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완판 105장본) - 5
하루는 소저가 부인을 모시고 중당에 앉았는데 사도가 과거 방목(榜目)을 가지고 희색이 만연하여 들어오며 부인에게 말하였다.
“내 아기의 혼사를 정하지 못하여 밤낮으로 염려하였는데 오늘날 어진 사위를 얻었소.”
부인이 말하였다.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가 말하였다.
“이번 장원한 사람은 성은 양씨요 이름은 소유요, 나이는 십륙 세요, 회남 땅 사람이오. 그 풍채는 두목지(杜牧之)요, 그 재주는 조자건(曹子健)이니 진실로 이 사람을 얻으면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소.”
부인이 말하였다.
“열 번 듣는 것이 한번 보기만 못하다 하니 친히 본 후에 정하십시오.”
소저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즉시 일어나 침소에 가 춘운에게 말하였다.
“저번에 거문고 타던 여관이 초 땅 사람이라 하더니 회남은 초 땅이다. 양장원이 분명히 부친께 뵈오려 올 것이니 춘랑은 자세히 보고 나에게 이르라.”
춘운이 웃으며 마하였다.
“나는 여관을 보지 못하였사오니 양장원을 본들 어찌 알겠습니까. 소저가 주렴 사이로 잠깐 보시면 어떠하겠습니까?”
소저가 말하였다.
“한번 욕을 먹은 후에 다시 볼 뜻이 있겠는가.”
이때 양장원이 회시(會試) 장원하고 이어서 급제 장원하여 한람학사를 하니 이름이 천하에 가득하였다. 명문 귀족의 딸 둔 집에서 매파를 보내어 구혼하는 집이 구름 모이 듯 하였다.
생이 정사도와의 혼사를 생각하여 다 물리쳤다. 하루는 한림이 정사도를 뵈오려 가 통하자 사도가 즉시 화당을 청소하고 맞는데, 한림이 머리에 계수나무 꽃을 꽂고 홍패(紅牌)와 한림 유지(諭旨)를 드리고 화동(花童)과 악공(樂工)이 각색 풍류를 울리며 사도께 뵈니, 풍채가 아름답고 예의를 지키는 태도나 행동이 거룩하여 사도가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춘운이 시비 등을 불러 말하였다.
“이전에 거문고를 타던 여관이 아름답다 하더니 양한림과 어떠하더냐?”
다 이르되,
“그 여관의 얼굴과 아주 같습니다.”
춘운이 들어가 소저의 눈이 밝은 줄을 말하였다.
사도가 한림에게 말하였다.
“나는 팔자가 기구하여 아들이 없고 다만 딸자식이 있으되 혼처를 정하지 못하였으니 한림이 내 사위가 됨이 어떠한가?”
한림이 일어나 절하고 말하였다.
“소자가 경성에 들어와 소저의 요조(窈窕)한 얼굴과 그윽한 재주와 덕행은 일찍이 들었지만 문벌이 하늘과 땅 사이처럼 다르고 인품이 봉황과 오작 같사오니 어찌 바라겠습니까마는 버리지 아니하시면 하늘 같은 은덕으로 여기겠습니다.”
사도가 크게 기뻐하여 술과 안주로 대접하였다.
한참 후에 부인이 소저를 불러 말하였다.
“새로 장원으로 뽑힌 양한림은 만인이 칭찬하는 바이다. 네 부친이 이미 혼인을 허락하셨으니 우리 부처는 몸을 의탁할 곳을 얻었구나. 무슨 근심이 있겠느냐.”
소저가 말하였다.
“시비의 말을 들으니 양한림이 전에 거문고를 타던 여인과 같다 하던데 그러합니까?”
부인이 말하였다.
“그래, 내가 그 여관을 사랑하여 다시 보고자 하였지만 자연 일이 많아 못하였는데, 오늘 양한림을 보니 그 여관을 다시 본 듯하여 즐거운 마음을 어찌 금하겠느냐.”
“양한림이 비록 아름다우나 소저에게 혐의가 있사오니 더불어 혼인함이 마땅치 아니합니다.”
부인이 크게 놀라 말하였다.
“너는 재상가 규중의 처녀요, 양한림은 회남 땅 사람이니 무슨 혐의가 있겠느냐?”
소저가 말하였다.
“소녀가 말씀 드리기 부끄러워 모친께 아뢰지 못하였지만 오늘 양한림은 이전에 거문고를 타던 여관입니다. 간사한 사람의 꾀에 빠져 종일 말을 주고 받았으니 어찌 혐의가 없겠습니까?”
부인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여, 사도가 한림을 보내고 바삐 들어와 소저를 불러 말하였다.
“경패야, 오늘날 용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 경사를 보았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느냐.”
