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한국의 姓氏

영순 태씨(永順 太氏)

늘푸른 봄날처럼 2019. 5. 2. 22:14

    
    ■ 한국에는 현재 약 286개의 성,姓 (2000년 통계)이 있으며, 본(本)을 필수 요소로 한다. 
    한국의 성씨는 삼국 시대 이후 중국의 성씨 제도를 차용한 것이 많고, 
    고려 시대부터 족보를 만들고 귀족 계급의 성씨 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씨는 대부분 한 음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음절로 된 복성(複姓)도 있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성씨가 10만이 넘는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에서는 성씨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김(金)씨, 이(李)씨, 박(朴)씨인 사람이  
    전체 인구의 약 45%를 차지하여 특정 성씨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매우 높다 
    
    ■ 영순 태씨(永順 太氏)  
    
    ■ 시조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大祚榮)의 아버지 대중상(大仲象)이다
    ◎관향 -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
    ◎시조 -대중상 (大仲象)
    ◎주요 중시조 -태금취 (太金就)
    ◎주요 인물 -태두남
    ◎인구(2000년) -4,142명
    ● 역사 
    698년 고구려 무장(武將)이었던 대중상(仲象)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유민을 지배층으로, 
    말갈족을 피지배층으로 발해(渤海)를 세웠다.
    중시조 태금취(太金就)는 대중상(大仲象)의 18세손이다. 태금취는 고려 고종 때 금교(金郊)에서 
    몽골군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영순군(永順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대중상을 도시조로, 태금취를 시조로 하고 영순(永順)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 대씨(大氏)가 태씨(太氏)로 바뀐 연유
    대씨(大氏)가 태씨(太氏)로 바뀐 연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발해가 멸망한 뒤 934년(태조 17)에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유민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자, 고려 태조가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에게 원보수(元甫守)의 벼슬과 함께 
    태씨(太氏)를 하사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동국통감(東國通監))에서 대조영을 태조영(太祚榮)이라 한 후로 자손들이 
    태씨를 칭하였다는 것이다.
    ● 분파
    태씨는 이외에도 협계(陜磎), 남원(南原), 나주(羅州), 밀양(密陽) 등을 관향으로 삼고 있으나 
    모두 한 뿌리에서 갈라진 것이다.
    ● 인물
    태두남 (太斗南) - 본관은 영순(永順). 자는 망이(望而), 호는 서암(西菴). 
    발해국왕 대조영(大祚榮)의 후손이며, 유광(有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치생(致生)이고, 
    아버지는 효정(孝貞)이다. 1513년(조선 중종 8년)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형조좌랑·정랑과 개령현감·경상도도사·사예·사도시첨정
    전라도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장령·남원부사·선산부사, 직강·사섬시정(司贍寺正)·집의 등을 지냈다. 
    1536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어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였다.
    ● 과거 급제자
    무과 -태명철(太命喆) 태진희(太震禧) 태형엽(太亨燁)
    문과 -태두남(太斗南)
    생원시 -태두남(太斗南) 태석룡(太錫龍) 태언룡(太偃龍) 태응규(太應奎)
    진사시 -태두남(太斗南) 태석룡(太錫龍) 태순민(太舜民)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영순태씨는
    1985년에는 총 902가구 3,638명,
    2000년에는 총 1,302가구 4,14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