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누가 왕을 죽였는가 5. 제18대 현종 <1> 늘푸른 봄날처럼 2019. 2. 27. 00:11 ■ 제18대 현종 ■ 예송 시대에 가려진 죽음 현종은 그다지 낯익은 임금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치세 15년은 '현종'이란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흔히 예송논쟁은 '쓸데없는 정쟁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특히 일인 학자들이 이런 논리를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유포시켰지만 사실 예송논쟁은 그렇게 쓸데없는 정쟁은 아니었다.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은 그 결과에 따라 당시의 집권세력이 교체될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특히 현종 15년에 발생한 2차 예송논쟁은 1623년의 인조반정 이래 50년 간 집권한 서인 지배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현종은 실제로 그런 의도를 가지고 2차 예송논쟁을 이끌었다. 현종은 2차 예송논쟁 당시 국왕보다 더한 권력을 지니고 있던 서인의 거두 송시열과 그 추종세력을 정연한 논리로 몰아붙였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현종의 정연하고 단호한 공세에 당황했다. 그리고 결국 이 논쟁으로 사실상 국왕의 위에 있던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등용되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갑작스런 사건이 발생한다. 2차 예송논쟁 와중인 재위 15년 8월 8일에 갑자기 현종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현종의 병명은 복통이었다. 현종이 최초로 치료를 받은 것은 7월 24일로, 남인들이 편찬한 <현종실록>에는 침을 맞았다고 되어 있으나, 서인들이 편찬한 <현종개수실록>에는 뜸 치료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현종은 계속 뜸 치료를 받는데, 8월 7일에는 복부가 당기고 아픈 증세는 조금 덜 했으나 극심한 피곤을 느꼈다. 인삼차를 계속들었으나 대신들을 인견할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해졌다. 같은 날 오후에는 맥박이 빨라지고 살갗이 뜨겁게 달아오른 데다가 요통 증세까지 있어, 약방에서 해표제를 올렸다. 그 후 8월 9일에는 열이 나는 증세가 학질 같다 하여 침을 맞고, 다음날인 10일에는 열이 계속 나는 데다가 헛배가 부어 오르고 대변이 묽고 잦으며 소변이 안좋아 약방에서 분리제를 썼으나 열과 설사 등의 증세는 차도가 없었다. 이후 인삼차만 가끔 들 뿐 종일 혼수상태가 계속되었다. 약방에서 시령탕을 올렸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이런 와중에도 현종은 조금만 기운을 차리면 영의정으로 제수한 허적이 언제 충주에서 오는지를 물었다. 현종은 2차 예송논쟁 와중에 서인 영의정 김수홍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남인 허적을 임명할 만큼 집권세력 교체에 집요한 관심을 보였다. 드디어 8월 16일 허적이 서울에 올라오자 현종은 거의 혼수상태에서도 관복을 입고 예의를 갖춰 만났다. 그때가 8월 17일, 현종이 부왕 효종처럼 못다 한 일을 남기고 승하하기 하루 전이었다. 허적이 설사 증세가 좀 덜하냐고 묻자 현종은 덜한 것 같지 않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날 약방에서 시약청을 개설하자고 청하자, 현종은 약방이 가까운 곳으로 옮겨 왔으니 시약청까지 개설할 필요는 없다며 거절하다가 재차 아뢰자 허락했다. 이때 허적이 영의정으로서 약방 도제조를 겸하자마자 승지를 시켜 왕비에게 전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상의 병세가 저런 데도 곁에서 모시는 자가 환관뿐이어서 증세의 경중도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청풍부원군 김우명,예조판서 장선징, 청평위 심익현이 오늘부터 좌우에서 모시게 하소서." 즉 현종의 병상을 지키는 환관들을 믿을 수 없으니 장인 김우명과 매제 심익현, 그리고 남인 장선징으로 하여금 병실을 지키게 하자는 요청이었다. 허적은 현종의 급작스런 병세에 분명 서인들이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현종을 알현한 다음날 이런 주청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현종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백회설에 뜸을 떴으나 효력이 없어 오후 서너시경이 되자 병세가 매우 위독해졌다. 현종은 하얀 겹모자에 하얀 옷차림으로 하얀 평상에 부들자리를 깔고 하얀 요에 하얀 이불을 덮은 채 머리를 북으로 하고 누워 있었다. 영의정 허적이 평상 앞에 꿇어앉아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인삼차를 드시옵소서." 눈을 뜬 현종이 허적임을 알고 일어나 앉으려 하자 손으로 부축해 일으켰다. 현종은 인삼차를 손수 들어 마셨다. 허적이 물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별로 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숨이 차서 목소리가 분명하지 못하였다. 현종은 심익현이 인삼차를 냉약에 타서 올리자 조금 들더니 대신들은 물리쳤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날 밤 열시경 창덕궁 재려에서 현종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말았다. 재위 15년 34세의 한창 나이로 부왕 효종처럼 큰일을 추진하는 와중에 한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