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고전 隨筆

계주교서(誡酒敎書) / 유의손(柳義孫)

늘푸른 봄날처럼 2019. 4. 19. 15:43

계주교서(誡酒敎書) / 유의손(柳義孫)

 

 

대개 들으니 옛적에 술을 만든 것은 그저 마시려고만 만든 것이 아니라, 신명을 받들고, 빈객을 대접하고, 나이 많은 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사로 인해서 마실 때는 헌수(獻酬)1)를 절차로 삼고, 활을 쏨으로 인해서 마실 때에는 읍()하고2) 사양하는 것을 예로 삼았다. 향음(鄕飮)3)의 예는 친목을 가르치는 것이요, 양로(養老)의 예는 치덕(齒德)4)을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말하기를, “손과 주인이 백 번 절하고 술은 세 순배를 돌린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종일토록 술을 마시어도 취하게 하지는 않는다.” 하였으니, 선왕이 술에 관한 예를 제정하여 술의 화를 방비한 것이 더할 수 없이 극진하였다. 후세로 내려오매 습속이 옛날과 달라서 오직 술에 빠지기만을 일삼으므로, 금주하는 법이 비록 엄하나 마침내 그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탄식할 만한 일이로다.

 

대저 술이 화가 됨은 심대하다 하겠다. 어찌 곡식을 없애고 재물만 낭비할 뿐이랴. 안으로는 심지(心志)를 어지럽히고 밖으로는 위의를 잃어서, 혹은 부모의 봉양을 폐하고, 혹은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하여, 크게는 나라를 잃고 집을 망치게 하고, 작게는 성품을 해치고 생명을 잃어버리게 하는 바, 강상(綱常)을 어지럽히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바를 일일이 매거할 수가 없다.

 

우선 경계해야 할 것과 본받아야 할 것을 한두 가지 지적하여 말하고자 한다. ()5)나라의 주왕(紂王)6)과 주나라의 여왕(厲王)7)이 이것으로 자신의 나라를 망쳤고, 동진(東晉)8)의 유유(劉裕)9)는 이것으로 남의 나라를 망쳤다. ()나라10) 대부 백유(伯有)11)는 굴속의 집에서 밤새 마시다가 마침내 자석(子晳)12)에게 불태워져 죽었고, 전한(前漢)의 교위(校尉) 진준(陳遵)13)은 매양 손님들과 크게 마시기를 좋아하여 손님을 대접할 적에는 문득 문을 잠그고 손님의 수레바퀴의 비녀장14)을 우물에 던지곤 하였는데,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술에 취하여 살해되었다. 후한(後漢)의 사예교위(司隸校尉)15) 정충(丁冲)16)은 자주 여러 장수들을 찾아다니면서 술을 많이 마시다가 창자가 썩어서 죽었고, () 나라의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17) 주의(周顗)18)는 능히 한 섬의 술을 마셨는데, 우연히 옛날 상대자가 오자 흔연히 함께 마시고 대취하였다가 술이 깨어서 살펴보니, 손님이 이미 옆구리가 썩어 죽어 있었다. 후위(後魏)의 하후사(夏侯史)19)는 성품이 술을 좋아하여 상중(喪中)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않으면서 좋은 막걸리를 입에서 떼지 않았는데, 아우와 누이는 기한(飢寒)을 면치 못하였으며 그 역시 술에 취하여 죽었으니, 이것이 참으로 경계할 만한 일이다.

 

