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사색당파의 이해

4. 을사사화(乙巳士禍)

늘푸른 봄날처럼 2019. 4. 5. 21:00


    
    ■ 을사사화(乙巳士禍)
    
    네 번째는 1545년(인종 1)의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이것은 왕실의 외척인 윤임, 즉 대윤과 같은 파평 윤씨인 윤원형, 즉 소윤 사이의 
    권력다툼에 말려들어 많은 선비가 타격을 받은 사건이다. 물론 이 사화 역시 
    갑자사화의 경우처럼 선비사회 사이의 싸움은 아니지만 
    이 여파로 인해 많은 선비가 희생되었기 때문에 사화라고 한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정계 정면에서 후퇴하자 심정, 이항 등의 세력과 김안로 세력이 
    치열한 권력다툼을 일으켰다. 이때 김안로는 심정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으나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내통하여, 심정 일파가 유배중이던 경빈 박씨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탄핵하여 그들을 사형시키고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정권장악에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반대파를 몰아내고 허황, 채무택 등과 결탁하여 
    권세를 부렸으며 뜻에 맞지않은 사람은 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문정왕후를 몰아내려고 음모를 꾸미다 
    문정왕후의 숙부 윤안임의 밀고로 발각되어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이때 허황, 채무택 등도 함께 처형되었는데 이들 셋을 정유삼흥이라 했다. 
    이렇게 하여 김안로가 실각하자 정권 쟁탈전은 권신에서 척신으로 넘어갔다. 
    즉 김안로에 의해 정계에서 쫓겨난 문정왕후 측의 세력인 윤원로․윤원형 형제는, 
    김안로가 실각한 뒤 다시 등용되어 점차 정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정국은 윤여필의 딸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와 윤지임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의 
    외척간의 권력투쟁으로 양상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들 척신들의 세력다툼은 먼저 세자 책봉 과정에서 발생했다. 
    장경왕후에게 원자 호가, 문정왕후에게는 경원대군 환이 각각 탄생하자, 
    김안로의 실각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득세한 윤원로,윤원형 형제는 경원대군으로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여, 세자의 외척인 윤임 일파와의 사이에 대립과 알력을 빚게 되었다. 
    그러나 세자의 외숙 윤임이 이를 저지해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고 여기서부터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신들 또한 각각 대윤파와 소윤파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이 두 세력의 다툼은 날로 심해져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인종 즉위 뒤 정계는 대윤이 득세하였으나 소윤측은 대윤측에 의해 큰 정치적 박해는 
    받지 않았다. 그런데 윤임의 주변세력은 대개 유관․이언적 등의 사림파가 
    많았던 관계로  인종 재위시에 다시 사림파가 고개를 들기 시작, 그리하여 사림의 
    명사들이 인종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고, 이조판서 유인숙에 의해 그 파의 사류가 
    많이 등용되어, 기묘사화 이후 은퇴한 사림들이 다시 정권에 참여하였다. 
    또한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일부 사림들은 소윤인 윤원형 일파에 가담함으로써, 
    사림들도 대윤․소윤의 양 세력으로 갈라졌다. 이 동안 소윤의 공조참판 윤원형이 
    대윤의 대사헌 송인수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계자를 박탈당하고 윤원로 역시 파직된 
    사건이 생겨, 문정대비,소윤측의 대윤측에 대한 불만과 함께 문정대비의 인종에 대한 
    불만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던 중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세상을 떴으며 뒤를 이어 이복 동생인 어린 경원대군이 
    명종이 되자, 문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에 정국의 형세는 역전되어, 
    조정의 실권은 대윤으로부터 명종의 외척인 소윤으로 넘어갔다. 
    명종 즉위 직후 군기시첨정으로 재등용된 윤원로는, 윤임 일파의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그들이 경원대군을 해치려 하였다고 무고하였으나, 영의정 윤인경과 좌의정 유관이, 
    망언을 하고 천친을 이간한다고 탄핵함으로써 오히려 파직, 해남에 유배되었다. 
    이에 대하여 소윤은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훈구대신들과 결탁하여 반격을 개시하는데 
    처음에는 양사를 통해 이들을 탄핵하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시도하였으나 양사에 포진되어 
    있던 집의 송희규, 사간 박광우 등을 비롯한 사림파 계열의 완강한 반대로 그것이 
    여의치않자 문정왕후의 밀지를 통한 비정상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한편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성종의 3남)을 옹립하려 하였는데, 유관·유인숙 등이 이에 동조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는 예조참의로 재등용된 윤원형은 대윤 일파와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중추부지사 정순붕,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 공조판서 허자 등 
    심복으로 하여,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중종의 8남)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무고에 따라 중신들이 충순당에 모여 그들의 치죄를 논의한 결과 유배나 
