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한국사의 亂 ■ 무오정변(戊午政變) 늘푸른 봄날처럼 2019. 4. 19. 19:14 ■ 무오정변(戊午政變) ■ 무오정변(戊午政變)은 고려시대 1258년(고종 45) 김준·유경 등이 강도 (江都:지금의 강화도)에서 최씨무인정권을 무너뜨린 정치사건. 최충헌이 1196년(명종 26) 이의민 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이래, 최우 (뒤에 崔怡로 개명)로 최씨정권이 이어졌다. 최씨정권은 보다 공적인 성격을 띤 정치기구와 관원을 두어 그 이전 무인정권의 사적이고 기생적인 성격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최씨정권 역시 권력의 사유화, 비정상적인 정치운영, 몽골의 침입으로 권력다툼이 치열해지고 그 내부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다. 최이는 사위였던 김약선을 후계자로 정하고 나서 첩의 소생인 만전(최항)과 만종이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그들을 송광사로 출가시켰다. 그런데 김약선은 최이와 사이가 벌어져 제거되고, 1248년(고종 35)에 서자인 최항이 환속하여 이듬해 권력을 계승하게 되었다. 최항은 모친이 천계(賤系)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 승려였을 당시 불법적인 행동으로 관료들로부터 집권자로서의 자질을 의심받았으므로, 그가 최이의 후계자로 내정되자 최씨정권 내부의 인물들도 적지 않게 반발했다. 최항은 김약선의 아들인 김미와 주숙의 음모를 봉쇄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부심했다. 최항의 집권과정에서 공이 큰 인물은 유경이나 유천우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공주·최양백·김준 등과 같은 최씨가의 가노(家奴)와 세력기반이 미약한 박송비와 송길유 등이었다. 즉 최항의 심복들은 한미한 출신의 인물로서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했는데, 이들 사이에도 점차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1257년 최항이 죽어 최의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최씨정권에 충성을 바쳐온 인물들 사이에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뒤, 본격적으로 내부분열이 일어났다. 최의가 권좌에 올라 최양백과 유능을 신임한 반면 김준을 멀리하자 김준은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게다가 최우에게 자신을 천거해주었던 송길유를 최의가 유배하자 김준은 더욱 두려움을 느꼈다. 결국 1258년 3월에 김준과 유경은 함께 박희실과 이연소 등의 휘하에 있는 야별초와 신의군을 동원하여 최의를 몰아내고자 했다. 이 모의 과정에서 최항의 장인인 최온과 상장군인 박성재를 주모자로 내세워 최씨정권과 밀착한 인물들의 호응을 얻고자 했다. 결국 최씨정권은 오랫동안 최씨정권에 충성을 바쳐온 인물들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정변에 성공한 뒤 공이 많은 공신들은 위사공신(衛社功臣)과 보좌공신(補佐功臣)으로 책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