() 무왕(武王)20)주고(酒誥)21)란 글을 지어서 상()나라 백성을 훈계하였고, 위 무공(衛武公)22)빈연(賓筵)23)의 시를 지어서 스스로 경책(警責)24)하였다. 진 원제(晉元帝)25)는 가끔 술 때문에 정사를 폐하므로 왕도(王導)26)가 간절히 말하였더니 술잔을 엎어버리고 드디어 술을 끊었고, 원태종(元太宗)27)은 날마다 대신들과 더불어 취하도록 마시더니, 야율초재(耶律楚材)28)가 술 거르는 틀에 달린 금속 주둥이를 가지고 가서 말하기를, “이 쇠도 술에 상하여 이렇게 되었는데, 하물며 사람의 오장이야 손상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매, 황제가 깨닫고 좌우에게 칙명(勅命)을 내려 하루에 술 석만 올리라고 하였다. () 나라 도간(陶侃)29)은 매번 술을 마실 때 일정한 한계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조금 더 마시라고 권하였더니, 그는 한참 동안 슬픈 빛을 띠고 있다가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술로 실수한 적이 있어서 돌아가신 부모님께 약속을 하였으므로 감히 한계를 넘지 못한다.” 하였다. 유곤(庾袞)30)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에 항상 술을 경계하라고 하였는데, 뒤에 매양 술에 취하면 문득 자책하기를, “내가 아버님의 훈계를 폐하였으니 어떻게 남을 훈계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아버지의 묘 앞에서 스스로 매 20대를 쳤다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본받을 만한 일이다.

 

또 우리나라의 일로 말하면 옛적에 신라가 포석정(鮑石亭)31)에서 무너졌고, 백제가 낙화암(落花岩)32)에서 망한 것이 술로 말미암지 않은 일이 없고, 고려의 말기에는 상하가 서로 이끌고 술에 빠져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다가 마침내 멸망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도 또한 은감(殷鑑)33)이 되는 일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략)

 

아아, 술이 화를 빚어내는 것이 이처럼 참혹하건만 아직도 깨닫지를 못하니, 이 또한 무슨 심사인가? 비록 국가를 염려하지는 못할망정 자기 한 몸의 성명(性命)34)조차 돌아보지 못한단 말인가? 조신(朝臣) 중에 유식한 사람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여항(閭巷)의 백성들이야 무슨 짓은 못하랴? 옥사(獄事)나 송사(訟事)가 자주 일어나는 것도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많았다. 시초에 삼가지 않으면 말류(末流)의 폐단이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중략)술 마시기를 즐기느라고 일을 폐()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과음하여 몸에 병이 들게 하지 말 것이며, 각각 너의 행동을 조심하여 무이(無彛)35)의 훈계를 따라 굳게 술을 절제하여 오변(於變)36)의 풍속을 이루게 하라. 너희 예조(禮曹)에서는 나의 이 간절한 뜻을 본받아서 안팎에 효유(曉諭)37)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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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헌수(獻酬): 잔을 바침.

2) ()하다: 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공손히 구부렸다가 몸을 펴면서 손을 내리는 인사하는 예()의 하나이다.

3) 향음(鄕飮): 예전에, 온 고을의 유생(儒生)이 모여 향약(鄕約: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향촌의 자치 규약)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던 일. 향음례향음주례(鄕飮酒禮).

4) 치덕(齒德): 나이가 많고 덕이 있음.

5) ()나라: 중국 삼대(三代: 夏殷周)의 은나라의 다른 이름.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이 상()이었기에 은나라를 상()이라고도 부른다.

6) 주왕(紂王): 중국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 이름은 제신(帝辛)이고, ()는 시호(諡號)이다. 지혜와 체력이 뛰어났으나, 주색을 일삼고 포학한 정치를 하여 인심을 잃어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살해되었다.

7) 여왕(厲王): 서주(西周: 동천[東遷: B.C.771] 이전) 10대왕(재위 B.C.877-B.C.841). 이름은 희호(姬胡)이며, 시호는 여왕(厲王)이다. ‘여왕(厲王)’이란 시호는 대표적인 악시(惡諡)’이다. ‘난폭하고 교만하였던 제후왕이었기에 그러한 시호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는 재위 기간에 간신 영이공(榮夷公)을 중용하고 현신인 주공(周公), 소공(召公) 등의 간언을 물리치고 폭정을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경대부(卿大夫) 등의 국인(國人: 국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 대부분 왕이나 공경과 혈연관계에 있던 사람들이다.)에게 나누어주었던 토지와 산림(山林) 등을 회수하였다. 이에 소위 국인들의 폭동이 일어났고, 그는 체()나라로 도망을 갔다. 초나라 사람 화씨(和氏)가 초산에서 주워온 옥돌(화씨지벽[和氏之璧])을 감정하여 보고, ‘이라는 감정 결과에 자신을 속였다고 옥돌을 바쳤던 화씨를 월형(刖刑: 죄인의 발꿈치를 베던 형벌)에 처했던 왕이기도 하다.