부인이 소저가 혐의하는 말을 아뢰자, 사도가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양랑은 진실로 만고의 풍류 남자로다. 옛적 왕유(王維)도 악공(樂工)이 되어 태평공주(太平公主)의 집에 들어가 비파(琵琶)를 타고 돌아와 장원급제함에 만고에 칭찬이 오래 전하였는데, 이제 한림이 또 기이한 일이로다. 또 너는 여관을 보고 한림을 보지 아니하였으니 무슨 혐의가 있겠느냐?”
소저가 말하였다.
“소저가 욕먹기는 부끄럽지 아니하오나, 제가 어질지 못하여 남에게 속은 것이 한이 됩니다.”
사도가 웃으며 말하였다.
“그것은 늙은 아비가 알 바가 아니다. 훗날 양한림에게 물어보아라.”
사도가 부인에게 말하였다.
“올 가을에 한림의 대부인을 모셔온 후 혼례는 행하겠지만 납채(納采)는 먼저 받을 것이오. 즉시 택일(擇日)하여 납채를 받고 한림을 데려와 화원 별당(別堂)에 두고 사위의 예로 대접할 것이오.”
하루는 부인이 한림의 저녁 반찬을 장만하는데 소저가 보고 말하였다.
“한림이 화원에 오신 후로 의복과 음식을 친히 염려하시니 소저가 그 괴로움을 당하고자 하나 인정(人情)이나 예법(禮法)에 맞지 않아 못하지만, 춘운이 이미 장성하여 족히 온갖 일을 당할 수 있으니 화원에 보내어 한림을 섬기게 하여 노천의 수고를 덜까 합니다.”
부인이 말하였다.
“춘운이 얼굴과 재주로 무슨 일을 못 당하겠느냐마는 춘운의 얼굴과 재주가 너와 진배없으니, 먼저 한림을 섬기면 반드시 부인의 권한을 빼앗아 갈까 염려 되는구나.”
소저가 말하였다.
“춘운의 뜻이 소저와 함께 한 사람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니 따르지 아니할 이유가 없을 것이고, 또 춘운을 먼저 보내면 권한을 빼앗길까 염려하시지만, 한림이 나이 어린 서생으로 재상가 규방(閨房)에 들어와 처녀를 희롱하니 그 기상이 어찌 한 아내만 지키어 늙겠습니까. 타일에 승상부(丞相府)의 많은 녹봉을 먹을 때 춘운 같은 자색이 몇일 줄을 알겠습니까?”
부인이 사도께 고하자, 사도가 말하였다.
“어찌 나이 어린 남자로 빈 방 촛불만 벗삼게 하겠소.”
이날 소저가 춘운에게 말하였다.
“춘랑아, 내 너와 어려서부터 동기같이 지냈는데 나는 이미 한림의 납채를 받았거니와 너도 나이가 자랐으니 백 년 대사를 염려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을 섬기고자 하는냐?”
춘운이 말하였다.
“소저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첩은 소저를 따라 한 사람을 섬기고자 하오니, 원컨대 소저는 버리지 마십시오.”
소저가 말하였다.
“내 본디 춘랑의 뜻을 안다. 의논코자 하는 일이 있으니 어떠하냐? 한림이 거문고 한 곡조로 규중 처녀를 희롱하였으니 그 욕이 중하구나. 우리 춘랑이 아니면 누가 나를 위하여 그 치욕을 씻어 주겠는가? 종남산(終南山) 자각봉(紫閣峯)은 산이 깊고 경개가 좋다. 춘랑을 위하여 별도의 작은 방을 지어 춘랑의 화촉을 베풀고, 또 사촌형 십삼낭(十三郎)과 기특한 꾀를 내면 내 부끄럼을 씻게 될 것이다. 춘랑은 한번 수고를 아끼지 말라.”
춘운이 말하였다.
“소저의 말씀을 어찌 사양하겠습니까마는 타일에 무슨 면목으로 한림을 뵙겠습니까?”
소저가 말하였다.
“군사의 무리는 장군의 명령을 듣는다 하니, 춘랑은 한림만 두려워하는구나.”
춘랑이 웃으며 말하였다.
“죽기도 피하지 못하는데 소저의 말씀을 어찌 좇지 아니하겠습니까?”
각설.
한림이 한가한 날이면 술집에 가 술도 먹으며 기생도 구경했는데, 하루는 정십삼이 와 한림에게 말하였다.
“종남산 자각봉이 산천이 아름답고 경개가 좋으니 한번 구경함이 어떠하오?”
한림이 말하였다.
“바로 내 뜻입니다.”
하고, 술과 안주를 이끌고 갔다.
한 곳에 도착하니 꽃과 풀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온갖 꽃은 아리따운데, 문득 시냇물에 꽃이 떠내려오거늘 한림이 말하였다.
