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조선의 뒷마당

8. 술문화와 금주령 - (1)

늘푸른 봄날처럼 2019. 3. 25. 12:30




■ 식량확보 위해 금주령 발동 

조선시대 술은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왕들은 예외없이 금주령을 시행했고 함정 단속도 이뤄졌다. 
그럼에도 개국 초부터 폭음문화가 사회에 만연하기 시작했다. 
술에 관한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저도 있다. 
변영로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과 양주동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는 
이 방면의 포복절도할 쾌저(快著), 명저가 아니던가? 
여타 문인들의 소소한 음주기(飮酒記)를 더러 읽어보았지만, 
모두 이 두 명저에 몇 걸음을 양보해야 하리라. 하지만 이 책에 불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음주에 관한 역사적 접근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술집에서 술을 마셨으며, 
또 술집은 언제 생겨난 것인가? 이 물음에는 아무도 답해 주지 않는다. 답답하다. 
술은 역사적인 사회학적 고찰을 요하는 어휘다. 한국 기업의 접대문화는 술과 분리할 수 없는 바, 
‘술상무’란 말에는 20세기 후반 한국이 경험했던 압축적 산업화·근대화가 각인되어 있다. 
또 지금 한국의 거창한 향락산업 역시 술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뿐인가. 술은 거대한 세원(稅源)이니, 곧 국가경제의 문제다. 음주 허용연령은 
청소년 문제와 연관된 사회학적 문제다. 
“여자가 술을?”이란 의문은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성차별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술단지의 밑바닥에 사회, 역사, 경제, 문화가 녹아 있다. 
조선시대의 술집과 금주령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국가 권력이 음주를 향한 욕망을 꺾어버린다면, 즉 앞으로 1년 동안, 혹은 석 달 동안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 술을 마실 경우 감옥에 가둔다면, 또한 이런 조치가 수시로 발동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조선시대엔 이런 적이 많았다. 국가는 자주 금주령을 발동하여 
개인의 음주를 금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알코올은 주로 곡물과 과일에서 얻기 때문이다. 
벌꿀이나 용설란 같은 것이 없지는 않지만 대종을 이루는 것은 역시 곡물과 과일이다. 
술은 곡물을 ‘낭비’한다. 말하자면 주 식량을 낭비하는 것이다. 술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밥은 먹지 않으면 곤란해진다. 경제체제가 전적으로 농업 위주였던 조선시대에 곡물의 안정적 확보는 
곧 정치-경제 체제의 안정과 연결되는 문제였다. 흉년이 들었을 때 곡물의 낭비는 곧 많은 사람들의 
아사를 불러온다. 그러니 곡물이 술로 낭비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전통이 이어져서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쌀로 막걸리를 담글 수 없었다. 
즉, 조선시대엔 흉년이 되는 해에 금주령이 강하게 발동되었던 것이다. 
천재지변이라든지 화재와 같은 재난, 국상 등이 있으면 전국민이 근신하는 의미에서 
금주령이 발동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에선 500년 동안 금주령이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유지됐다. 
그렇다면 조선의 정부는 어떤 방식으로 술의 유통을 통제했을까. 
‘태조실록’ 7년 5월28일조엔 전국 각도에 술을 금하는 영을 거듭 엄하게 내렸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것이 조선시대 최초의 금주령이라 여겨진다. 물론 그 구체적 내용은 미상이다. 태종 때도 
금주령이 잇따라 시행됐다. 
“금주령을 내렸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늙고 병든 사람이 약으로 먹는 것과 
시정에서 매매하는 것도 모두 엄하게 금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태종 10년 1월19일).” 
“임금이 의정부에 명하였다. ‘금주령을 먼저 세민(細民)에게 행하고, 거가(巨家)에는 행하지 아니하였다. 
또 술을 팔아서 생활의 밑천으로 삼는 자도 있으니, 공사연(公私宴)의 음주 이외는 금하지 말라’
(태종 12년 7월17일).” 
“공사의 연음(宴飮)을 금지하였다. 환영과 전송에 백성들이 탁주를 마시는 것과 술을 팔아서 
생활하는 자는 금례(禁例)에 두지 말게 하였다(태종 15년 1월25일).”  
■ 가난뱅이만 걸려드는 불공평한 법 
조선시대 금주령은 대개, 중앙정부가 명령을 내리면 각 지방 행정기관들이 이를 받아 
단속하는 방식으로 집행됐다. 금주령은 개국 초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강력하게 시행된 
법령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천편일률적이어서 금주령의 이유(보통 흉년 가뭄), 
금주 기간, 금주령의 적용대상 범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중 금주령의 적용대상 범위가 주목할 만하다. 
다음은 ‘태종실록’ 7년 8월27일조 사헌부의 말이다. 
“① 각사(各司)의 병술(甁酒)과 영접·전송,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 다탕(茶湯)을 빙자하여 
허비하는 따위의 일은 일절 금지하고, 조반(朝班)과 길거리에서 술에 취하여 
어지럽게 구는 대소 원리(大小員吏)를 또한 규찰하게 하되, 
② 다만 늙고 병들어서 약으로 먹는 것과 시정에서 술을 팔아 살아가는 가난한 자는 
이 범위에 넣지 않게 하소서.” 
①이 금주의 대상이고, ②가 제외의 대상이다. 늙고 병든 사람이 술을 약으로 마시는 경우, 
가난하여 술을 파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경우는 금주령에서 제외되었다. 
물론 금주의 범위는 늘 가변적이다. ‘세종실록’ 2년 윤1월23일의 실록 기록에 따르면, 
금주령 기간 이라도 부모 형제의 환영 전송, 혹은 늙고 병든 사람의 복약(服藥), 
또 이런 경우에 필요한 술을 매매한 사람은 처벌에서 제외되었고, 
오로지 놀기 위하여 마시는 경우, 부모 형제가 아닌 사람을 영접 전송하면서 마시는 것, 
또 이들에게 술을 판 경우는 모두 처벌 대상이었다. 
금주의 범위는 사회적 상황, 정책 담당자의 성격, 임금의 의지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예컨대 무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할 때 음주를 허락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중요한 국정 토론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세조실록’ 4년 5월10일, ‘성종’ 9년 5월29일). 음주를 허용하자는 측은 
활을 쏠 때 술의 힘을 빌려야 잘 맞는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이 경우 
음주 허용과 불가 방침이 반복됐다. 조선시대 금주령은 결론적으로 약을 먹을 때 
마시는 술과 혼인·제사 때 마시는 술은 대체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성종실록’ 14년 3월6일). 
금주령은 강력했지만 실제 단속에 걸려드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뿐이었다. 
‘청주(淸酒)’를 마신 자는 걸려들지 않고, ‘탁주’를 마신 자는 걸려들어 
처벌을 받는다 했으니 (‘세종실록’ 2년 윤1월23일), 
요즘으로 치자면 양주를 마신 사람은 괜찮고 
소주를 마신 사람은 걸려든다는 얘기다. 
“금주령으로 처벌되는 사람은 언제나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이고 
고대광실에서 호사를 떨며 술을 즐기는 자들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세종실록’ 8년 2월23일)거나, 
“가난뱅이는 정말 우연히 탁주 한 모금을 마시다 체포되고, 
세력과 돈이 있는 자는 날마다 마셔도 누구도 감히 입을 대지 못했다”
(‘세종실록’ 11년 2월25일)는 데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