8) 동진(東晉): 중국 남북조 시대에, 서진(西晉:265-316) 멸망 후 왕족 사마예(司馬睿)317년에 지금의 난징[南京]에 도읍하여 세운 나라(317-419). 공제(恭帝) 때인 420년 가신(家臣) 유유(劉裕)에게 멸망하였다.

9) 유유(劉裕: 363-422): 중국 남조 송의 초대 황제(재위 420-422). 자는 덕여(徳輿).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무제(武帝). 다른 송나라 왕조와 구별하기 위해서, 유유가 건국한 송나라는 흔히 유송(劉宋)이라고 한다.

10) ()나라: 중국 춘추 시대, 기원전 806년에 주나라 선왕(宣王)의 아우 환공(桓公)이 세운 나라. 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화현(華縣)에 있다가 뒤에 허난 성[(河南省] 신정현(新鄭縣)으로 옮겼는데, 전국 시대 초기 기원전 375년에 한()나라 애후(哀侯)에게 망하였다.

11) 백유(伯有): 중국 춘추시대 정()나라의 대부(大夫). 본명은 양소(良宵)이고 백유는 그의 자()이다. 백유는 무척 포악한 사람으로 공손단(公孫段), 자석(子晳)과 맞섰는데, 땅굴을 파서 집을 만들고 그 속에서 밤에 술을 마시다가 자석(子晳)에게 잡혀서 불태워져 죽었다. 사람들은 평소 백유를 무서워했는데 죽어서 악귀(惡鬼)가 되어 닥치는 대로 보복을 할까봐 상경백유(相驚伯有: 백유라는 말에 서로 놀란다)’라는 고사성어까지도 생겨났다. 요즈음엔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놀란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12) 자석(子晳): 백유(伯有)를 죽인 사람. 남의 위에 있기를 좋아하여 백유(伯有)와 서로 용납하지 못하였다. 공자의 제자인 증점(曾點)의 자()도 자석(子晳)이라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13) 진준(陳遵): 전한(前漢)의 두릉인(杜陵人)으로 자()는 맹공(孟公)이다. 성품이 호방하여 호걸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는 술을 몹시 좋아해서 곧잘 주연(酒宴)을 베풀었다고 한다. (?한서(漢書)? 유협전(遊俠傳) 진준(陳遵))

14) 비녀장: 수레바퀴가 굴대에서 빠지지 않도록 굴대머리에 지르는 큰 못. 진준이 비녀장을 우물에 던져버렸다는 데에서 진맹투할(陳孟投轄)’이란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15) 사예교위(司隸校尉): 치안을 담당하던 관직. 군사권과 행정권은 물론 범죄자를 검거할 수 있는 사법권, 지방 관청에 대한 감독권까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권력은 삼공을 제외한 모든 대신과 맞먹었다.

16) 정충(丁冲): 중국 삼국시대 사주(司州) 형양군(滎陽郡) 개봉현(開封縣) 사람. 자는 문화(文和), 벼슬은 사예교위(司隸校尉)에 이르렀다.

17)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고려시대의 경우를 보면, 정무를 맡은 육부를 통할하던 관아인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속한 정2품 벼슬이었다.

