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사색당파의 이해

5. ‘군강신약’의 숙종시대 - 2

늘푸른 봄날처럼 2019. 4. 19. 19:51


    
    ■ 기사환국(己巳換局)과 갑술환국(甲戌換局) 
    
    ○ 기사환국(己巳換局) 
    1688년 10월, 궐 안에 산실청(産室廳)이 세워졌다. 숙종의 후궁 장옥정(장희빈)이 
    출산을 앞두게 된 것이었다. 벽에는 순산을 기원하는 부적이 붙고, 바닥에는 짚자리가 깔리고, 
    그 위로는 백문석과 기름종이가 덮이고, 그리고 그 위에 다시 고운 짚자리와 말가죽이 
    차례로 깔렸다. 내의원 전의(典醫)가 순산을 기원하는 축문을 읽고 말고삐를 거는 것으로 
    모든 준비가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며칠 뒤인 10월 27일, 고고(高高)의 성(聲)의 울리며 
    마침내 왕자가 태어났다. 드디어 숙종이 첫아들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즉위한 지 14년만의 경사였다. 
    돌이켜 보면, 첫 번째 부인 인경왕후(1661~1680, 김만기의 딸)가 죽은 후 국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시 집권세력이던 서인의 송시열․김수항 등이 결정한 병조판서 
    민유중의 딸(인현왕후 민씨)을 새 왕비로 맞아들인 지도 어느덧 6년이 훌쩍 지난 시점이었다. 
    후궁 장옥정의 ‘득남’ 소식은 집권파인 서인에게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것이 필경 장옥정의 배경이 되는 남인세력의 입지강화로 연결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기실 역관(통역관) 장경과 종 사이에서 태어나 5촌 당숙 장현(역시 역관이었다)의 집에서 
    성장한 장옥정은 경신환국으로 정국이 요동치는 그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인세력과의 
    결탁으로 조대비(자의대비-인조의 비)전에 궁녀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 남인이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나타나는데, 숙종이 문안 갔을 때 남인 측인 
    조대비가 의도적으로 장옥정을 연결해주어 숙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는 일화도 그렇거니와  
    당숙 장현이 경신환국 때 역모로 죽은 복선군 형제(三福)의 심복이면서 남인세력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이유로 함경도에 귀양을 갔었던 과거지사 또한 남인이 정권탈환의 
    일환으로 그녀를 궁녀로 밀어 넣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장옥정은 일개 궁녀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꽤 자주 등장하였는데, 
    국왕의 총애를 받는 궁녀가 조정에서 논란의 핵이 된 것은 장옥정이 유일하였거니와 
    비난을 제기한 측이 하나같이 서인이라는 점 또한 당시 서인세력이 장옥정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때문에 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장옥정이 숙종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은, 다시금 
    실권(失權)의 악몽에 떨게 할 수 있을 만치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숙종실록에는 당시 서인의 심사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장옥정의 어머니가 딸의 산후조리를 위해 옥교(8인이 메는 가마)를 타고 궁궐에 
    들어오다가 큰 수모를 당한 일이 그것인데, 당시 이를 주도한 서헌부 지평 이익수가 
    바로 서인이었던 것이다. 장옥정의 어머니가 비록 천민(賤民)이었다곤 하나 유일한 왕자의 
    외할머니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옥교에서 내려지고 노비들은 흠씬 두들겨 맞았으며 
    옥교는 불태워져 잿더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요컨대 장옥정의 아들은 사직을 이를 
    왕자가 아니라 남인가(南人家)의 한 인물에 불과하다는 서인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숙종을 진노케 하였고, 상황은 오히려 장옥정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왕자 균(昀-후일 경종)이 태어난 지 불과 두 달 만에 숙종은 원자정호
    (元子定號), 즉 세자예정자 정하는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본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안정되지 않으니 이제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로 정하려 한다. 만약 선뜻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라.” 
    이에 서인 일색이었던 조정대신들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중전(인현왕후)이 아직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嫡子)로써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는 
    것이었다. 특히 숙종의 처가세력인 민유중, 김만중(김만기의 동생) 등의 반발이 거세었다. 
