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완판 105장본) - 3
처음에 양생이 들어갈 때는 춘삼월이어서 화초가 만발하였는데 나올 때에는 국화가 만발하였기에 이상하게 여겨 행인에게 물으니 추팔월이었다. 어찌 도사와 하룻밤 잔 것이 이토록 오래인가, 헛된 것이 세상이로다. 양생이 나귀를 재촉하여 몰아 진어사 집을 찾아오니 양류는 간 데 없고 집이 다 쑥밭이 되어 있었다. 생이 속절없이 빈 터에 서서 소저의 <양류사>를 읊으며 소식을 묻고자 하였지만, 인적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객점으로 가 물어 말하였다.
“저 진어사 가솔(家率)이 어디로 갔는가?”
주인이 탄식하여 말하였다.
“상공이 듣지 못하셨군요? 진어사는 역적에 참여하여 죽고 그 소저는 서울로 잡혀갔는데, 혹 죽었다 하고, 혹 궁중 노비가 되었다 하니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양생이 이 말을 듣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말하였다.
“남전산 도사가 진씨 혼사는 어두운 밤 같다 하더니, 진소저는 분명히 죽었구나.”
하고, 즉시 행장을 꾸려 출발해 수주로 향하였다.
이때 유씨가 생을 보낸 후에 경성이 어지러움을 듣고 주야로 염려하더니 문득 생을 보고 내달아 붙들고 울며 죽었던 사람을 다시 본 듯하였다.
“작년 황성에 가 난리 중에 위태로운 지경을 면하고 살아와 모자가 다시 상면하기도 천행이요, 또 네 나이가 어리니 공명은 바쁘지 아니하나 내 너를 만류치 아니함은 이 땅이 좁고 또 궁벽하기 때문이다. 네 나이 십륙 세니 배필을 구할 것이지만 가문과 재주와 얼굴이 너와 같은 사람이 없구나. 경성 춘명문 밖에 자청관(紫淸觀)의 두련사(杜鍊師)라 하는 사람은 나의 외사촌 형제다. 지혜가 넉넉하고 기개와 도량이 평범치 않아 모든 명문귀족을 다 알고 있다. 내가 편지를 부치면 바드시 너를 위하여 어진 배필을 구해 줄 것이다.”
하고, 편지를 주거늘 생이 행장을 차려 하직하고 떠났다.
낙양 땅에 이르니 낙양은 천자가 머무는 수도(首都)이다. 번화한 풍경을 구경코자 하여 천진교(天津橋)에 이르니 낙숫물은 동정호를 지나 천리 밖으로 흐르고, 다리는 황룡이 굽이를 편 듯한데 다리 가에 한 누각이 있으니 단청은 찬란하고 난간은 층층하였다. 금안장을 한 좋은 말들은 좌우에 매어 있고 누각의 비단 장막은 은은한 가운데 온갖 풍류 소리가 들리거늘 생이 누각 아래에 다달아 물어 말하였다.
“이 어떠한 잔치인가?”
다 이르되,
“모든 선비가 일대 이름난 기생을 데리고 잔치합니다.”
양생이 이 말을 듣고 취흥을 이기지 못하고 말에서 내려 누각 위에 올라가니, 모든 선비가 미인 수십 사람을 데리고 서로 좋은 자리 위에 앉아 떠들썩하며 담소가 단란하다가 양생의 거동과 풍채가 깨끗함을 보고 다 일어나 읍하여 맞아 앉았다. 성명을 통한 후에 노생이라 하는 선비가 물어 말하였다.
“내 양형의 행색을 보니 분명 과거를 보러 가십니까?”
생이 말하였다.
“과연 재주는 없지만 굿이나 보러 가거니와 오늘 잔치는 한갓 술만 먹고 노는 일이 아니라 문장을 다투는 뜻이 있는 듯합니다. 소제(小弟)와 같은 사람은 먼 지방 미천한 사람으로 나이가 어리고 견식이 심히 천하고 비루하니 용렬한 재주로 여려 공의 잔치에 참여함이 극히 외람됩니다.”
모든 선비가 양생이 나이가 젊고 언어가 겸손함을 보고 오히려 쉽게 여겨 말하였다.
“과연 그러하지만 양형은 후에 왔으니 글을 짓거나 말거나 하고 술이나 먹고 가시오.”
하고, 이어서 잔 돌리기를 재촉하고 온갖 풍류를 일시에 울리게 하였다.