18) 주의(周顗): () 여남(汝南)의 안성(安成) 사람으로, 자는 백인(伯仁)이다. 진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를 보좌하였다. 풍모와 품격이 고상하고 중후하고 술을 좋아하였는데, 세월이 어지럽자 사흘 동안을 술에 취해 지내어서 사람들이 삼일복야(三日僕射)’라 불렀다. 역신(逆臣) 왕돈(王敦)에게 해를 입었다.(?진서(晉書)? 「주의전(周顗傳))

19) 후위(後魏)의 하후사(夏侯史): 후위(後魏)=북위(北魏)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조(北朝) 최초의 나라로 386년에 선비족(鮮卑族)의 탁발규(拓跋珪: 후의 道武帝)가 화베이[華北]에 세운 나라였는데, 적극적인 중국 동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반란이 일어나 534년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하였다. 조조(曹操)의 위() 등과 구별하기 위해서 후위, 북위, 탁발위 등으로도 부른다. ‘하후사(夏侯史)’는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다. 하후(夏侯)는 복성(復姓)이다. ?삼국지(三國志)?의 조조(曹操)는 아버지 조숭(曹崇)이 조씨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는 바람에 조씨 성을 물려받았지만, 원래는 하후씨(夏侯氏)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20) () 무왕(武王): 중국 주나라의 제1대 왕(?-?). 성은 희(). 이름은 발(). () 왕조를 무너뜨리고 주 왕조를 창건하여, 호경(鎬京)에 도읍하고 중국 봉건 제도를 창설하였다. 후대에 현군(賢君)으로 평가받았다.

21) 주고(酒誥): ?서경(書經)?속의 태서(泰書)로부터 진서(秦書)까지의 32편을 ?주서(周書)?라 하고, 그 제12편이 주고(酒誥)이다. ‘()’란 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알리는 글, 깨우쳐주는 글이다.

22) 위 무공(衛武公): ()는 주나라의 제후국이다. 위나라는 상()이 주()에 의해 멸망한 직후 주 무왕의 친동생인 강숙이 상의 수도 조가(朝歌)와 그 주위의 땅에 봉해짐으로써 세워졌다. 위 무공 (衛武公: B.C.812- B.C.758 )은 그 11대 제후이다.

23) 빈연(賓筵): 손님을 대접하는 자리.

24) 경책(警責): 정신을 차리도록 꾸짖음.

25) 진 원제(晉元帝): 중국 동진(東晉)의 초대 황제(재위: 317-322) 사마예(司馬睿). 자는 경문(景文), 하내군(河内郡) 온현(温縣) 출신.

26) 왕도(王導): 중국 동진(東晉)의 재상. 자는 무홍(茂弘). 사마예(司馬睿, 元帝)를 옹립해 동진 왕조를 건립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이다.

참고: 왕도는 종형제(從兄弟) 왕돈(王敦)이 반란을 일으킨 일로 죽게 되었을 때, 주백인(周伯仁)이 변호하여 살았으나 그런 내막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일로 인하여 이번에는 백인이 죽게 되었다. 왕도는 그를 살릴 수 있는 처지에 있었음에도 지난 번 자신이 죽게 되어 백인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던 일을 생각하고 모르는 체 하여 백인은 죽었다. 이튿날 입조하였을 때, 그는 우연히 백인이 자신을 변호해 원제에게 바친 상소문을 보게 되고 한탄을 한다.

我雖不殺伯仁伯仁由我而殺.(내 비록 백인을 죽이지 않았지만, 백인은 나로 말미암아 죽었도다.)”

이 말은 조선조 말 유씨(兪氏)부인이 지은 수필 조침문(弔針文: 일명祭針文)에도 인용되어 있다.

백인은 전주 695)에 나온 주의(周顗)이다.

27) 원 태종(元太宗): 원나라 제2대 영문황제(英文皇帝: 재위 1229-1241).

28) 야율초재(耶律楚材): 원 초기의 공신. 자는 진경(晉卿). 시인으로서도 뛰어나 문집 ?담연거사집(湛然居士集)? 14권과, 서역에 종군했을 때의 견문기인 ?서유록(西遊錄)? 등이 있다. 그는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으나,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29) 도간(陶侃): 도연명(陶淵明)의 증조부(259-334), 동진의 개국원훈. 자는 사행(士行)이다. 반란을 평정하고 대장군에 올랐으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친은 일찍 죽고 모친의 손에서 자랐다. 젊었을 때, 물고기를 기르는 연못의 관리를 맡았는데, 어느 날, 그는 절인 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그의 어머니는 고기를 먹지 않고 그를 꾸짖었다. 또 한번은, 배를 만드는 일을 관리하게 되었는데, 배를 만드는 과정에서 톱밥 등이 많이 나왔다. 도간은 이것들은 모두 모아 놓도록 지시했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내린 후 날씨가 갑자기 개자, 세상이 온통 진흙탕이 되었다. 도간은 즉시 톱밥을 꺼내 길 위에 뿌렸다.

