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0대 경종
■ 목호룡의 고변
노론은 경종을 만만하게 보다가 전격적으로 당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신축환국 다음해인 1722년(임인년), 목호룡이 노론을 역모라고 몰면서 엄청난 파문이 발생했다.
목호룡은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고 고변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자객을 보내
살해하는 대급수, 궁녀에게 어선에 독약을 넣게 하는 소급수, 숙종의 유조를 위해 경종을
폐출하는 평지수를 쓰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3급수라 하는데 그 중 가장 온건한 방법인
평지수의 예를 들면, 노론이 숙종의 국상 때 상궁 지씨와 환관 장세상을 시켜
"세자(경종)을 폐위시켜 덕양군으로 삼는다."는 내용의 위조된 유조를 내리려 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평지수는 숙종 43년(정유년)숙종과 이이명 사이의 밀약인 '정유독대'의 내용을
실현하려 했던 셈이다.
이 사건에는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 이사명의 아들 이회지,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 김춘택의 종제
김용택, 정발의 손자 정인중 등 노론 4대신들의 자제들이 대부분 관련되었다. 이 사건은
정국에 엄청난 충격과 여파를 가져왔다. 노론에서는 이 사건이 소론의 정치 공작이라고 주장했고
목호룡의 출신 성분을 문제 삼기도 했다.
남인가의 천얼로서 종친 청릉군의 가노였던 목호룡은, 뛰어난 머리로 풍수를 익힌 후 지관으로
이름을 날려 세제 연잉군 사친의 장지를 정해주고, 그 대가로 속신되어, 왕실 소유의 장토를
관리하는 궁치사까지 올라 부를 축적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고변 자체가 목호룡의 완전한 창작품은 아니었다. 노론 일각에서 경종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목호룡의 고변으로 시작된 임인옥사는, 노론일부의 행동이
노론 전체의 행위로 확대된 것이었다. 목호룡이 김용택, 이천기, 이회지 등을 통해 역모를 알았다고
고변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즉 목호룡이 노론이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연잉군 사친의 장지를
정해준 인물이므로 이들이 믿고 발설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역모로 몰린 노론 명문가의 자제들은 자칫 말 한마디에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음을 알았으므로,
자백을 거부하고 고문 속에서 죽어갔다.
김용택, 이천기, 이기지, 이회지, 백망, 장세상, 홍의인, 홍철인 등 20여 명이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부인하다 죽었다. 이처럼 중요 혐의자 대부분이 장하의 귀신이 되었으나
소론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소론의 목표는 노론 명문가 자제들이 아니라 노론 4대신이었다.
대사간 이사상, 헌납 윤회, 장령 이경열 등 대간 등은 합계하여, "4흉의 자제들이 역모에 얼키설키
관련되었으니 이들을 처형"하라고 주청하고 나섰다. 노론 4대신은 궁지에 몰렸다.
심지어 노론 4대신 중 이사명의 동생 이이명은 이들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 깊숙이 관련된 김성행의 조부 김창집은 숙종 때 세자 대리청정을
종묘에 고묘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 역심이란 혐의를 받았고, 그 아들 김제겸은 목호룡을 죽이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또한 이건명은 대리청정 철회를 청한 최석항을 비판했던 일이 죄목으로
지적되었으며, 조태채는 세제 대리청정을 받아들이는 연명 차자에 서명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 중 이이명이 임금이 되려 했다는 것은 조작의 의혹이 짙지만, 이미 정권은 소론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다. 노론 4대신은 끝내 이 공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 사형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참형에서 사사로 감형되어 시체에 목이 붙어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국이었다.
목호룡의 고변, 즉 임인옥사로 인한 노론의 피해는 극심했다. 사형당한 인물이 20여 명, 국문을
받다 장살된 이가 30여 명, 그 밖에 이들의 가족이거나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교살된 이가 13명,
유배된 이가 114명이었다. 여기에 집안의 몰락을 보다못해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이었고
연좌된 인물이 173명이었다. 역모로 연좌되면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노비로 삼는데, 그 치욕을
견디지 못한 명문가의 부녀자들이 자진의 길을 택한 것이다.
