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누가 왕을 죽였는가 6. 제20대 경종 <3> 늘푸른 봄날처럼 2019. 3. 15. 15:04 ■ 제20대 경종 ■ 두 모자의 운명 왕자 연잉군(훗날의 영조)를 낳아 새로 숙종의 총애를 얻기 시작한 숙원 최씨의 도움을 받아 서인들이 남인들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이다. 이로써 영의정 권대운, 우의정 민암, 판의금부사 유명헌 등 20여 명의 남인 중신들이 대거 삭탈관직, 문외출송되고 그 자리는 서인들로 채워졌다. 서인 남구만이 영의정이 된 데 이어 서문중이 병조판서, 신여철이 훈련대장을 차지해 의정부와 군사권을 서인들이 모두 차지했으며, 인사권을 지닌 이조판서도 서인 유상운이 차지했다. 갑술환국은 두 가지 점에서 이후 정치 향방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나는 남인들을 완전히 몰락케 해 재기할 수 없게 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숙원 최씨 소생의 왕자와 서인들이 결합한 것이다. 즉 서인들도 희빈 장씨 소생의 원자에 맞서 지지할 왕자을 갖게 된 것이다. 서인들은 5년 전에 당한 정치 보복을 잊지 않고 있었다. 먼저 서인들에게 강경책을 폈던 우의정 민암과 그아들 민장도를 사형시키고 훈련대장 이의징과 전 판사 조사기 등 남인 중진들을 대거 사형시켰다. 조사기는 과거 송시열을 공격했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했으니, 그야말로 집권이 정의가 되고 실권이 불의가 되는 당쟁의 시대였다. 갑술환국 후 1년 동안 사형, 유배, 삭탈관직된 남인 인사는 무려 130여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공격은 왕비 장씨에 대한 공세였다. 먼저 왕비 장씨의 친신궁녀 정숙이 간독하다는 모호한 죄명으로 사형당했는데, 이는 왕비에게 공경의 화살이 날아올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권을 서인으로 바꾼 숙종은, 이제 서인으로 강등된 민씨를 복위시키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숙종은 첫 조치로 민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켜 별당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서인들은 민비를 다시 세우려는 숙종의 뜻을 간파하고 왕비 장씨의 오빠 장희재에게 시선을 돌렸다. 왕비 장씨를 직접 공격할 수는 없었으므로 대신 오빠 장희재를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공격의 명분은 장희재가 포도대장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권력을 남용했다는 것이었다. 장희재는 이 죄목으로 유배되었다가 끝내 국문에 처해지게 되었다. 과거 폐위된 민씨가 복위를 도모하려 한다는 편지를 보내 국모를 모해했다는 죄목이었다. 장희재는 이 죄목으로 사형을 당할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서인들의 입장이 둘로 갈라선다. 영의정 남구만과 일부 서인들은 장희재가 세자의 외숙이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온건론을 펼친 반면, 대다수의 서인들은 사형시켜야 한다고 나섰다. 이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장희재의 사형을 주장한 노론과 장희재의 처형을 반대한 소론의 차이는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소론은 어쨌든 장씨의 아들인 세자가 다음 왕위에 오를 인물임을 인정했으나 노론은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대신 노론은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지지했다. 즉 소론이 대 남인 온건파라면 노론은 대 남인 강경파였던 것이다. 왕비 장씨는 끝내 쫓겨나 다시 후궁인 희빈으로 떨어졌다. 여러 의미에서 세자의 운명은 모친 장씨의 운명과 동전의 양면이었다. 서인이 정권을 장악한 이상 남인인 희빈 장씨의 운명은 순탄할 수 없었다. 장희재는 상황을 반전시키려고 부친 장형의 묘갈을 파괴하고 봉분 속에 흉물을 묻는 사건을 조작했다가 들통이 나 다시 사형당할 뻔했으나 소론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 남았다. 장씨가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2년 후였다. 그런데 쫓겨난 장씨가 별당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인 숙종 27년 8월, 인현왕후 민씨가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민씨는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장희빈과 남인이 복귀를 꿈 꿀 수 있는 단서가 열린 셈이었다. 그러나 대 남인 강경파인 노론은 이를 방관하지 않았다. 노론은 조정에서 장희재의 구명을 주장했던 소론을 공격하는 한편 연잉군의 어머니 최씨와 결탁해 희빈 장씨를 압박했다. 숙빈 최씨는 민비가 요절한 것은 희빈 장씨가 민비를 무고했기 때문이라고 숙종에게 밀고했고 이에 격분한 숙종은 비망기를 내렸다. "중전이 병든 지 2년이나 되었으나 희빈 장씨는 한 번도 문병하지 않았다. 또 중전을 중궁전이라 부르지고 않고 반드시 민씨라 칭하였으며 민씨를 요망하다고 하였다. 희빈 장씨는 남몰래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매일 두세 종년과 더불어 중전을 저주했으니, 이를 누가 참을 수 있으랴? 우선 제주에 위리안치되어 있는 장희재를 빨리 처단하라." 민비의 죽음이 장희재에게는 재기의 시작이 아니라 더 깊은 몰락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틀 후 숙종은 또다시 비망기를 내려 장희빈에게 자진할 것을 명령했다. 