“반드시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있을 것이다.”
정생이 말하였다.
“이 물이 자각봉에서 내려오는데, 일찍이 들으니 꽃 피고 달 밝은 때에는 신선의 풍류 소리가 있어 들은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는 신선(神仙 )과의 연분이 없어 한번도 구경치 못하였으니, 오늘 형과 함께 옷을 떨치고 올라가 신선의 자취를 찾고자 합니다.”
그러할 때 문득 정생의 종이 바삐 와 아뢰었다.
“낭자의 병이 중하오니 상공을 어서 오시라 합니다.”
정생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과연 신선과의 연분이 없도다. 인연(因緣)이 이러하여 가지만 양형은 신선을 찾아보고 오시오.”
하고 가자, 한림이 흥을 이기지 못하여 혼자 올라 가더니 물 위에 나뭇잎이 떠내려 오거늘 건져보니 글씨가 있으되, ‘선방(仙厖)이 운외폐(雲外吠)하니, 지시(知是) 양랑래(楊郞來)로다. 신선의 개 구름 밖에서 짖으니, 알겠군, 양랑이 오는구나.’ 하였거늘, 한림이 크게 놀라 말하였다.
“이는 반드시 신선의 글이다.”
하고, 층암절벽으로 올라가니, 이때 날이 저물고 달이 밝아 길은 험하고 의탁할 곳이 없어 배회하는데, 갑자기 푸른 옷을 입은 선동(仙童)이 시냇가의 길을 쓸다가 한림을 보고 들어가며,
“양랑이 오십니다.”
하거늘, 한림이 더욱 놀라 어린 선녀(仙女)를 따라 가니 층암절벽 위에 한 정자가 있으되, 온갖 화초가 만발한데 앵무 공작이며 두견새 소리가 낭자하니 진실로 선경(仙境)이었다.
한림이 마음이 황홀하여 들어가니 비단 장막에 공작 병풍을 둘렀는데 촛불을 밝게 켜고 서있다가 한림께 나와 예를 올린 후에 말하였다.
“양랑께서는 어찌 저물어 오십니까?”
한림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소생은 인간 사람이라 신선과 혼약(婚約)할 연분이 없는데 어찌 더디다 하십니까?”
선녀가 말하였다.
“한림은 의심치 마십시오.”
하고, 여동을 불러 말하였다.
“낭군께서 멀리 와 계시니 급히 차를 드려라.”
하니, 여동이 즉시 백옥 쟁반에 신선의 과일을 배설하고 유리잔에 자하주(紫霞酒)를 부어 권하거늘, 그 술이 인간 술과 달랐다.
한림이 말하였다.
“선녀는 무슨 일로 요지(瑤池)의 무한한 경개를 버리고 이 산중에 와 외로이 머무십니까?”
선녀가 탄식하여 말하였다.
“옛 일이 꿈 같아 생각하면 슬픕니다. 첩은 서왕모(西王母)의 시녀로서 광한궁(廣寒宮)의 잔치 때 낭군이 첩을 보고 희롱했다 하시고 옥황상제(玉皇上帝)께서 진노하시어 낭군은 중죄하여 인간으로 귀양 보내고 첩은 경한 죄로 이 산중에 와 있는데, 낭군이 화식(火食)을 하신 까닭에 전생 일을 알지 못하시는군요. 상제께서 첩의 죄를 용서 하셔서 곧 승천하라는 분부가 계셨지만 낭군을 만나 전생의 회포를 풀고자 하는 까닭에 아직 머물렀으니 한림은 의심치 마십시오.”
한림이 이 말을 닫고 선녀의 손을 이끌어 침소로 들어가 오랬동안 바라던 회포를 다 못 풀었는데 사창(紗窓)이 밝아왔다.
선녀가 한림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첩이 승천할 날이어서 모든 선관(仙官)이 첩을 데리러 올 것이니, 낭군은 오래 머물지 못 하실 것입니다.”
하고, 어서 가기를 재촉하며 말하였다.
“낭군이 첩을 잊지 아니 하신다면 다시 만나뵈올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하며, 수건에 이별시를 써 한림에게 주거늘, 한림이 옷소매를 떼어 그 글에 화답하였다.
선녀가 그 글을 보고 눈물을 지으며 말하였다.
“서산에 달이 지고 두견이 슬피 우니 한번 이별하면 구만 장천 구름 밖에 이 글귀뿐이군요.”
글은 받아 품에 품고 재삼 재촉하였다.
“때가 점점 늦어지니 낭군은 어서 가십시오.”
한림이 선녀의 손을 잡고 눈물로 이별하니 그 애련한 정은 차마 보지 못할 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