장희빈 사사에서 임인옥사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은, 상대당을 소멸시켜야 할 정적으로 보게
할 정도로 노론과 소론 모두에게 뼛속 깊은 원한을 갖게 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노론은 국왕 경종에게, 소론은 세제 연잉군에게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정조 때 노론 윤구종이 경종이 묻힌 의릉 앞을 지나가다 "노론은 경종에게 신하의 의리가 없다"며
말에서 내리기를 거부한 사건은 경종에 대한 노론의 깊은 불신을 말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임인옥사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사건 판결문인 <임인옥사>에 세제 연잉군의
이름이 역적의 수괴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이다. 국문 과정에서 연잉군이 서덕수와 김만기의 손자
김복택을 통해 노론이 자신을 임금으로 선택한 사실을 통보받았다는 내용이 서덕수의 입을 통해
나옴으로써 공초에까지 기록된 것이다. 연잉군이 그 제의를 거부하지 않은 것은 곧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을 수락한 것이었다. 이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만약 경종이 보호하지 않았다면 연잉군은 사형당했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세제 연잉군의 처지는 급박해졌다. 김일경 같은 소론 강경파는 연잉군을 더 이상
세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소론 강경파는 예전에 노론이 그랬던 것처럼 연잉군을 세제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게다가 정권을 소론이 지니고 있었으니 연잉군의 처지는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 적발하여 정법하라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양자 영입 움직임에 놀란 노론은 세제 책봉을 성공시켜 이를 저지하고
대리청정까지 나갔으나 왕조국가에서 이는 무리수였다. 그 무리수가 김일경을 중심으로 한
소론 강경파의 극단적 반발을 낳았고, 그 반발은 목호룡의 고변으로까지 이어져 결국 노론 4대신이
사형당하고 말았다.
소론은 임인옥사로 노론을 몰락시켰으나 문제는 살아 남은 연잉군이었다. 정권을 잡은 소론
강경파로서는 연잉군을 세제로 놔둘 수 없었다. 훗날 연잉군이 즉위하면 자신들이 죽을 것은
불문가지였다. 더구나 연잉군은 옥사의 공초에 이름이 거론된 인물이었다. 조선의 종친 중
역안에 이름이 거론되고도 살아 남은 예는 극히 드물었다. 역모에 관련되면 혐의만으로도
죽게 마련이었으니 연잉군처럼 구체적인 증거가 드러난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임인옥안>에 역적의 수괴로 등재된 세제 연잉군의 처지는 아주 궁색해졌다. 소론 강경파는
연잉군을 폐위시키려 했고, 소론 강경파의 권유를 받아들인 선의왕후 어씨는 다시 양자를
들이려 했다. 양자를 들일 경우 연잉군은 보위는커녕 목숨조차 보존할 수 없었다.
선의왕후 어씨가 보기에 연잉군은 얼굴로는 복종하는 척하지만 뱃속으론 배신하는 두 마음을
가진 음흉한 시동생이자 경종을 몰아내려한 역적일 뿐이었다. 김일경은 박상검, 석열, 필정,
문유도 등 세자궁의 궁인들을 시켜 연잉군 제거 작전을 개시했다. 이들은 대궐 곳곳에서
연잉군을 압박했다. 심지어 대궐 안의 여우를 잡는다는 구실로 덫을 놓아 연잉군이 경종을
만나러 가는 길을 차단하기도 했다.
위기감을 느낀 연잉군은 대비 인원왕후 김씨에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으나 정권이 소론에게
있는 이상 대비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대비가 경종에게 가서 고하라고 물러서자, 연잉군은
경종에게 자신이 겪은 박해를 설명하며 도움을 청했다. 비록 이복형이긴 했지만 경종은 지상에
단 둘뿐인 숙종의 아들이자 형제였다.
그런데 연잉군의 호소를 들은 경종은 아주 뜻밖의 거조를 보인다.
경종은 박상검 등을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렸다가 돌아서자마자 이 명령을 거두어버렸다.
이는 경종의 속마음이 세제 폐위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연잉군에게 있어 세제 자리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곧 목숨을 잃는 것을 뜻했다. 왕비 어씨가 들인 양자가 즉위하면 한때 세제였던
그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세제 연잉군이 다시 환관 박상검 등을 처벌할 것을 주청하자 경종은 벌컥 화를 내며
연잉군을 꾸짖었다. <경종실록>에 "갑자기 감히 듣지 못한 하교를 내리셨다."고 기록할 정도로
심한 꾸짖음이었다. 경종은 연잉군을 버린 것이었고 따라서 연잉군의 폐위는 기정사실이었다.
두려움에 휩싸인 연잉군은 마지막 수단으로 세제궁의 궁관 김동필 등을 통해 세제 사부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소론이 노론인 연잉군을 도와줄리는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론 온건파가 연잉군의 편을 들고 나섰다. 소론 온건파인 영의정 조태구는
경종에게 박상검 등을 처벌하라고 주청했다.
"예사람은 환관을 집안의 종에 비유하였으니 박상검 등을 시험 삼아 사가의 예로 말한다면
지금의 형세는 종의 말을 듣고 형제가 화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그 집안이 흥하겠습니까,
망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 집안의 종을 아끼셔서 동궁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으십니까?"
역시 소론 온건파인 최석항도 이에 가세했다.