    파직 등의 형량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죄목의 모호함과 내지를 승정원에 
    보내지 않은 절차상의 하자로 사림들의 강력한 반대를 야기시켰다. 양사에서도 
    집의 송희규, 사간 박광우 등이 중심이 되어 이 점을 논박하였는데 특히 백인걸은 
    강경한 언론을 구사하며 그 부당성을 통박하였다. 
    이에 자극된 척신세력은 정순봉이 “종사를 경복하려 했다"는 구체적인 죄명을 언급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이들에 대한 처벌이 가중되었고 이 여파는 이들과 관련된 사림파 
    인사로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권발은 유관·유인숙의 억울함을 
    극력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고, 정순봉은 이에 맞서 권발을 호역으로 몰면서 더 엄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에 중신들은 다시 의논하여 윤임 등 3인은 강경론자들의 주장에 따라 
    사사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윤임·유관·유인숙 등은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계림군도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경기감사 김명윤의 밀고로 주살되었다. 
    그 외 윤임의 사위인 이덕응의 무고로 이휘,나숙,나식,정희등,박광우,곽순,이중열,이문건 등 
    10여 명이 화를 입어 사형 또는 유배되었으며, 무고한 이덕응도 사형되었다.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이다. 
    그러나 윤원형은 이 사건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나머지 사림세력과 윤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양재역 벽서사건'을 기화로 다시 정미사화를 일으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먼저 을사사화 주동세력인 소윤세력과 훈구 대신은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공신책봉에 나선다. 이에 이기․윤원형 등은 성종대의 예에 따라 공신책록을 서둘러 
    이기․정순봉 등 처음 윤임 등의 일을 주도적으로 참여한 자들을 위사공신 1등에, 
    그리고 충순당에 참여한 중신들은 거의 모두 2․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공신책록이 진행되는 것과 더불어 소윤은 또 다른 음모를 꾸몄다. 
    위사공신은 책록 초기부터 그 구성의 다양성으로 인해 공고성이 약했기 때문에 
    그리고 1등인 임백령과 정순봉 등이 초기에 죽는 바람에 강력한 세력화를 이루지는 
    못하고 있었다. 특히 민제인,이언적,신광모,송인수 등 사림계 인사가 단순히 충순당의 
    의논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공신에 임명됨으로써 공신 주도의 정국운영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공신세력들은 정국을 계속 주도하기 위해 다양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반대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는 강경책으로 나아갔는데 이런 과정 속에서 일어난 것이 
    바로 양재역 벽서사건이다. 
    명종 2년 9월 18일, 당시의 부제학 정언각은 과천 양재역 부근을 지나다가 우연히 
    벽에 붙은 붉은 글씨로 된 문서 한 장을 발견하게 된다.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를 농락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 벽서는 바로 문정왕후에게 올려졌고 
    이 일을 전해들은 문정왕후는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이에 이기․정명순 등이 이러한 
    사론은 을사옥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는 증좌라고 간언하였다. 문정왕후는 을사년의 
    죄인들과 같은 세력들일 것이니 그 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색출해 잡아들이라는 
    서릿발같은 분부를 내린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익명서 한 장이 일으킨 이 벽서 사건의 
    파장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익명으로 쓰여진 벽보에 불과한 그다지 대단치않은 일을 
    소윤 일파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고의로 확대시킨 사건인데 그 잔당으로 지목된 
    중종의 아들인 봉선군 등 3명이 목숨을 잃고 이언적․노수신 등 20여 명이 
    귀양을 가는 대규모 옥사로 발전하였다. 이언적은 선왕인 중종의 사부를 지낸 바 있으며 
    당시 사림의 대부격인 인물로 수렴청정을 올바로 시행하고 외척의 정치개입을 
    막아야 한다는 건의를 한 바 있는 척신들에게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이듬해 홍문관박사 안명세가 을사사화 전후의 시정기에 윤임을 찬양하였다 하여 
    사형되는 등, 을사사화 이래 수 년 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반대파 명사들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 
    이렇게 하여 1498년(연산군 4) 이후 약 50년간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대옥사는 을사사화로서 마지막이 되었으나, 4대 사화는 1575년(선조 8)에 이르러 
    당쟁이 일어나기 전의 선비들에 대한 옥사였다. 
    그러나 사화는 소수인의 음모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고, 
    파당을 가진 다수인의 공공연한 논쟁이 따르는 대립과 투쟁에서 
    패자는 반역자로 몰려 지위를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고, 
    한 파가 승리하면 이에 대하여 새로운 반대파가 또 생겨 
    그것이 또 다른 사화를 야기시켰다. 
    이러는 동안 정치의 기강은 더욱 문란해지고, 뜻있는 선비들은 
    관직을 버리고 당․서원 등을 세워 유생들의 집합 또는 
    강학의 장소로 삼는 동시에, 그들 일족의 자녀교육을 하고 
    이를 통하여 동족적인 당파의 결합을 굳게 하였다. 
    그리고 결국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세력에 의해 붕당은 형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