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한국의 姓氏

절강 편씨(浙江 片氏)

늘푸른 봄날처럼 2019. 4. 28. 20:35

    
    ■ 한국에는 현재 약 286개의 성,姓 (2000년 통계)이 있으며, 본(本)을 필수 요소로 한다. 
    한국의 성씨는 삼국 시대 이후 중국의 성씨 제도를 차용한 것이 많고, 
    고려 시대부터 족보를 만들고 귀족 계급의 성씨 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씨는 대부분 한 음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음절로 된 복성(複姓)도 있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성씨가 10만이 넘는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에서는 성씨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김(金)씨, 이(李)씨, 박(朴)씨인 사람이  
    전체 인구의 약 45%를 차지하여 특정 성씨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매우 높다 
    
    ■ 절강 편씨(浙江 片氏) 
    
    ■ 중국에서 유래한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편갈송(片碣頌)은 정유재란 때 명나라 제독중군(提督中軍)으로 조선에 동래하였다.
    ◎관향 -중국 절강성(浙江省)
    ◎시조 -편갈송(片碣頌)
    ◎주요 집성촌 -서울특별시 -평양직할시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 -황해도 평산군
    ◎주요 인물 -편영표, 편성대, 편운태, 편좌언, 편호익, 편강렬, 편무경
    ◎인구(2000년) -10,678명 (352위)
    ● 역사
    시조 편갈송(片碣頌)은 자는 경수(景修) 호는 모헌(慕軒)이다. 
    명나라 신종 조에 어양총절사(漁陽摠節使)가 되었고 임진왜란 때 유격장(遊擊將), 정유재란 때 
    제독중군(提督中軍)으로 큰 공을 세웠다. 전란이 끝난 후 간신 정응태(丁應泰)의 무고로 
    귀국하지 못하고, 경주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 편풍세(片豊世), 편풍원(片豊源), 편산보(片山甫) 3형제가 
    금오산으로 가서 아버지를 봉양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세상을 등진 후였다. 
    아버지를 안장한 후 편풍세와 편풍원은 전라도 나주(羅州)로, 
    편산보는 전라도 만경(萬頃)으로 가서 세거하였다.
    편갈송의 선조는 절강 사람으로 고조 할아버지 편지(片址)는 명나라에서 태자태사를 
    역임했으며 원래는 당나라 황실의 이(李)씨의 종친이었으나 임금에 대한 충정을 인정받아 
    일편단심의 편자를 성으로 하사 받았으며 증조 할아버지 편일은 절강백에 봉해졌다고 한다.
    시조 편갈송은 울산(蔚山) 서생포(西生浦) 창표당(蒼表堂)에 배향되었으며, 
    200여년이 지나 공적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전라도 유림의 계청(啓請)으로 
    나주(羅州)에 감명사(感明祠)를 세워 공을 기렸다.
    ● 본관
    절강(浙江)은 중국 동남부 동해(東海) 연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양자강(陽子江) 하류의 
    남부를 점하고 있다. 전당강(錢塘江)에 의하여 동서로 나누어지고 항주(杭州)를 
    성도(省都)로 하고 있다.
    ● 인물
    편영표(片永標, 1586년 ∼ 1638년) : 조선 중기의 의병. 자는 형지(亨之)이고, 호는 
    소은(素隱)이다. 도독(都督) 편갈송(片碣頌)의 손자이며, 명(明)나라 영안태부(永安太府) 
    편풍원(片豊源)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담력(膽力)이 있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종형(從兄)인 편성대(片成大)는 화순(和順)에서 인조(仁祖)가 남한산성
    (南漢山城)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황은(皇恩)에 보답할 기회라 여겨 
    나주목사(羅州牧使) 오준(吳竣)의 군량조달 약속을 받고 의병(義兵)을 모집하였다. 
    의병을 금성산(錦城山)에서 훈련한 후에 종형과 함께 청주(淸州)로 진군(進軍)하였을 때, 
    강화(講和) 소식을 듣고는 “하늘을 차마 볼 수 없다. 어찌 원수들과 한 하늘 아래 살겠는가” 
    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였다. 충청도, 전라도에서 계청(啓請)하여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추증(追贈)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되었다.
    편성대(片成大, 1605년 ∼ 1673년) : 조선 중기 의병. 자는 형복(亨福)이고 호는 은림
    (隱林)이다. 전라도 나주군(羅州郡) 내동(內洞) 출신이다. 조부는 편갈송(片碣頌)이며, 
    부친은 편풍세(片豊世)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근왕병을 모집한다는 격문을 보고 의병장 조수성
    (曺守誠)을 찾아갔다. 이에 조수성은 그를 훈련대장 겸 독전군관(訓鍊大將兼督戰軍官)에 
    임명하여 5만여 의병을 훈련하게 하였다. 의병을 이끌고 북상하다 청주(淸州) 
    서평원(西平源)에서 청나라 군대를 참살하여 전공을 세웠다. 
    인조(仁祖)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자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전라도 화순(和順)에 은거하면서 ‘대명일월(大明日月)’을 좌우명으로 삼고 은거하다가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편운태(片雲泰) : 조선 후기 유학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지평(持平)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향리(鄕里)로 돌아와 후학(後學)을 가르치는 데 힘을 쏟았다.
    편좌언(片佐彦) : 조선 고종 때 정평부사, 함안군수
    편호익(片鎬翊) : 조선 말기 유생‧의열(義烈). 자는 기준(箕俊)이고, 호는 모명재(慕明齋)이다. 
    지평(持平)인 편운태(片雲泰)의 현손이다. 여력재(餘力齋) 장헌주(張憲周)에게 수학(受學)
    하였고,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등과 교유하였으며, 
    수질(壽秩)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을 받았다.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높아서 사림(士林)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일제(日帝)가 강제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병합하자, 주야(晝夜)로 통곡을 하고 음식을 전폐(全廢)하다가, 흰 옷을 입고 흰 띠를 한 채 
    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편강렬(片康烈, 1892년 ~ 1929년) : 독립운동가
    편무경(片茂景, 1893년 ∼ 1961년) : 독립운동가
    ● 족보
    계유보 : 1873(조선 고종 10년)
    갑진보 : 1904(조선 고종 41년)
    ● 인구
    편(片)씨의 인구 분포를 보면, 경상북도 김천시·성주군·문경시 등지에는 전라남도 나주시
    (羅州)에서 이주해 온 종파의 6세(世) 후손 약 160세대, 
    서울특별시에는 90년 전 황해도 연안군에서 이주해 온 13세의 후손, 
    충청남도 서산시·공주시·홍성군·당진시 등지에는 5세의 후손, 
    전라남도 나주시·무안·함평군·영광군 등지에는 2 ·3 ·4세의 후손 약 300여 명이 
    거주하고 있고.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북한에는 황해도 평산 ·신계 ·송화, 
    평남 평양 ·안주 ·영변 등지에 몇 가구씩 산재해 있었다.
    ● 참고
    편(片)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경주-금강-김천-나주-남양-대전-만경-밀양-보은-석강-수원-순천-신광-
    안성-양주-언양-영해-의령-이천-인천-장성-전주-절강-정선
    -창원-통진-평해-해주-홍주 등 총 29개 본관에 인구는 14,675명이었다. 
    이 중 절강 편씨는 10,678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