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조선의 뒷마당 8. 술문화와 금주령- (3) 늘푸른 봄날처럼 2019. 3. 27. 23:31 ■ 숙종 때 술집 처음 등장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술집은 조선 후기가 되어서야 출현했다. 하지만 술집에 관한 기록은 이때도 드물다. 술과 술집이란 그때도 일상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상화된 것은 쉽게 감지되지 않는다. 기록에 남길 만큼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특히 술집에 관한 자료를 찾기 어려운 결정적인 이유가 아닌가 한다. 일단 이 점을 감안해두자. 술집이라는 단어는 ‘숙종실록’ 22년 7월24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업동의 사건에 이 단어가 나온다. “방찬이 또 응선을 꾀어 술집에 가게 하여 취한 틈을 타서 방찬이 그 호패를 잘라서 주고 이홍발에게 갖다 주게 하였는데, 제가 그 말대로 전하여 주었습니다.” 업동의 사건은 매우 복잡한 것이나 여기서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 자료에선 구체적으로 술집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없다. 단지 술집이란 것이 숙종 22년에 존재했던 것만 확인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실록’ 4년 6월18일조 형조판서 서명균(徐命均)의 상소는 퍽 중요하다. “듣건대, 근래 도민(都民)의 살길이 점점 어려워져서 술을 팔아 생업으로 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지고 그 가운데에서 많이 빚은 자는 혹 100곡(斛)이 넘기도 하였으나, 시가가 뛰어올라 폭력을 휘두르고 살상까지 한다 합니다. 차츰 금지하려고 신칙(申飭·단단히 타일러 경계하는 것)하는 뜻으로 오부(五部)에서 감결(甘結·상급 관아에서 하급 관아로 보내던 공문)을 받았는데, 나라의 풍속이 두려워하고 와전되어 금란(禁亂)을 가탁하여 속이고 협박하며 뇌물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가탁하는 자 두어 사람을 잡았더니, 바로 사헌부에서 내쫓긴 하인과 포도청(捕盜廳)에서 물러난 군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뒤부터 술집에서 내기 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그쳤는데 쌀가게에서 부르는 값은 갑자기 더하므로, 바야흐로 들어가 아뢰어 먼저 술 많이 빚는 자를 금하고 이어서 옛 제도를 더욱 밝히기를 청하려 하는데 승선(承宣)이 문득 폐단을 끼친다고 말하니, 폐단을 고치려다가 도리어 백성에게 폐해를 가져온다는 뜻일 것입니다.” 술집이 늘어나고 있음이 확인된다. 특히 ‘술집에서 내기 술을 마시는 일’이란 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병술집이 아닌 주점을 뜻한다. 시정에 주점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2년 전 영조는 붕당(朋黨), 사치와 함께 음주의 폐해를 신하들에게 간곡하게 언급하면서,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하고 훗날의 대사령 때에도 용서하지 말라고 명했다. 실록 자료에 따르면, 영조의 명으로 술집에 대한 단속이 철저하게 진행됐다. ‘영조실록’ 4년 9월16일 사간 강필경(姜必慶)의 말에 따르면 술집의 영업행위는 단속으로 일시에 거의 종식된 듯했다. “주금(酒禁)을 신칙(申飭)한 뒤로 술집으로 이름난 것은 모두 술 빚는 일을 끊었습니다.” 흥미로운 단속 사례도 있었다. “송교(松橋) 근처 큰 술집 하나가 있는데 내자시(內資寺)에서 도장을 찍은 첩자(帖子)를 높이 걸고 어공(御供)하는 술이라 청하여 법부(法府)에서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뜻대로 매매하여 꺼리는 것이 없으니, 내자시의 해당 관원을 먼저 파직하고 서원(書員)은 유사(攸司)를 시켜 가두고 처벌하소서.” 내자시는 대궐에 필요한 식료품 자재를 공급하는 관청이다. 