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조선의 뒷마당

10. 어우동과 양반의 성문화 - 2

늘푸른 봄날처럼 2019. 4. 19. 19:43




■ 성종이 직접 어우동 교수형 명령 

유감동 사건(1427)이 일어난 지 53년 뒤인 성종 11년에 너무나도 유명한 어우동 사건이 일어났다. 
어우동의 이름은 성종 11년 7월9일 처음 나온다. 요지는 이렇다. 
의금부가 “어우동이 태강수(泰江守)의 아내였을 때 방산수(方山守) 이란(李瀾)과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와 간통했는데 이는 율이 장(杖) 100대, 도(徒) 3년에 고신(告身, 조정에서 내리던 벼슬아치의 
임명장)을 모조리 추탈하는 죄에 해당한다”고 보고하자, 성종은 “장형은 속전(贖錢)을 내게 하고, 
고신을 빼앗은 뒤 먼 지방에 부처(付處)하라”고 명했다. 이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 이어 같은 해 10월18일 어우동은 결국 사형을 당하게 된다. 
이 사이 어우동과 관계된 자료가 적지 않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은 어우동과 간통한 사람을 밝히고 
처벌의 형량을 정함에 관련된 것들이다. 그런데 형량을 정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 
예컨대 방산수 이란이 어우동과 간통한 사람이라고 지목했던 어유소(魚有沼)·노공필·김세적·김칭·김휘·
정숙지의 처벌 문제가 큰 관심사가 되었다. 
사헌부에서는 이들을 철저히 조사해 중벌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성종과 일부 관료들은 
방산수가 자기 죄를 가볍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일부러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어유소·노공필·김세적은 석방하여 신문하지 않았고, 김칭·정숙지 등은 한 차례 형신(刑訊)하고 석방했다. 
성종의 처분은 논란거리가 되었으나, 끝내 이들에 대한 추가적 처벌은 없었다. 
어유소는 병조와 이조의 판서, 좌찬성 등 최고위직을 지낸 중신이었다. 
또 방산수와 수산수는 임금의 종친(宗親)이었다. 관직이 높을수록 간통죄에 대한 처벌이 미약했던 것이다. 
그 외 간통한 사람들도 처벌을 받기는 하였으나, 모두 가벼운 것이었고 
심지어 2년 뒤엔 모두 풀려났다 (성종 13년 8월8일). 
상대 남자들에 대한 처벌이 이토록 가벼웠던 데 반해 어우동에 대한 처벌은 앞서 밝힌 대로 극형이었다. 
그 과정에서 어우동의 형량을 두고 조선정부 내에선 갑론을박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당초 의금부에서 조율한 어우동의 죄목과 형량은 다음과 같았다. 
“태강수 이동(李仝)이 버린 처 어을우동이 수산수 이기와 방산수 이란, 내금위 구전, 학유(學諭) 홍찬, 
생원 이승언, 서리 오종련, 감의형, 생도 박강창, 양인(良人) 이근지, 사노(私奴) 지거비(知巨非)와 
간통한 죄는 율이 결장(決杖) 100대에, 유(流) 2000리에 해당한다” (성종11년 9월2일). 
의금부의 이같은 형량은 법전에 기초한 것이었다. 임금은 이 형량을 두고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의견이 두 가지로 갈라졌다. 그 중 한 가지는 의금부의 형량을 그대로 따르자는 것이었다. 
정창손(鄭昌孫)의 말을 들어보자. 
“어을우동은 종친의 처이며 사족의 딸로서 음욕(淫欲)을 자행한 것이 창기(娼妓)와 같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태종과 세종 때에 사족의 부녀로서 음행(淫行)이 매우 심한 자는 
간혹 극형에 처했다 하더라도 그 뒤에는 모두 율에 의하여 단죄하였으니, 
지금 어을우동 또한 율에 의하여 단죄하소서.” 
극형에 처해야 할 것이지만, 조종(祖宗)의 전례에 따라 정해진 법률에 의해 단죄하자는 것이다. 
범죄가 가증스럽다하여 율 밖의 형벌을 적용하면 자의적으로 율을 변경하는 실마리가 된다는 견해도 
나왔다(김국광의 견해). 어우동의 죄는 무겁지만 율은 사형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이 중론이었다(채수의 견해). 
최종적 결론을 내린 사람은 왕이었다. 성종은 법률 밖의 법률을 따르자는 심회(沈澮) 등의 주장을 따랐다. 
성종은 음란 방종에도 불구하고 어우동을 죽이지 않는다면 뒷사람을 징계할 수단이 없을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의금부에 사율(私律), 곧 법률에 없는 율을 적용하라고 명하였다. 사형이 결정된 것이다. 
무엇을 사형의 이유로 할 것인가. 10월18일 의금부에서 다시 어우동의 형량을 조정하여 왔다. 
‘대명률’의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改嫁)한 것”에 비의(比擬)하여, 
“교부대시(絞不待時)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부대시는 중형이다. 
교형에 처하되,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형에는 참형과 교형이 있는 바, 참형은 칼로 목을 베는 것이고 교형은 교살형이다. 
원래 사형은 죽은 자의 원기가 천지의 조화로운 기운을 해친다 하여 
만물이 생장하는 봄, 여름을 피해 집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범죄의 성격이 모질면 시기를 기다리지 말고 즉각 처형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교부대시, 참부대시다. 어우동의 교부대시에 대해 다시 의견 조율이 있어 
의논이 분분했으나, 성종이 어우동을 죽이기로 결심한 터라 결론이 바뀔 리 없었다. 
결국 의금부가 사형을 결정한 바로 그날(10월18일) 어우동의 목에 올가미가 걸렸다. 
어우동이 한 일은 현재의 한국 법률에서도 간통, 즉 범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형은 분명 억울한 측면이 있다. 
당시 조선의 법률 조문, 현재의 검찰에 해당하는 의금부, 법률 전문가들인 
상당수 정부 관료들도 사형은 가혹하다고 본 것이다. 
상대한 남성에 대한 처벌과 비교해본다면 더구나 형평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우동은 죽임을 당했고 음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다. 
간통죄의 처벌에 임금이 이렇게 깊이 개입한 것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