    하지만, ‘꿈에 시어머니가 나타나 장옥정은 전생에 왕이 죽인 짐승이 환생한 요물(妖物)
    이므로 가까이 두면 큰 화를 입을 것이라고 하더라’는 말을 숙종에게 고변하는가 하면 
    장옥정에게 회초리질까지 하는 등 투기(妬忌)성 언행이 잦아진 인현왕후에 노여움을 갖고 
    있던 숙종이었던 지라, 그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사태가 너무 늦어 버린 감이 있었다. 
    게다가 정적인 남인까지 숙종의 결단을 전폭 지지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결국 처음 얘기를 꺼낸 지 불과 닷새 만에 숙종은 왕자 균을 원자로 책봉하고 
    이를 종묘사직에 고해버렸다. 그리고 장옥정은 내명부 정1품 ‘빈’으로 책봉되었다. 
    명실상부한 ‘장희빈’의 탄생이었다. 
    한데 원자 정호문제가 이렇게 마무리되어 갈 즈음,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반대 상소를 올려 
    조정은 다시 불난 호떡집처럼 시끄러워지게 되었다. 송시열의 주장인 즉, 송나라의 철종은 
    열 살이 지나서야 비로소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뭐가 그리 급해 간난 아기를 원자로 정하려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숙종은 왕을 능멸하는 처사라며 이에 격분하였고 서인이 집권한 
    상황 하에서는 원자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숙종은 정권을 남인에게 주기로 결심하고 서인 영의정 김수홍을 파직한 후 
    남인인 목래선, 김덕원을 좌의정과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서인가(西人家) 여인인 인현왕후 민씨가 
    왕비로 있는 한 원자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민씨를 내쫒기로 결심하였다. 
    결국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안국동 사저로 좇겨 나고 그 열흘 뒤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로써 경신환국으로 축출된 지 9년 만에 남인은 정권을 
    탈환하였으며, 조선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궁녀 출신의 왕비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남인은 서인에게 정치보복을 단행하였다. 
    그간 서인으로부터 받은 정치탄압을 그대로 돌려주기로 한 것이다. 
    남인의 보복의 칼날은 당연히 서인 영수 송시열과 김수항에게 향하였다. 
    남인들의 공격이 계속되고, 특히 이현기(李玄紀) 등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리며 그를 공격하자 숙종은 송시열을 삭탈관작 시킨 뒤 제주도로 귀양 보내 버렸다. 
    그러나 송시열이 살아있다는 자체를 불안해한 남인은 그를 국문(鞠問-왕의 명령에 의하여 
    국청에서 범인을 심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당시 83세이던 송시열은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돌아오던 도중 정읍 땅에서 사약을 받고 목숨을 거두었다. 
    이후 서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시작되었다. 
    김수흥, 김수항과 홍치상 등 거물 정치인 18명이 죽고 59명이 귀양을 갔으며, 
    이밖에도 26명이 파직과 삭탈관직을 당하는 등 100명 이상의 서인들이 처벌을 받았다. 
    이것이 ‘기사환국’의 전말인 것이다. 
    ○ 갑술환국(甲戌換局) 
    장희빈을 떠올리면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인현왕후 민씨이다. 
    서인의 거물 민유중의 딸로 태어나 숙종의 본부인 인경왕후(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가 
    즉위 6년 만에 스물의 꽃다운 나이로 일찍 죽자 서인의 중심인물들에 의해 국상 중에 
    급히 후임 왕비로 결정된 인물이었다. 원래 왕비에 대한 간택권은 왕실에 있었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당시 대비였던 명성왕후(현종비)가 서인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인세력과 명성왕후의 후광으로 인해 민씨는 손쉽게 왕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한 지 6년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숙종이 총애하던 후궁 
    장희빈이 먼저 왕자를 낳게 되자 정치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서인세력과 함께 궁궐에서 
    축출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하지만 정비가 된 장희빈의 행태가 점차 오만방자해지고 
    그의 오빠 되는 장희재 또한 많은 문제를 야기하자 숙종은 장희빈을 멀리하는 한편 
    민씨를 폐위한 것에 대하여 후회하는 듯한 언행을 자주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서인(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세력의 민암 등은 이를 계기로 반대당인 
    소론 일파를 영원히 축출해버릴 심산으로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폐비사건 이후 장희빈과 연합한 남인세력의 힘이 지나치게 팽창되는 것이 
    그야말로 '눈엣가시'였을 뿐더러, 그즈음 새로 사귄 여자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에게 
    사랑과 정열을 마구 쏟아 붓고 있는 중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 같은 보고를 받은 이후 
    되려 김춘택 등을 옹호하고 남인을 맹비난하면서 궁지에 몰아넣어버렸다. 