송교의 큰 술집이 내자시와 결탁하여 어공(御供), 즉 임금에게 바친다고 속여 술을 빚어 팔면서 한성부·형조·사헌부 등 사법권이 있는 관청의 단속을 피해왔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힘있는 행정기관과 결탁하고 ‘청와대’를 사칭하여 법망을 피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내자시의 관원과 서원(書員, 書吏)들은 당연히 처벌되었다. 이후 영조는 금주령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 과잉단속·함정단속 대략 17세기 말쯤 시정에 나타난 술집은 영조의 가혹한 금주령으로 거의 사라졌다. 금주령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늘 그래왔듯이 일시적인 것이었다. 흉년이 들면 금주령을 발동했다가 식량 사정이 좋아지면, 다시 금주령을 푸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영조는 달랐다. 그는 그의 치세 기간 내내 강력한 금주 정책을 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려 했다. 국가의 제사인 종묘 제례에도 술을 쓰지 않았다. 민가에서도 제사에 술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물론이다. 영조는 1724년 8월부터 1776년 3월까지 53년간 재위하여 조선조 왕 중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길다. 금주단속이 무려 반세기 동안 실효성 있게 시행됐다는 의미다. 애주가들에게 영조 치세기는 세계사에서도 흔치 않은 탄압기였다. 영조의 강력한 금주령으로 인해 많은 소동이 벌어졌다. 첫째 과잉단속. 다음은 영조 9년 장령 안경운(安慶運)의 상소 내용이다. 포도종사관(捕盜從事官) 김성팔(金聲八)은 밤에 술집에 갔다. 그는 술집에 관한 정보를 듣고 단속하러 갔던 것으로 보인다. 김성팔은 욕설을 퍼부으며 술집 주인을 심하게 구타했고 다음날 포도대장에게 보고하였다. 술집 주인은 포도청 감옥에 갇혀 ‘절도범을 치죄할 때 사용되는 형’을 받은 뒤 죽었다. 일흔 살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죽었다. 아흔 살의 조모 역시 상심, 비통해하다가 죽었다. 3대가 한꺼번에 죽은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성팔은 사형에 처해졌고 포도대장은 파직됐다. 이는 술집에 대한 과잉 단속으로 인해 발생한 대표적 사고였다(‘영조실록’ 9년 4월13일). 단속반의 비리도 잇따랐다. 영조 28년 우의정 김상로(金尙魯)는 금주령 이후의 폐단을 말한다. 금주령 이후 술집에 대한 단속 권한이 있는 형조와 한성부의 이속(吏屬)들이 ‘금란방(禁亂房)’이라는 술집 단속 전담반을 설치하여 은밀히 술 파는 집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뜯는다는 것이다. 김상로는 형조에 이 폐단을 개혁할 것을 요구했고 임금도 허락했지만, 단속반의 부정부패가 척결됐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영조실록’ 28년 12월20일). 함정 단속도 공공연히 행해졌다. 형조 낭관(郞官)은 몰래 사람을 술집에 보내어 술을 사서 마시게 하고 그것을 적발하여 처벌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영조는 “이것은 형(刑)에 걸리도록 유도한 것”이라면서 형조 낭관을 파직했다(‘영조실록’ 32년 1월9일). ■ 술 마시면 사형 영조의 금주령은 가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목이 달아난 공무원이 있을 정도였다. 금주령 위반죄로 참형을 당했던 윤구연(尹九淵)의 예를 보자. 영조 38년 9월5일 대사헌 남태회(南泰會)는 남병사(南兵使) 윤구연을 고발했다. “자신이 수신(帥臣)이면서도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지엄함을 염두에 두지 않고 멋대로 금주령을 범하고 술을 빚어 매일 술에 취한다는 말이 낭자합니다. 이와 같이 법을 능멸하는 무엄한 사람을 변방 장수의 중요한 자리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이러한 보고를 받은 영조는 “과연 들리는 바와 같다면 응당 일률(一律, 사형)을 시행해야 한다. 어찌 파직에 그치겠는가?”라고 말하며 윤구연을 체포해 올 것을 명했다. 윤구연이 잡혀오자 영조는 숭례문 앞에 나아가 윤구연의 목을 직접 칼로 쳤다. 