"선왕의 골육은 단지 전하와 동궁만이 계십니다. 이제 세제를 세워 국본이 안정되었는데
한두 환관이 감히 이간하여 동궁을 불안하게 했습니다. 종사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가
호흡 사이에 달려 있으니 빨리 국청을 설치하여 법을 바로잡으소서."
하지만 경종은 이들의 주청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한참 지난 후에야 무슨 말을 했는데
입 속에서만 중얼거렸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조태구가 다시 나섰다.
"잘 듣지 못했으니 옥음을 자세히 듣기를 원합니다."
경종이 조금 크게 말했다.
"적발하여 정법하라."
연잉군이 던진 승부수가 효과를 발휘해 폐위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소론 강경파는 여전히 연잉군을 인정하지 않았고,
기회만 생기면 언제라도 내쫓으려고 시도할 것이었다. 김일경과 소론 강경파는 여전히 강성했다.
이제 연잉군이 믿는 바는 소론 온건파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종 3년 소론 강경파인 김일경과
온곤파인 이광좌, 조태억 사이에 내홍이 발생했다. 대제학 자리를 둘러싼 싸움 때문이었다.
문형이란 별칭으로도 불리는 대제학은 당대 제일의 학자가 맡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문신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당시 후임자 추천의 임무를 맡은 전 대제학 강현이 김일경을 으뜸 후보인
수망으로 추천하자 부교리 정수기가 강현을 탄핵하고 나섰고, 이에 김일경이 이사상에게
정수기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 문제가 되어 이광좌, 조태억과도 사이가 벌어진 것이다.
정수기가 김일경이 자신을 무함한다며 상소를 올리자 김일경도 상소를 올려 대응했다.
"신은 어리석어 자신을 위한 계책은 생각하지 않고 망령되게 임금의 원수는 꼭 토죄하고
나라의 역적은 반드시 죽여 종사를 안정시킬 것을 기약했습니다. 한편 명문가에 죄를 얻을
것을 염려하지 않은 것이 오늘의 화가 생긴 원인이 되었습니다."
김일경은 이렇듯 자신이 공격당하는 원인이 역적을 강하게 토죄한 것과 명문가와 부딪친 것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사직을 청했다. 그러나 경종은 김일경의 사직을 허용하지 않았다.
김일경은 재차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했다.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위에 고립되어 계시고 국세는 아직도 위태로운 지역에
처해 있는데 흉역의 남은 무리들은 아직도 위세가 왕성합니다. 아! 4흉을 주토한 것은
모두 전하의 위단이 아닌 것이 없는데, 나라 안에서는 신이 한 것이라 하여 거실의 미움을
사고 원수처럼 여겨 덫을 만들고 함정을 파 신을 기다린 것을 하나 둘로 세기가 어렵습니다."
노론 4대신을 사형시킨 것은 경종인데 사람들이 자신을 지목한다며 사직을 청한 것이다.
그러나 경종은 이 상소에도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두 달 후인 재위 3년6월에 그를
도승지로 삼아 최측근에 두었다. 그리고 이어 유봉휘를 이조판서, 김연을 호조판서,
김일경을 형조판서로 삼고, 김일경과 같이 상소했던 이진유를 대사헌으로 삼음으로써
소론 강경파를 전진배치했다.
이런 공방이 계속되던 와중인 경종 4년4월, 김씨 성을 가진 궁인이 임금의 어선에
독을 탔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삼사에서 입대하여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자 하였으나
경종은 "원래 그런 일이 없었다"며 조사 자체를 거부했다. 임금의 어선에 독을 탄 사건은
자칫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런데 경종이 조사 자체를 거부한 이유는 대비
인원왕후 김씨가 무마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대비 김씨는 숙명공주의 며느리인 이진유이
고모를 불러 이렇게 말한다.
"김성궁인이 정말 의심스럽다면 주상께서 어찌 윤허하지 안겠는가?
나 역시 분명히 조사해내고 싶지 않으랴만 궁중에 실제 그런 인물이 없기 때문에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목호룡의 고변에서 소급수로 분류된 어선에 독을 넣은 사건은
철저히 조사해 그 진위를 가려내야만 했다. 그러나 대비는 오히려
조사 자체를 중지시키려고 했다. 대비 김씨가 이진유의 고모를 부른 것은
사건조사의 책임을 지고 있던 대사헌 이진유를 움직여 조사를 무마시키려는 의도였다.
이진유는 고모의 설명을 듣고 다시 이 논의를 주장하지 않았으나,
김일경, 신치운, 박필몽 같은 다른 소론 강경파는 사건을 계속 확대하려 하였다.
사건 3개월이 지난 경종 4년7월에는 삼사에서 재이가 발생하는 것은
김성 궁녀를 사형시키지 않는 탓이라고 주청하기도 했으나
경종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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