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누가 왕을 죽였는가

6. 제20대 경종 <6>

늘푸른 봄날처럼 2019. 3. 27. 23:29



■ 제20대 경종

■ 게장, 생감, 그리고 인삼차

경종은 이렇듯 어선에 독을 넣은 사건에 관한 조사 여부로 공방이 계속되는 와중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의 병환에 실제로 독약 등의 외력이 작용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우위정 
이광좌는 내의원의 입진으로 계언을 올리면서  다시 김성 궁인에 대한 조사를  주장했다.
"독약을 쓰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데 전하를 모해한 사람이 궁중에 있는데도 조사해 
법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어찌 이런 신자가 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계집종에 불과한데 
전하께서는 무엇이 어려워 이렇게 해이하고 완만하게 하십니까?"
그러나 이때도 경종은 "그런 일이 없다"고만 대답했다.  물론 이는 대비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이런 공방이 계속되는 와중인 재위 4년 8월 2일 경종의 병이 갑자기 위급해졌다. 한열의 징후가 
심해진 것이다. 경종의 병환이 심해지자 왕세제가  전면에 나서 병구완을 총지휘했다.
약방에서 시진탕과 우황육일산, 곤담환등 약제를 올리고, 어의 이공윤이 도인승기탕을  
올렸지만 모두 효험이 없었다.  경종은 8월 6일 창경궁 환취정으로 옮겨 몸조리를 했는데, 
다음날 설사 기운이 있는 데다 한열까지 겹쳐 약방에서 시호백호탕을 지어 올리고 약방 제조가 
본원에서 숙직하였다. 그런데도 견종이 한열 때문에 수라를 거의 들지 못하자 우선 시령탕과 
육군자탕을 올렸으나 환후가 허하고 피로가 중첩되었다.
이런 와중에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8월 20일 대비전에서 게장과 생감을 보낸 것이다. 어의 이공윤은 물론이고 다른 어의들 모두가 
게장과 생감은 의가에서 꺼리는 음식이라며 올리지 말라고 권유했으나, 세제 연잉군은 
어의들의 반발을 누르고 이를 진언했다. 경종은 연잉군이 올린 게장 덕택에 입맛을 조금 되찾아 
평소보다 많은 수라를 들었다. 그러자 세제는 어의들의 반발을 부릅쓰고 다시 생감을 권했다.
바로 그날 밤부터 경종의 가슴과 배가 조이는 듯 아파왔다. 어의들은 낮의 게장과 생감이 
원인이라며 두시탕과 곽향정기산을 처방했다.그러나 복통과 설사가 더욱 심해졌고, 
약방에서는 황금탕을 지어 올렸으나 설사 증후가 그치지 않아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의원에서는 탕약을 정지하고 인삼과 좁쌀로 끓인 죽을 올렸다.
이런 혼돈 속에서 다음날 또다시 연잉군과 어의들이 경종에 대한 처방을 놓고 심하게 대립한다. 
경종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세제 연잉군이  "인삼과 부자를 급히 쓰도록 하라"는명을 내린 것이다.
이 처방에 이의 이공윤은 강하게 반발했다.
"삼다를 쓰면 안 됩니다. 제가 처방한 약을 지어하고 다시 삼다를 올리면 능히 기를 돌리지 못할것"
이란 말은 세상을 떠날 것이란 극언으로, 함부로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제 연잉군은 도리어 이공윤을 꾸짖고 나섰다.
"사람이란 본래 자기 의견을 세울  곳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이  어느때라고 
자기 의견을 내세우느라고 인삼을 못 쓰게 하는가?"
세제는 결국 어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삼과 부자를 올렸다.  조금 후 경조의 눈동자가 조금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따뜻해졌다. 그러자 세제 연잉군이 말했다.
"내가 의약의 이치는 알지 못하나 인삼이 양기를 회복시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의약의 이치'를 모르면 전문가의 말을 따라야  했다. 경종의 눈동자가 조금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진 것은 꺼져가는 촛불의 마지막 산화였을  뿐이다. 결국 경종은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새벽 3시경 환취정에서 승하하고 말았다. 재위 4년 8개월, 만 36세의 한창 나이였다.
대비가 극구 조사를 막았던 김성 궁인의 독약 사건, 대비전에서 나온 게장과 생감, 그리고 어의와 
다투어가며 올린 삼다, 이 세 가지 사건은 모두 경조의 죽음과 관련이 있었다.  대비와 연잉군이 
경종을 살리기 위행 게장과 생감, 인삼차를  올렸는지 아니면 죽이려고 올렸는지는 그들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경종의 병환을 둘러싼 대비와 연잉군의 이런 행적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당대 제일의 의사였던 이공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올린 게장과 생감,  그리고 자신의 처방과 
상극이라고 진단한 의원을 윽박질러가며 올린 인삼차는, 대비와 연잉군의 과거와 관련되어 
무수한 뒷말을 낳기에 충분한 소재들이었다.
노론과 결탁해 경종을 죽이려 한 혐의로 <임인옥안>에  이름이 올라있던 연잉군은, 처방을 가지고 
어의와 다툴 처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공윤은 강한 처방을 주로 사용해 명성을 얻은 의사였다. 
졸지에 임금을 잃은 소론이 대비와 연잉군을 의심할 것은 분명했다. 특히 소론 강경파는 경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했다.
이런 의심 속에서 세제 연잉군이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영조이다.
노론에 의해 세제로 추대된 전력이 있던 그가 소론 임금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이다, 
소론 강경파는 영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영조 4년  선왕 경종을 독살한 
역적들에 대한 복수를 외치며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이런 의혹의 소산이었다. 
또한 영조 31년 나주 벽서 사건때  신치운이 국문을 당하면서 
"나는 갑신년(경종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말한 것은 경종  독살설이 
얼마나 뿌리깊은 의혹인지를 보여준다. 신치운은 경종이 죽은  갑신년에 숙종의 
계비 정순왕후와 세제 영조가 공모해 경종을 죽이지 않았느냐고 직접 따진 것이었다. 
영조는  신치운과 그 가족을 이괄의 예에 의거해 처리할 정도로 이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신치운이 삼족이 멸문당할 것을 알면서도 영조의 면전에서 
사실상 "당신이 선왕을 죽인  것이 아니냐"고 토해낼 정도로, 
남인과 소론에선 경종 독살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경종 독살설은 나주 벽서 사건에서 끝나지 않고 나아가 조선 왕실 사상 
최대의 참변인 사도세자의 비극과도 연결된다. 
그야말로 비극이 비극을 낳고 죄가  죄를 낳은 악순환의 고리가 경종 독살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