영조가 이렇게 성급했던 것은 사실 확인차 보낸 선전관이 윤구연이 있던 곳에서 술 냄새가 나는 항아리를 가져와 대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술항아리의 술은 금주령 이전에 담근 것이었다(‘영조실록’ 38년 9월5일). 해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사람의 목을 벤 것은 전제군주의 횡포였다. 영의정 신만, 좌의정 홍봉한, 우의정 윤동도가 차자(箚子·상소문)를 올려 윤구연의 목숨을 구하려 하였으나, 영조는 비답을 내리지도 않고 세 정승을 파직했다. 사간원 홍문관 사헌부의 신하들도 재조사를 요청했지만, 도리어 이들까지 벼슬이 떨어졌다(‘영조실록’ 38년 9월17일). 부수찬 이재간(李在簡)은 “사형을 너무 섣불리 집행했고 또 말리는 신하들을 파직한 것이 너무하지 않느냐”는 항변성 발언을 하다가 졸지에 성환찰방 (成歡察訪)으로 좌천되었다(‘영조실록’ 38년 9월18일). 윤구연은 사실 억울한 죽임을 당했기에 이후에도 그를 신원하여 명예를 회복시켜주려는 신하들의 요청이 계속되었으나, 그것이 실현된 것은 12년 뒤인 영조 50년 2월24일이었다. 이 날 영조는 윤구연에게 직첩(職牒)을 돌려주라고 명하였으니, 12년이나 지나 명예가 회복된 것이다. 영조의 금주령은 이렇듯 잔인한 것이었다.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나 영조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계속 사형에 처해진 듯하다. 그러나 영조는 지나치다 싶었는지 이 조치만큼은 철회했다. 영조 39년 사헌부 지평 구상(具庠)은 “금주령을 범했다고 해서 사형에 처하는 것은 너무하다”고 말했다(‘영조실록’ 39년 6월23일). 영조는 이 말을 수용하여 “금주령을 범한 술의 양의 다과(多寡)로 등급을 나누어 죄를 정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였다. 공포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1년 뒤 영조는 포도청에 “양반으로서 금주령을 범하고 술을 빚은 자를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영조 때 서울 도성 안의 인구는 20만 이 채 안 되었다. 포도청은 성내를 수색하여 7명을 잡아 왔다. 영조는 “죽은 할아비에게는 (제사지낼 때) 감주를 쓰고 그 손자는 술을 마시니 명색이 사대부로서 이런 짓을 한단 말이냐”라며 엄형을 가한 뒤 서민으로 강등시켜 절도(絶島)와 육진(六鎭)에 귀양을 보냈다(‘영조실록’ 40년 4월26일). 영조는 제사에도 술 대신 감주를 쓰게 했기 때문에 “죽은 할아비에게 감주…”라고 말한 것이다. 이 사건 역시 금주령을 완화하려는 신하들의 의도를 영조가 좌절시킴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 영조는 금주령을 발동하면서 종묘의 제사에도 술을 쓰지 않고 감주를 쓸 것을 결정하여 시행하고 있었는데, 정언(正言) 구상이 종묘에 술을 쓸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영조의 가혹한 금주령을 늦추어 보자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물론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구상의 요청이 있고 난 뒤 영의정 홍봉한이 구상의 진언으로 인해 금주령이 완전히 풀린 것으로 소문이 나 술을 마구 담그고 거리에서 술을 파는 자까지 출현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리고 금주령을 더욱 강화할 것을 요청한다. 이에 영조는 격노하여 도성을 뒤져 사람을 잡아들이게 했던 것이다. 영조는 사형을 면해주기는 했으나, 금주령을 어긴 사람들의 귀양행렬은 영조시대 내내 이어졌다. 영조의 서슬 퍼런 금주령은 신하들의 어떤 진언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영조 40년 9월11일 정언 박상로(朴相老)가 금주령의 폐단을 10개 항목에 걸쳐 조리 있게 논박했으나 영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박상로만 사적(士籍)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처벌을 받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