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누가 왕을 죽였는가

5. 제18대 현종 <5>

늘푸른 봄날처럼 2019. 3. 7. 10:05



■ 제18대 현종 


■ 현종의 이례적인 조치

현종은 서인들이 의정한 9개월복을 1년복으로 바꾸는  단안을 내렸지만, 집권당인 서인은 
1년복으로 바꾸려는 현종의 의사에 맞서 끝까지 싸웠다. 현종으누 서인들이 임금이 아니라 
자기 당의 영수인 송시열을 더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신속한 후속 초치를 취했다. 
먼저 예론의 주무  부서인 예조의 판서, 참판, 참의, 정랑 모두를 하옥하고, 9개월설을 주장한 
영의정 김수홍을 춘천으로 귀양 보냈다. 신중한 현종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신속한 조치였으나 
그렇다고 물러날 서인들이 아니었다. 서인들은 근 50여 년 이상을 집권한 정당이었다.
먼저 서인 승지 이단석과 교리 조근이 입대를 청했다. 
그러나 입대를 청한 이유를 직감한 현종은 이들을 꾸짖었다.
" 내 심기가 매우 불편한데 대면을 청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 대신을 위해서가 아닌가. 
군신의 의리가 매우 엄한 것인데 너희들은 이점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단 말인가."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승정원의 승지와 홍문관 교리가 국왕이 아닌 자당을  위해 
국왕을 압박하는 지경이었다. 현종이 입대를  거부하는 데도 이들은 물러서지  않고 차지를 올려 
노론 영수 김수홍을 구하고 현종을 비난했다.
" 장자와 중자에 관한 의논은 오늘 처음 나온 말이  아니고, 또 이말이 옳지 않으면 채용하지 
않으시면 그만인데 이로써 대신을 귀양 보내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자신을 보좌해야 할 승지와 교리가 임금보다 당론을 추종하자 현종은 분노했다.
" 차자의 말은 내가 매우 놀랍게 여긴다. 기해년에 갑과 을이 다투어 변론할 때 조정에서 
<국제>를 사용하였으나 장자와 중자의  구별이 없으므로 그렇게  처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해년에 갑과을이 변론한 것들을 주워 모아 대왕대비의 복제를 강등하려고  꾀하였다."
승지와 교리의 차자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번에는 양사가 나서서  현종을 압박했다. 
장령 이광적과 지평 유지발이 예조에 대한 심문과 김수홍의 중도부처를 취소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에 현종은 분노하며 말했다.
"너희들의 계사에 내가 심히 놀랐다. 양사의 대간은 마땅히  엄한 말로 예론을 그릇 이끈 자들을 
죄 주기를 청해야 하는데도 도리어 죄인을 구하려고  하는구나. 지금의 양사는 직책을 다하지 
못한 자들인데 어찌 낯을 들고 길거리를 다닐  수 있겠느냐. 이들을 함께 삭직해서 내쫓으라."
현종이이처럼 강력히 나가는 데도 서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승정원과 삼사의 주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번에는 좌의정 정지화가 직접 나서 김수홍을 옹호했다. 지금껏 배후에서 젊은 서인들을 
조종하던 중진이 직접 나선 것이다. 현종이  정지화의 청마저 거부하자 판중추 민유중, 좌참찬 이상진, 
김만기등 서인 중진들이 줄줄이 나서서 김수홍을 옹호했다.
"임금에게 박하고 어느 누구에게 후하게 한단 말인가"란 현종의 힐난이 
이유 있는 비난임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와중에서 서인 대사간 남이성이 현종에게 직접 도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예론에 있어 을의 설(1년설)을 주장하는 자가 모두나라에 충성스러운 것도  아니고, 갑의 설
(9개월설)을 주장하는 자가 모두 임금에게  박한 것도 아닙니다. 만일 전하께서  노여움을 잊고 
용서하신다면 지금 대신들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남이성은 '사종지설'을 인용하여 자의대비는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효종과 인선왕후의 적통을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듯 조정을 장악한 서인들이  모두 
당론을 따르면서 현종은 고립되었다. 왕권에 도전한 대신들을 탄핵해야 할 대간의 장관이,
대신들을 편들고 국왕에게 대드는 판이었다. 현종이나 서인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현종은 대사간 남이성이 올린 상소의 맹점을 공격했다.
" 갑과 을의 설이 절충되지  못했을 때에는 그 후한 의논(1년복)을  좇는 것이 옳겠는가? 
박한 의논(9개월복)을 좇는 것이 옳겠는가? 감히 박한  의논을 좇아 대신에게 아부하였으니 
이는 임금이 없는 자의 말이다. 멀리 절도로 귀양 보내라."
현종이 남이성을 진도로 귀양 보내자  삼사에서 일제히 들고 일어나  남이성을 옹호했다. 
15년 전 윤선도가 "나라의 권력은 위의  임금에게 있지 않고 신하(송시열)에게 있습니다"라고 
주장한 것이 현실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현종은 서인들을 데리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깨닫고, 서인의  빈 자리를 남인들로 채우기로 
결심했다. 현종이 당시 향리인 충주에  있던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은 것은,  곧 집권당을 
교체하겠다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남인을 영의정으로 삼은 이 조치에  서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자리도 아닌 영의정 
자리를 남인이 차지한 것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현종이  서인에게 극도의 반감을 품은 데다가 
남인들이 정권마저 차지한다면 서인들의 처지는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 현종의 복통과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

이런 와중에 이변이 발생한다. 서인들을 다그치던 현종이 갑자기 병석에 누운 것이다.  
현종의 병명은 음식에 의한 독살의 혐의가 있을 때 흔히 나타나는 복통이었다. 
재위 15년 7월 24일 이후 현종은 침과 뜸을 맞았는데 8월 7일부터는 극심한 피로까지 느끼게 되었다. 
현종은 기운이 없어 대신들의 접견을 연기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으나.  
그 와중에도 영의정 허적이 언제 오는지를 물었다.
현종이 사망하기 이틀 전 서울에  도착해 약방 도제조를 겸하게 된  허적이, 승지를 시켜 왕비에게 
전한 말은 현종의 증세에 대한 남인측의 의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허적은 현종의 곁에 있는 사람이 
환관들 뿐이어서 증세를 알 수 없다며 현종의 장인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남인 예조판서 장선징, 
그리고 같은 남인이자 왕실의 외척인  청평위 심익현에게 병상을 지키도록 했다.
허적은 현종 곁의 환관들이 선인들에게 매수당했을 가능성을 의심하여 이런 주청을 한 것이다. 
복통이나 극심한 피로 등은 독약이나 몽혼약에 의한 증세일 가능성이 높았다. 
만 33세의 건장한 청년이 갑자기 피로를 느낀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허적의 이런 주청은 적절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현종은 심익현이 냉약에 타서 올린 인삼차를 조금 드는 듯하더니 
그날 밤 열시경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런 갑작스런 사태로 현종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이후 조선의 정세는 
달라졌을  것이다. 현종같이 온건한 성격의 인물이 단호한 조치를 취할 때는  
분명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확신은 더 이상 조선이 
'서인들의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은 
국왕과 백성들의 나라지 서인이란 특정 당파의 나라가 아니라는 확신이었다.
혼수상태 속에서도 거듭 허적이 언제 오느냐고 물었던 것은, 현종의 이런 확신이 
뇌수 깊숙이 뿌리박힌 하나의 사상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현종 역시 부왕 효종처럼 큰일을 추진하던 와중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조선은 아직도 '서인의 나라'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