생이 눈을 들어보니 모든 창기는 각각 풍악을 가지고 즐겼지만, 한 미인이 홀로 풍류도 아니하고 말도 아니 하며 앉았는데 아름다운 얼굴과 얌전한 태도가 정말로 국색(國色)이었다. 한번 보자 정신이 황홀하여 정처가 없고, 그 미인도 자주 추파를 들어 정을 보내는 듯하였다.
생이 또 바라보니 그 미인의 앞 흰 옥으로 된 책상에 글 지은 종이가 여러 장 있거늘, 생이 여러 선비를 향하여 읍하고 말하였다.
“저 글이 다 모든 형들의 글입니까? 주옥 같은 글을 구경함이 어떠합니까?”
여러 선비가 미처 대답하지 못 할 때, 그 미인이 급히 일어나 그 글을 받들어 양생 앞에 놓거늘, 양생이 차례로 보니 그 글이 놀라운 글귀가 없고 평범하였다. 생이 속으로 말하였다.
“낙양은 인재가 많다 하더니 이것으로 보면 헛된 말이로다.”
그 글을 미인에게 주고 여러 선비께 읍(揖)하여 말하였다.
“궁벽한 벽지의 미천한 선비가 상국의 문장을 구경하니 어찌 즐겁지 아니 하겠습니까?”
이때 여러 선비가 술이 다 취하여서 웃으며 말하였다.
“양형은 다만 글만 좋은 줄 알고 더욱 좋은 일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는 구려.”
양생이 말하였다.
“소제가 모든 형의 사랑함을 입어 함께 취하였는데 더욱 좋은 일을 어찌 말하지 아니하십니까?”
왕생이라 하는 선비가 웃으며 말하였다.
“냑양은 예부터 인재의 고장이오, 이번 과거의 방목(榜目) 차례를 정하고자 하는데, 저 미인의 성은 계요, 이름은 섬월이오, 한갓 얼굴 아름답고 가무 출중한 뿐 아니라 글을 알아보는 슬기 또한 신통하여 한번 보면 과거의 합격과 낙제를 정하기에, 우리도 글을 지어 계랑과 오늘밤 연분을 정하고자 하니 어찌 더욱 좋은 일이 아니겠소, 양형 또한 남자라 좋은 흥이 있거든 우리와 함께 글을 지어 우열을 다툼이 어떠하오?”
생이 말하였다.
“여러 형들의 글은 지은 지 오래니 누구의 글을 취하여 읊었습니까?”
왕생이 말하였다.
“아직 불만족해 하고 붉은 입술과 흰 이를 열어 양춘곡조(陽春曲調)를 아뢰지 아니하니 분명히 부끄러운 마음이 있어 그러한가 하오.”
양생이 말하였다.
“소제는 글도 잘 못하거니와 하물며 국외인(局外人)이라 여러 형과 재주를 다투는 것이 미안 합니다.”
왕생이 크게 말하였다.
“양형의 얼굴이 계집 같지만, 어찌 장부의 기품이 아니오. 다만 양형이 글 지을 재주가 없다면 할 수 없겠지만 재주가 있다면 어찌 사양하려 하시오.”
생이 처음 계랑을 본 후에 시를 지어 뜻을 시험코자 하였지만, 여러 선비가 시기할까 주저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 즉시 종이와 붓을 들어 거침없는 필체로 순식간에 세 장의 시를 쓰니, 바람 돗대가 바다에서 달리는 것 같고 목마른 말이 물에 닿은 것 같았다. 여러 선비들이 시 글귀가 민첩하고 필법(筆法)이 매우 생생함을 보고 크게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양생이 여러 선비를 향해 읖하여 말하였다.
“이 글을 먼저 여러 선비께 드려야 마땅하나, 오늘 좌중의 시관(試官)은 곧 계랑입니다. 글 바칠 시각이 미치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즉시 시 쓴 종이를 계랑에게 주니 계랑이 샛별 같은 눈을 뜨며 옥 같은 소리로 높이 읊자, 그 소리는 외로운 학이 구름 속에 우는 듯, 짝 잃은 봉황이 달밤에 우지지는 듯하여 진나라의 쟁과 조나라의 거문고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초객(楚客)이 서유로입진(西遊路入秦)하니
주루래취낙양춘(酒樓來醉洛陽春)을.
월중단계(月中丹桂)를 수선절(誰先折)고?
금대문장(今代文章)이 자유인(自由人)을.
뜻은 다음과 같다.
초나라 손이 서쪽에서 놀다가 길이 진나라에 드니,
술집에 와 낙양춘 술에 취하였도다.
