수가 없었다. 경종 연간에 자신을 추대하려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었던 노론측 인사들의 신원(일종의 명예회복)문제를 언제까지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는 영조 자신의 도덕성이나 정통성 문제까지도 결부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유처분 이후 정권에 참여한 소론을 간곡히 설득하고 이들의 양해를 얻어 점진적으로 노론의 피화(被禍)자들을 신원시켰고, 1740년 노론 4대신에 대한 완전한 신원과 함께 신임옥사가 조작된 무옥(誣獄)임을 인정하면서 이를 대내외에 공포하였다. 이로써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노론과 소론은 물론 전 백성으로부터 인정받게 된 영조는 노․소론 사이에서만 진행하였던 종전의 소극적 탕평을 남인과 북인까지 함께 참여시키는 대탕평으로 확대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노․소론을 1:1로 배치하는 방식에서 더 나아가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는 정책{유재시용(惟才是用)}을 도입하여 오광운․채제공 등의 남인과 남태제․임개 등의 북인까지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선조 이후 때론 치열하게, 때론 격렬하게, 때론 사생결단으로 싸워왔던 사색당파가 조선 땅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우리 역사가 이쯤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고 방점을 찍을 수 있게 흘러왔더라면 이 글도 여기서 끝맺었을 터이고, 조선이란 나라 또한 이즈음부터 강성부국의 토대를 확고히 마련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제 버릇 개 못준다고, 탕평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몸이 근질근질 해진 각 당파들은 다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계략을 꾸며내기 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1762년에 터진 ‘사도세자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