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사색당파의 이해 3.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핵분열 된 이유 늘푸른 봄날처럼 2019. 4. 13. 22:05 ■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핵분열 된 이유 옛 속담에 뱀은 꿈틀거리는 버릇 평생 못 버린 댔다고, 오랜 단련 끝에 싸움질이 숫제 체질화되다보니 전란 중에도 그들의 당쟁은 멈추지 않았다. 1594년 남인과 북인은 이조전랑 추천문제로 다시 한 번 ‘다구리’를 붙고 말았다. 남인 정경세가 남이공 등이 후임자로 추천한 북인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을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정경세는 유성룡의 문인이었으므로 이산해는 즉각 유성룡에게 공격의 화살을 퍼부어댔고, 1598년(선조31년) 끝내 탄핵과 함께 삭탈관직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북인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전란 때 도망(고상한 표현으로 '몽진'이라 한다)가기에 급급했던 선조 ․ 조정 대신들과는 달리 북인들은 ‘주전론(主戰論)’으로 일관하며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명분의 우위에 있었다고나 할까. 임금을 비롯한 지배층의 도망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선조는 그 책임을 동인에게 돌리며 서인에게 잠시 정권을 주었다가 이를 다시 북인에게 주었다. 서인도 고경명 같은 이름 높은 의병장이 나오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의병장의 주류는 단연 북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유명한 ‘홍의장군’ 곽재우도 북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입으로만 하는 정치에 신물이 나있던 백성들에게도 '실천'을 중시한 남명 조식의 문하로 이루어진 북인이야 말로 ‘발로 뛰는(?)’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참신한 세력이었을 터이었다. 그러나 배운 도둑질 못 고친다고, 임진왜란이 끝나기 무섭게 북인은 다시 분열의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1599년 북인 홍여순이 대사헌에 오르려 할 때 같은 북인 남이공이 이에 반대하자 북인은 홍여순 파(대북)와 남이공 파(소북)로 나눠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1602년 소북의 영수 유영경이 영의정 자리에 오르면서 소북이 득세하여 정권을 잡고 한동안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대북과 소북이 사생결단으로 치고받는 일이 발생하였다. 세자책봉문제 때문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나던 해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분조(分朝-나라를 나누어 다스림)까지 한 바 있고 광해군 또한 전란 중 분조의 책임자로서 많은 공을 세운 바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선조의 마음이 싹 변해버린 것이었다. 제위 35년(1602년)에 서른두 살 아래의 인목왕후와 재혼한 선조는 1606년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그에게 후사를 잇게 하고 싶어 했다. 평소 조선 최초의 방계승통(선조는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 소생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다) 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선조는 자신처럼 후궁 소생인 광해군보다는 정비 소생의 영창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함으로써 이를 떨쳐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 문제를 두고 북인은 완전히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세자 책봉 이후 16년간 함께 정사를 다룬 노장파인 대북은 당연히 광해군을 지지하였고, 광해군과 인연이 적은 소장파 중심의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하였다. 대북은 아기인 영창대군이 어떻게 국정을 돌보느냐고 주장했고, 소북은 왕통은 당연히 적자가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북의 중심인물은 이산해, 정인홍 등이었고, 소북의 중심인물은 유영경, 남이공, 김개국 등이었다. 그러나 영창대군이 세 살일 때 선조가 사망하면서 결국 왕위는 광해군이 이어받게 되었다. 명실상부한 대북정권의 출범이었다. 소북인 영의정 유영경과 병조판서 박승종 등이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으나 34세의 광해군을 두고 3세의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잇게 한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비현실적이었다. 유영경의 광해군 배척은 상식을 벗어났던 것이기에 심지어 소북 내에서도 반대파가 속출하여 유영경을 지지하는 탁소북(柳黨-유연경당)과, 그를 반대하는 청소북(南黨-남이공당)으로 다시 쪼개지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정권을 잡은 대북도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폐위를 요구한 골북(骨北), 육북(肉北)과 이에 반대한 중북(中北)으로 갈라지는 핵분열 사태를 겪게 되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자신을 지지한 대북을 중용해 내정(대동법 시범실시 등)과 외교 (등거리외교정책)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이이첨 등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과 적통(嫡統)인 영창대군을 살해하는가 하면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패륜을 자행하는 등 실정도 끊이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재위 5년 만에 터진 이른바 '칠서지옥(七庶之獄)' 사건이었다. 