달 가운데 붉은 계수나무를 누가 먼저 꺽을고,
오늘날 문장이 스스로 사람이 있도다.
여러 선비가 처음에 양형을 쉽게 여겨 글을 지으라 하다가 양형의 글이 섬월의 눈에 든 것을 보고 낙담하여 계랑을 돌아보며 아무 말도 못하였다. 양생이 그 기색을 보고 갑자기 일어나 여러 선비에게 하직하고 말하였다.
“소제가 여러 형의 가엾게 여겨 돌보심을 입어 술이 취하니 감사하거니와 갈 길이 멀어 종일 담화치 못하겠습니다. 훗날 곡강연(曲江宴)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하고 내려가니 여러 선비가 만류지 아니하였다.
생이 누각에서 내려가자 계랑이 바삐 내려와 생에게 말하였다.
“이 길로 가시다가 길 가 분칠한 담장 밖에 앵두화가 성한 곳이 바로 첩의 집입니다. 원컨대 상공께서 먼저 가시어 첩을 기다리십시오, 첩 또한 곧 따라 가겠습니다.”
생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고 갔다.
섬월이 누각에 놀라가 여러 선비께 고하여 말하였다.
“모든 상공이 첩을 더럽게 아니 여기시어 한 곡조 노래로 연분을 정하셨으니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여러 선비가 말하였다.
“양생은 객이라서 우리와 약속한 사람이 아니니 어찌 거리낄 것 있겠는가?”
섬월이 말하였다.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어찌 옳다 하겠습니까? 첩이 병이 있어 먼저 가오니, 원컨대 상공들은 종일토록 즐기십시오.”
하고, 하직하고 천천히 걸어 누각에서 내려가니 여러 선비가 앙심을 품었지만 처음에 이미 언약이 있었고, 또 그 냉소하는 기색을 보고 감히 한 말도 못하였다.
이 때 생이 객점에 머물다가 날이 저물어 섬월의 집을 찾아가니 섬월이 이미 먼저 와 있었다. 중당을 쓸고 촛불을 켜고 기다리는데, 생이 앵두화 나무에 나귀를 매고 문을 두드리며 불러 말하였다.
“계랑은 있느냐?”
섬월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신을 벗고 내달아 손을 이끌어 말하였다.
“상공께서 먼저 가셨는데 어찌 이제야 오십니까?”
생이 웃으며 말하였다.
“주인이 손을 기다려야 옳으냐, 손이 주인을 기다려야 옳으냐?”
서로 이끌고 중당에 들어가 옥 술잔에 술을 부어 취토록 권한 후에 원앙금침을 한 가지로 하니 초양대(楚陽臺)에서 무산(巫山) 신녀(神女)를 만난듯, 낙포(洛蒲) 왕모(王母) 선녀(仙女)를 만난 듯 그 즐거움을 어이 다 기록 하겠는가.
이럭저럭 밤이 깊었다. 섬월이 눈물을 머금고 탄식하여 말하였다.
“첩의 몸을 이미 상공께 의탁하였으니 첩의 사정을 잠깐 생각하십시오. 첩은 조 땅 사람입니다. 첩의 부친이 이 고을 태수가 되었는데 불행하여 세상을 버리신 후에 가세가 몰락하고 고향이 멀어서 천리 밖에 반장(返葬) 할 길이 없어, 첩의 계모가 첩을 백금을 받고 창가(娼家)에 팔아 장례를 치르니 첩이 차마 거스르지 못하여 슬픔을 머금고 몸을 굽혀 이제까지 부지하였는데, 천행을 입어 낭군을 만나니 해와 달이 다시 밝은 듯합니다. 원컨대 낭군께서 첩을 비루하게 생각지 아니 하신다면 물 긷는 종이나 될까 합니다.”
양생이 말하였다.
“나는 본디 가난하여 처첩을 둠이 어려우니 자당께 말씀드려 아내를 삼겠다.”
삼월이 앉아 말하였다.
“낭군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 천하의 재주를 헤아리건대 낭군께 미칠 사람이 없습니다. 이번 과거 장원은 하려니와 승상의 인끈과 장군의 절월(節鉞)이 오래지 아니하여서 낭군께 돌아올 것이니 천하 미색이 누가 아니 쫓겠습니까? 어찌 저만한 사람으로 아내 삼기를 원하십니까? 낭군은 어진 아내를 구하여 대부인을 모신 후에 첩을 버리시지나 마십시오.”
생이 말하였다.
