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누가 왕을 죽였는가 7. 제22대 정조(1) 늘푸른 봄날처럼 2019. 3. 30. 13:26 ■ 제22대 정조 ■ 개혁군주의 좌절 경종시대부터 조선의 당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전의 당쟁은 신하들 사이의 투쟁이었을 뿐 적어도 임금 자체를 적으로 삼지는 않았다. 임금은 신하들 사이의 분쟁에서 최종적인 판결자였다. 그러나 경종때부터 신하들은 임금에게 당적을 붙이고 당이 틀릴 경우 적으로 돌렸다. 임금도 당색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경종이 소론 군주였다면 영조는 노론 군주였다. 그리고 그런 영조 밑에서 반노론의 기치를 들었던 사도세자는 부왕 영조와 노론에 의해 비참하게 뒤주 속에서 죽어갔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그가 영조의 외아들이란 점에서 극대화된다. 만약 영조에게 다른 아들이 있었다면 그가 영조의 후사를 이으면 되었다. 그러나 영조의 핏줄은 사도세자가 낳은 네 아들밖에 없었고, 따라서 아버지가 비참하게 뒤주 속에서 죽는 것을 목격한 아들이 즉위할 수 밖에 없었다. 사도세자의 네 아들중 세손인 산(정조)만이 세자빈 혜경궁 홍씨 소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세자의 후궁인 양제가 낳은 아들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는 세손을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세손을 법적으로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로 만듦으로써 세손의 지위를 보장해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노론 강경파의 생각은 달랐다. 노론 강경파는 세자의 아들이 보위에 오르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또한 불가피하게 사도세자의 아들이 보위에 오른다 해도 그 대상이 세손일 수는 없었다. 사도세자가 죽을 때 영조에게 살려달라고 울면서 호소했던 그 비참한 유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을 세손이 즉위한다면, 세자를 죽음으로 몬 노론 강경파에게 어떤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반드시 삼종의 혈맥을 이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즉위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세손이 아니라 양제 박씨의 아들인 은전군이어야 했다. 나인 시절 방애라고 불렀던 양제 박씨가 사도세자에게 죽임을 당했으므로, 그 아들 은전군은 사도세자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을 한 노론 강경파는 세손 제거에 나섰다. 사도세자가 죽었을 때 세손의 나이 겨우 열한 살이었다. 10년 이상 대리청정한 스물 여덟 살의 세자를 멀쩡한 대낮에 뒤주에 가두어 죽였던 노론의 공세를 겨우 열한 살의 세손이 막기는 쉽지는 않았다. 만약 세손의 처리를 놓고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집안이 분열되지 않았다면 세손은 즉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자의 장인이자 세손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은 세자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는 이처럼 장인이 사위를 죽음으로 몰 만큼 당론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3개월 후 사헌부 집의 박치륭은 홍봉한이 세자를 죽음으로 몬 장본인이라고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영조는 이 상소에 분노해 박치륭을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귀양 보냈다. 이때 박치륭의 공격에 반박하여 올린 홍봉한의 상소는, 사도세자 비극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과 세손에 대한 그의 속생각을 잘 말해준다. "기사년의 여당과 무신년의 여당(소론 강경파)들이 훗날 '생부를 위한다'는 말로 (세손을)부추긴다면 그 추세를 막기 어려울 것이고 그 말에 마음이 쏠려들기 쉬울 것이니, 오늘날 전하의 신하들은 일망타진당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외할아버지가 외손자가 즉위했을 경우 '일망타진'당할 것을 걱정하는 이 상소는, 당시의 비정상적인 왕조국가 체제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런 홍봉한이 세손의 즉위를 반대했을 것은 불문가지다. 홍봉한이 동생 홍인한도 마찬가지였다. ■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가 부친과 숙부의 이런 정치관을 극력 반대하고 나섬에 따라 정치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아들인 세손이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혜경궁 홍씨 덕분에 정승의 지위에 오른 홍봉한은 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세손의 처지에서 볼 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혜경궁 홍씨의 반대로 홍씨 가문이 분열되었고, 홍씨 형제의 분열은 곧 노론의 분열이었기 때문이다. 홍봉한은 세손에 대해 표면상 침묵했으나 동생 홍인한은 적극적으로 세손의 즉위를 반대하고 나섰다. 홍인한의 세손 제거 방침은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는 논리에 집약되어 있다. 재위 51년(1775) 11월 영조는 시,원임대신을 불러모았다. 세손에게 대리청정 시킬 것을 결심한 후 대신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였다. "신기가 피곤하니 공사를 펼치기가 어렵다. 내가 국사를 생각하느라 밤에 잠을 설친 지가 오래 되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 소론, 남인, 소북을 알겠는가? 국사와 조사를 알겠는가?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지 알겠는가? 나는 세손에게 '전서'하고자 하나 어린 세손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우므로 대신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뜻이었다. 당시 영조는 82세의 고령이었으므로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었다. 국왕이 사망하면 대리청정하던 세자나 세손이 즉위하는 것이 조선의 국법이었으니, 만일 세손이 대리청정하고 있을 때 영조가 급서한다면 노론은 그의 즉위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대리청정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하교로 세손을 폐위시키고 은전군이나 다른 종친을 즉위시킬 수도 있었다. 15세의 나이로 66세의 영조와 혼인한 정순왕후는 노론 김한구의 딸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으니 당연히 세손의 즉위를 반대했다. 노론으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아야 했다. 이때 좌의정 홍인한이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며 내세운 논리가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누가 할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국사나 조사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세손은 정사를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때 세손의 나이 스물네 살, 숙종이 즉위할 당시보다 무려 아홉 살이나 많은 나이였으니, 홍인한의 이 말은 곧 세손을 제거하겠다는 노골적인 선포나 다름없었다. 만일 영조와 세손이 적대적인 관계였다면 이때 세손은 제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손은 현명했다. 그는 절대로 영조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았고 영조는 이런 세손을 흡족하게 여겼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후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담은 <금등비서>를 작성했다. 금등이란 쇠줄로 단단히 봉하여 비서를 넣어두는 상자를 말하는데, 이는 주공이 무왕의 병을 낫게 해주고 대신 자신을 데려가라고 하늘에 빌었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신하가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즉 신하인 사도세자 사건에 대한 일종의 후회인 셈이다. 이 후회가, 영조에 대한 세손의 효도와 맞물리면서 영조와 세손의 대립을 막아주었다. 영조는 시종일관 세손을 옹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