영의정 박순의 아들 박응서 등 문벌의 서자로 태어난 일곱의 서자들, 스스로 '죽림칠현'이라고 부르며 무륜당이라는 거처를 짖고 시와 술을 가까이 하던 이들 일곱 명이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정에 대한 그들의 불만과 배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왜란이 발발하고 곤궁에 놓인 조정은 서자들의 의병참여를 이끌어내려고 그들에게도 과거응시 기회를 주겠다는 공약을 하였으나, 정작 전쟁이 끝나고 정국이 안정을 되찾게 되자 말을 바꾸고 오히려 예전보다 더 심한 제재를 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 일곱의 서자가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돈을 강탈했다가 간신히 살아난 상인의 하인에게 뒤를 밟혀 모두 잡혀버리고 말았다. 한데, 단순한 서자들의 강도행위처럼 보였던 사건은 역모로 확대되어 거대한 피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박응서는, 모반에 필요한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강도짓을 했으며 배후에는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있다고 자백하였다. 가뜩이나 정통이나 역모에 민감했던 광해군은 광분하였다. 영창대군이 태어난 이후 계속되었던, 세자책봉과 관련한 마음고생이 올곶이 되살아나려 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리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귀양을 갔다가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에 의하여 방을 뜨겁게 해서 데워 죽이는 증살을 당하였고,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의 아들 능창군 (인조의 아우)을 교동에 구금하였다가 살해하였다. 대비 김씨에 대해도 계속 압박을 가하던 중 1617년에 이르러 드디어 폐모론이 대두되었다. 이 폐모론을 놓고 대북권력 내부에서는 권력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결국 가장 강력한 주장을 펼친 이이첨이 실권을 장악하는 대신 이를 반대하였던 영중추부사 이항복, 영의정 기자헌 및 정홍익·김덕함 등은 귀양을 가고 말았다. 조선의 종묘사직에 최초로 대북파 '1당독립체제'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잉행위가 반동을 낳는 것은 세상사의 원리-. 이는 한동안 은인자중하며 ‘인생역전’을 꿈꾸던 서인으로 하여금 반정을 결심케 하는 구실을 만들어 주고 말았다. 서인은 광해군의 -명나라도 후금(여진족)도 아닌 - 실리 위주의 중립외교정책을 명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는 한편 그의 폐륜행위 또한 극렬히 비판하다가 결국 광해군 15년(1623) 3월 김류․이귀․김자점․최명길․이괄․이서 등이 주축이 되어 선조의 서손 능양군(인조)을 추대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인조반정이었다. 광해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강화도로 유배되고 대북파 이이첨 등 수십 명은 참수되었으며,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되었다. 사실상 북인정권의 몰락이었다. 능양군(인조)은 선조가 인빈 김씨에게서 낳은 셋째아들 정원군의 아들이었고, 선조가 총애했던 정원군의 형 신성군의 양자이기도 했으므로 서인들의 입장에서는 반정의 명분이 있었다. 또한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능양군(인조)의 동생인 능창군을 ‘신경희의 옥사’(1615년 광해군 때의 문신으로 능창군을 추대하고 양시우, 김정익 등과 반역을 모의하였다는 대북파의 모함으로 장살됨)에 연루시켜 처형했기 때문에 광해군과 대북정권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능양군(인조)은 반란세력들에 쉽게 동조될 수 있었고, 중종이 반정 과정에서 소외된 것과는 달리 그는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사태를 주도하였다. 하지만 인조반정이 백성들에게 생각보다 그리 큰 환영을 받지 못하자 서인은 남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는 것으로 민심 달래기에 나섰다. 북인이 우당(友黨)이 될 수 있었던 남인까지 축출해 고립을 자초한 반면 서인은 남인을 끌어들여 정권의 외연을 확대하였던 것이다. 서인은 이런 유연한 정국 운용으로 쿠데타에 대한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다. 서인은 대북(大北)이 일당독재를 추구하다가 축출된 전례를 거울삼아 이원익 외에도 이수광․정경세․이성구․김세렴․김식 등 남인들을 등용해 ‘서남연합정권’임을 내외에 과시하려 하였다. 비록 이때 등용된 남인들이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명목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이는 명분상 사대부의 화합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반정 정권은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이 발생함으로써 그 취약성을 드러냈다. 이괄의 난이란, 서인 사이에 논공행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이에 불만을 품은 부원수 이괄이 변란을 기도하여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사건을 말하는데, 쿠데타 세력의 내부 분열인 이 사건은 엉뚱하게도 북인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인조와 서인정권은 서울을 버리고 도망가기 직전 감옥에 갇혀 있던 전 영의정 기자헌 등 49명의 정치범을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전격적으로 처형시켰다. 이때 희생당한 대부분의 정치범들은 북인, 특히 대북의 거물들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북인은 정계에서 축출되었고, 잔류파는 서인․남인에 흡수됨으로써 완전히 몰락하여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