“내 일찍이 화음 땅을 지나다가 마침 진가 여자를 보니 그 얼굴과 재주가 계랑과 비슷하였는데 불행하게 죽었으니 어디 가서 다시 어진 아내를 얻겠는가?”
섬월이 말하였다.
“그 처자는 진어사의 딸 채봉입니다. 진어사가 낙양 태수로 오셨던 때에 첩이 그 낭자와 더불어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 낭자 같은 얼굴과 재주는 과연 얻기 어렵거니와 이제는 속절없으니 생각지 마시고 다른 데 구혼하십시오.”
생이 말하였다.
“옛부터 천하 절색이 없다 하니 진낭자와 계낭자가 있는데 또 어디 가서 다시 구하겠는가?”
섬월이 웃으며 말하였다.
“낭군의 말씀이 진실로 우물안 개구리 같습니다. 우리 창가(娼家)로 말하면 절색이 셋이 있으니 강남의 만옥연이요, 하북의 적경홍이요, 낙양의 계섬월입니다. 첩은 모처럼 허황된 이름을 얻었지만 만옥연과 적경홍은 진실로 절색입니다. 어찌 천하에 절색이 없다 하겠습니까?”
생이 말하였다.
“저 두 낭자는 외람되게 계낭과 이름을 가지런히 하였구나.”
섬월이 말하였다.
“옥년은 먼 지방 사람이라 보지는 못하였지만, 경홍은 저와 아주 형제 같으니 경홍의 일생 본말을 대충 고하겠습니다. 경홍은 곧 반주 양민의 딸입니다. 일찍 부모를 잃고 그 고모께 의탁하였는데 십 세부터 아주 빼어난 미색이 하북(河北)에 이름이 자자하여 근방 사람이 천금으로 구하는 사람이 많아 매파가 구름같이 모였지만 경홍이 모두 물리치니 매파가 고모에게 물어 말하였습니다. ‘동서로 모두 물리치니 어떤 훌륭한 신랑을 구하여야 고모의 뜻에 합당하겠습니까? 대승상의 총애하는 첩이 되고자 하시는가, 아니면 절도사의 부실(副室)이 되고자 하시는가, 이름난 선비에게 허락코자 하시는가, 뛰어난 재주를 가진 선비에게 보내고자 하시는가?’ 경홍이 크게 노하여 대답하여 말하였습니다. ‘진나라 때 동산(東山)에서 기생들을 모아들이던 사안석(謝安石)이 있으면 가히 대승상의 첩이 될것이요, 삼국 때 사람들에게 곡조 가르치던 주공근(周公瑾)이 있으면 가히 절도사의 첩이 될것이요, 현종 조에 청평사(淸平詞)를 드리던 한림학사가 있으면 가히 이름난 선비를 좇을 것이요, 무제 때 봉황곡(鳳凰曲)을 아뢰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곧 있으면 뛰어난 재주를 가진 선비를 가히 따를 것이라.’ 하니, 모든 매파가 크게 웃고 흩어졌습니다. 경홍이 첩과 함께 상국사(上國寺)에 놀러가 첩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진실로 뜻하던 군자를 만나거든 서로 천거하여 함께 한 사람을 섬겨 백년을 해로하자.’고 하여, 첩이 또한 허락하였는데 첩이 낭군을 만남에 문득 경홍을 생각하지만 경홍이 산동 제후의 궁중에 있으니 이는 분명히 호사다마(好事多魔)입니다. 왕후(王侯)의 희첩(姬妾)이 부귀가 극진하나 이것은 경홍의 소원이 아닙니다.”
이어서 탄식하여 말하였다.
“어찌 한번 경홍을 보고 이 정회를 풀겠습니까?”
양생이 말하였다.
“창가에 비록 재색이 많으나 사대부 집의 규수는 보지 못하니 어찌 알겠는가?”
섬월이 말하였다.
“내 눈으로 보건대 진낭자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장안 사람이 다 정사도의 여자가 요조한 얼굴과 유한한 덕행이 당세에 으뜸이라 하니 첩이 비록 보지는 못하였으나, ‘이름이 높으면 실속 없는 빈 명예가 없다.’ 하니, 원컨대 낭군은 경성에 가셔서 두루 방문 하십시오.”
이때 닭이 울어 날이 샛다.
섬월이 말하였다.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니 상공은 가십시오, 이후에 모실 날이 있을 것이니 아녀자를 위하여 떠나는 것을 슬퍼 마십시오. 하물며 어제 여러 공자들의 앙심 품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생이 오히려 눈물을 뿌리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