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ehouse/꺼꾸로 읽는 삼국지 15. 손권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늘푸른 봄날처럼 2019. 5. 1. 00:55 ■ 손권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 손권(182-252)의 자는 중모인데, 오군의 부춘 사람으로 손견의 둘째 아들이고 손책의 동생이며 오나라를 세운 사람이다. 손책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15세에 오주의 중임을 맡아 강동 6군의 땅에 웅거했다. 그는 인재를 불러모아 산월(오의 산지에 웅거하는 부족의 총칭)을 진압하며 서서히 힘을 키워 건안 13년(208)에 유비와 연합해 조조군을 적벽에서 대파했다. 뒤이어 형주를 공격해 관우를 사로잡고 유비를 이릉에서 패배시켰다. 그리고 황룡 원년(229)에 무창에서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오라 하고 건업(지금의 남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지연의] 제7회에서는 손견 일족을 소개하고 손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아주 간단하게 되어 있다.사실[삼국지연의]에서 손권이 등장하는 장면은 약 50회에 이른다. 그러나 적벽대전의 전투와 유비와 손부인의 혼인 등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대개 그냥 덧붙인 정도에 불과하다. 손권 세력의 내부에서는 시종 유비와 연합해 조조에게 대항할까, 아니면 조조에게 항복할까 하는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손권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을 더러운 짓으로 여겼고, 또 오의 땅에 제약이 가해지는 것을 싫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조의 군사력을 감안할 때 자신을 중과부적이라고 보았다. 화의와 전쟁 양면을 두고 항상 망설이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삼국지연의]를 읽는 사람은 손권에게 인재를 등용하는 부분에서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는 인재를 손에 놓는 것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열쇠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나라를 세운 후 널리 인재를 받아들였으므로, 계략이 출중한 천하 명장이 속속 모여들었다. 인재가 풍부하다는 것이 강동의 자랑이었다고 역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연의]에도 손권의 인물상을 그릴 때 이 특징을 포착해, '그가 항상 선을 따르며, 의심하지 않았으며 결코 소홀히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손권의 등장은 손책의 죽음 이후부터로, 처음부터 사람을 보는 눈과 넓은 도량을 갖춘 군주로 나타난다. 이처럼 나관중이 그린 손권은 어질고 재능있는 사람을 발탁해 강동을 지킨다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손권이 인재등용에 뛰어났다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삼국지연의] 제29회에서 손책은 죽기 직전 자신의 자리를 어린 아들 손소가 아니라 동생인 손권에게 물려주면서 말한다. "강동의 군사를 거느리고 적군과 아군의 대립 속에서 유리한 시기를 잡아 천하의 여러 영웅과 승부를 겨루는 일이라면 내가 너보다 낫다. 하지만 뛰어난 사람을 찾아내고 각자의 능력을 발휘시켜 강동을 지키는 일이라면 네가 적임이다. 아버지와 형의 창업의 고통을 잊지 말고 스스로 이를 잘 도모하라." 사실 손권은 형의 부탁에 응해 제업을 완수한 것이었다. 제갈량의 유비를 위해 천하의 대세를 분석한 융중대책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손권은 3대에 걸쳐서 강동에 확고한 기반을 잡았습니다. 그 땅은 장강의 요새가 지켜주고 있고 민생은 안정되었으며, 유능한 막료가 보좌하고 있습니다." 진수가 "세기를 초월하는 영걸"이라 평가한 조조도 손권의 큰 뜻과 인재를 등용하는 자세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아들을 낳는다면 바로 손중모와 같아라'며 그에게 감탄했다. 정사의 작자 진수는 손권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고 있다. "위나라에 대해 창피를 무릅쓰고 겸손해 할 줄 알며, 재능있는 사람을 임용하고 계략을 중히 여기는 등 월왕 구천과 닮은 비범함을 갖춘 인물이었다." 진수 역시 재능에 맡기고 계략을 숭상하는 손권의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손권은 제위에 오른 직후부터 손견, 손책이 남긴 모사나 장수 그룹에는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택한 보다 젊은 모사나 장수에게 의지한다. 특히 그는 주유의 재능을 알아차리고, 평범하게만 보이는 노숙을 등용한다. 또한 여몽을 병사 중에서 발탁하고 육손을 총애했다. 적벽의 전투, 이릉 전투의 빛나는 승리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게다가[삼국지연의]에서의 손권은 아버지나 형보다도 용감하고 생기가 넘친다. 그런데 [삼국지연의]를 자세히 읽어보면, 손권의 영웅 자질과 재능이 나타나는 곳은 어디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유비와 연합해 조조에 대항하는 장면과 조조에 반대하는 장면에서만 손권은 영웅이 되는 것이다. 또 [삼국지연의]는 말년의 손권에 대해 다루지 않았다. 그래서 후기의 인재기용 실패에 대한 얘기는 별로 없다. 그 때문에 독자는 손권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재를 등용하여 재능에 맡기는 총명한 군주였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럼 손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한 군주였던 것일까? 대답은 '아니오'이다. 229년에 손권은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신하들을 신뢰하지 않고 점점 독단에 빠지게 되었다. 인재등용의 측면에서 이러한 변화는 오나라에서 손권의 지배력이 점차 쇠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수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의심 많은 성격이어서 가차없이 사람을 죽였는데, 그러한 경향은 나이가 들수록 심해졌다." 그는 국경을 지키는 장수를 신뢰하지 않아서 그들의 처자를 인질로 잡아두었다. 그리고 반역하거나 도망가는 일이 있으며 즉시 인질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그뿐만 아니라 교사나 찰전과 같은 감시직을 설치하여 기회만 있으면 마구 잡아들였으며 죄없는 사람을 함정에 빠뜨려 죽였다. 예를 들면, 당시의 중서전교인 여일은 성격이 모질고 법을 마음대로 적용하여 항상 사람을 함정에 빠뜨렸는데, 태자인 손등과 육손, 보즐 등이 종종 간언했지만 손권의 인사정책은 고쳐지지 않았다. 나중에 여일은 살해되었지만 대신들은 여전히 손권의 의심병을 두려워해 안심할 수 없었다. 나중에 손권은 자신이 택한 유능한 장수인 육손마저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몇 번이나 육손의 책임을 추궁해 억울하게 죽게 한 것도 바로 의심병 때문이었다. 손권의 인사정책은 초기에는 매우 좋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