    판을 다시 엎어버려야겠다고 작정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숙종은 언제, 어떤 연유로 다시 판을 엎어버려야겠다고 작정하게 되었을까? 
    단순히 남인의 지나친 세력팽창이 눈에 거슬렸다는 이유만 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여기엔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서인의 치열한 물밑 공작이 작용하였던 것이다. 
    서인의 ‘정권 재탈환 프로젝트’는 쌍방향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하나는, 소론의 한중혁이 
    남인의 막후 실력자 장희재(장희빈의 오빠)와 동평군(인조의 손자 )에게 뇌물을 주고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되 별궁에 거처하도록 한다’는 '양해각서'를 받아내는 프로젝트였다. 
    이를테면 남인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서인의 정계진출을 도모한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남인과 왕비 장씨(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신뢰를 최대한 추락시킨다는 
    프로젝트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서인은 당시 숙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숙빈 최씨와 손을 잡았다. 그래서 숙빈 최씨로 하여금 남인과 왕비 장씨의 잘못을 지속적으로 
    일러바치도록 하였다. 예컨대, 왕비 장씨가 자신을 괴롭혀서 못살겠다는 투정을 숙종에게 
    자주 하는가 하면 남인에 대하여는 소론측 인사들이 인현왕후에게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식으로 세뇌를 시켜버리는 작전이었다. 
    결국 숙종은 이 같은 서인의 양대 프로젝트에 의해 왕비 장씨와 남인들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들이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그들을 내쫓아버리기로 마음먹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국문을 주도하였던 민암에게 사약을 내리는 한편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을 귀양조치 하였으며, 폐비 민씨를 지지하던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등을 조정의 요직에 등용하였다. 또한 기사환국 이후 왕비가 된 장씨를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켜 궐 밖의 취선당에 머물게 하였다. 
    이것이 병술환국이다. 
    이 환국의 타격으로 남인은 완전히 정권에서 밀려나 다시 집권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그 대신 서인에서 분기된 소론이 실권을 잡게 되었으며, 이후부터는 
    노 ·소론(老少論) 간에 쟁론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 사족(蛇足)… 
    취선당으로 나간 이후 몇 년 동안 장희빈은 숙종에게서나 역사 속에서 
    ‘잊혀진 여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직후 
    장희빈은 또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또 다른 여인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가, 인현왕후의 
    죽음은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었다고 밀고를 한 때문이었다. 
    내용인 즉, 장희빈이 취선당 뒤편의 사당에 인현왕후를 상징하는 인형을 만들어 놓고 
    바늘을 꽂거나 화살을 쏘는가 하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고, 귀신에게 새 옷을 
    지어주면서 인현왕후를 죽여 달라고 빌었다는 것이었다. 이 밀고로 인해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죽은 지 두 달 뒤 끝내 사약을 받고 말았다.[이를 무고(巫蠱)의 옥(獄)이라 한다]
    그렇다면, 숙종은 왜 한때 총애하였고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그리고 장차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녀에게 사약을 내리게 되었을까. 
    신권이 왕권을 넘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이것은 숙종이 즉위 이후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국정지표’였다. 숙종의 이 같은 의지는 
    장희빈의 사사를 명하면서 내린 비명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장희빈을 죽이는 것이 ‘국가와 세자’를 위한 조치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왕권 강화를 위한 숙종의 의지는 세 번의 '환국’으로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긴 자가 모든 것을 싹쓸이 하고 패자에게는 대대적인 숙청이 뒤따르던 환국, 
    이를 통해 숙종은 신하를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갔던 것이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또한 숙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정략(政略)에 
    이용당한 측면이 크다. 혹자는 숙종의 여성편력을 꼬집기도 하지만, 
    조선의 역대 임금치고 축첩을 하지 않은 임금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는가. 
    오히려 축첩이 왕권의 상징으로까지 회자되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유독 숙종 대에서 
    여자문제가 화두로 대두되었던 것은 
    장희빈이라는 인물이 단순한 한명의 첩이 아니라 
    남인이라는 정치세력의 대표 브렌드마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