30) 유곤(庾袞): () 명목왕후(明穆王后)의 백부로 자는 숙포[叔褒]이다. 근검하고 학문이 도타우며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웠다.

31) 포석정(鮑石亭): 포석정은 신라 이궁(離宮: 임금이 나들이 때에 머물던 별궁. =行宮)의 하나였다. 지금은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떠가게 하고(유상곡수[流觴曲水]) 시를 짓고 읊으며 풍류를 즐기던 돌로된 유구만 남아 있다. 전복 모양으로 구불구불한 형상은 주위의 경관과 어울려 신라인의 탁월한 궁원예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왕조 말에는 포석정에서 잔치와 놀음이 지나치기도 했다. 후백제의 대군이 침공하여 천년의 사직을 위협함에도 경애왕(景哀王)은 안이하게 비빈, 궁녀, 종친, 중신들과 늘 이곳에서 놀이에 젖어 있다가 후백제군의 급습으로 왕 자신의 참혹한 최후는 물론이요, 신라 천년의 사직이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고도 한다.

32) 낙화암(落花岩): 낙화암(落花岩)은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부소산(扶蘇山)에 있는 바위이다. 백제 의자왕 20(660) ()()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泗泌城)이 함락될 때, 백제의 3천 궁녀가 이곳에서 백마강(白馬江)을 향해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33) 은감(殷鑑): ()은 전대(前代)의 하()가 멸망한 것을 교훈으로 하라는 뜻으로, 거울삼아 경계하여야 할 전례를 이르는 말.

34) 성명(性命): ‘목숨이나 생명(生命)’을 달리 이르는 말.

35) 무이(無彛):?서경(書經)?에 나오는 무이주(無彛酒)’의 준말로, 노상 술을 마시지 말라는 뜻 .

36) 오변(於變)의 풍속: 풍속이 아름답게 변하였다는 뜻.

37) 효유(曉諭): 깨달아 알아듣도록 타이름. 효시(曉示).

 

 

 

 

해설

 

지은이 유의손(柳義孫: 1398-1450?)은 자를 효숙(孝叔), 호를 회헌(檜軒)이라 한다. 집현전 직제학, 도승지를 거쳐 공조, 이조의 참판을 지냈고 뒤에 예조참판에 기용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으며,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대문장가로 알려졌으며 저서에 회헌선생일고(檜軒先生逸稿)가 있다.

 

계주교서는 세종의 명에 의하여 1433년에 기초한 글로서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하여 중앙과 지방에 반포케 하였는데 세종 151028일자 조선왕조실록회헌선생일고동문선24교서(敎書)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글은 아니지만, 술에 대한 경계의 글로서는 갈홍(葛洪)1)이 지은 포박자(抱朴子)(외편 2)에 나오는 주계(酒戒)도 빼놓을 수 없는 글이다. 포박자(抱朴子)는 석원태(昔原台)가 역주(譯註)한 신역(新譯) 포박자(抱朴子)(서림문화사, 1955.5.)도 있어 한문에 취약한 사람도 읽어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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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홍(葛洪): 동진(東晋) 사람. 그가 317년에 지은 ?포박자(抱朴子)?는 중국의 도가서(道家書)로 내편(內篇)은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선술(仙術)과 구체적인 이론을 기술했고, 외편(外篇)은 유교적 정치론으로 시정(時政)의 득실, 인사(人事)의 선악 등을 논설(論說)한 책이다. 주계(酒戒)는 석원태(昔原台)의 번역서 pp.90-96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