소론 영의정 최석정이 명을 환수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결국 장씨는 사약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중인가의 서녀로 태어나 국모의 자리까지 올랐던 한 여인의 운명이 비극으로 마감된 것이다.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게 되자 세자는 대신들을 봍잡고 호소했다. "어머니를 살려주오." 열네 살 어린 세자의 이 호소에 소론 영의정 최석정은 눈물을 흘리면서 답했다. "신이 감히 죽기로써 저하의 은혜를 갚지 않으리까." 그러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하면서 피해버렸다. 노론에게 세자는 남인이자 소론 당원일 뿐이었다.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 이 당시만 해도 숙종은 세자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숙빈 최씨 송생의 연잉군은 이제 여덟 살이었고 명빈 박씨 소생의 연령군은 세 살의 어린아이였다. 숙종이 인현왕후 민씨의 빈 자리를 노론이 아닌 소론 김주신의 딸로 채운 것은 이런 숙종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노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노론에게 세자는 정적일 뿐이었다. 2백여 년 전 연산군이 생모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으킨 갑자사화가 남의 일이 아니었다. 노론은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기위해 전력을 다했다. 노론이 연잉군을 지지하는 이상 세자의 운명은 유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재위 43년(1717) 숙종과 노론 영수 이이명은 독대 자리를 마련했다. 이 해가 정유년이기 때문에 '정유독대'라고 불린다. 이 자리에서 숙종은 이이명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 세자를 부탁한다는 말은 없었다. 이는 사실상 세자를 바꾸라는 말이었다. 연잉군과 연령군이 성장하자 숙종은 노골적으로 세자를 싫어해 조금만 잘못해도 크게 꾸짖었다. "누구의 자식인데 그렇지 않겠는가?" 생모를 죽인 아버지의 꾸짖음에 세자는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야사에는 사약을 받은 장씨가 세자의 하초를 잡아당겨, 세자가 병을 얻게 되었다고 했으나, 사실 세자의 병은 열네 살에 목도한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과 이후 계속된 숙종과 노론의 공격이 초래한 것이었다. 숙종과 이이명은 일단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후 꼬투리를 잡아 쫓아내는 세자 축출 프로그램을 세웠다. 보통 국왕이 대리청정을 명하면 모든 신하들이 일제히 반대하는 것이 관례이자 국왕에 대한 예의임에도 불구하고, 숙종의 대리청정 명에 노론 대신들이 환영하고 나선 것만 보아도 사전 모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리청정이 세자를 제거하려는 음모의 소산임을 안 소론은 대리청정에 반발했다. 심지어 향리에 은거중이던 소론 영수 영중추부사 윤지완은 세자 대리청정을 듣자 82세의 노구로 병든 몸을 이끌고 널을 짊어지고 와서 상소를 올렸다. "동궁께서 총명한 성품을 타고나셨고, 또 효성이 지극하셔서 생모의 변을 당하시고도 인현왕후를 섬기는 데 조그만 기미도 얼굴에 나타낸 적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덕을 쌓은 지 30년에 온 나라 백성들이 세자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날 세자께 대리청정을 시킨다 하오니 이는 반드시 음흉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사이에 끼여 나라를 망치려는 것인데 전하는 어찌 하여 이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말이 이에 미치니 온몸이 뼛속까지 떨립니다. 독대한 일은 상하가 모두 잘못한 일이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신을 사사로운 사람으로 삼을 수 있으며, 상신 역시 어찌 감히 임금의 사사로운 신하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당시 집권당은 노론이었기에 결국 숙종 43년 8월부터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노론은 세자 대리청정을 찬성하면서도 막상 대리청정을 종묘에 고묘하는 것은 반대했다. 종묘에 고묘하면 대리청정한 세자를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숙종과 노론은 일단 대리청정을 시킨 후 실책을 유도해 '즉위할 자격이 없다.'고 폐출시킬 생각이었으나, 숙종의 건강 악화와 소론의 반발, 그리고 세간의 의혹 때문에 쉽지 않았다. 만약 숙종이 건강했다면 세자 폐출은 실현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숙종은 병석에 있었고 약방의 입진에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드디어 1720년 장장 46년을 집권한 숙종은 예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환국과 재환국, 폐출과 복위로 점철된 한 시대가 간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어머니 장씨가 비명에 가는 것을 목격한 세자가 즉위했다. 파란의 경종시대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