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누가 왕을 죽였는가

4. 제17대 효종 <3>

늘푸른 봄날처럼 2019. 2. 24. 01:31



■ 제17대 효종 

■ 효종의 딜레마

효종의 군비 확장과 북벌 의지에 대한 문신들의 반발은  거셌다. 군비 확장의 전제조건은 강력한 
왕권이었다. 그러나 군비 확장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려는  효종의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사대부들과의 마찰도 강해졌다. 조선은  청과는 다른 나라였다. 비록 국왕이라  해도 사대부의 
지지 없이는 강력한 정책을 펼 수 없는 나라가 조선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말로는 춘추대의를 외쳤으나 속으로는 현상 유지를 바라고 있었다. 구조화된 
문치주의 아래서 지배계급의 지위나 계속 유지하려고 한 것이다. 이들은 두 번에 걸친 국가적 전란을 
겪으면서도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지배세력이었다. 이것이 바로 효종의 딜레마였다.
즉 이들을 배제하고는 북벌도 군비 확장도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효종은 문신들의 
반발을 억누르며 군비 확장을 강행했는데, 재위 8년째가 되자 문신들이 효종의 승무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군비 확장에 반대하는 명목상의 이유는 백성들의 민생을 먼저 생각하라는 
이른바 안민책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농사를 짓는 한편 군사훈련,  성 쌓기, 병장기 제조 등의 부역에  동원되어 이중의 
곤란을 겪고 있었으므로 안민책은 명분있는  반대였다. 당연히 농민들로부터 불평의 소리가 터져 
나왔고 문신들은 이를 구실 삼아 군비 확장에 반대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피폐한 생활을 구실로 한 
군비 확장 반대는 일견 명분이 있어 보이지만 그 속사정을 알고  보면 이 또한 말뿐이었다. 
당시 농민 생활을 피탄에 빠뜨린 주범은 군비 확장이 아니라 불평등한 세금체계였다. 농민들을 
짓누르던 군역을 양반 사대부들은  면제받고 일반 백성들만 부담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또한 
수천 석의 소출을 올리는 전주인 사대부의 공납액과, 송곳 꼿을 땅 한 평 없는 전호인 농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공납액도 같거나 오히려 농민들이 더 무거운 경우가 많았다.
양반 사대부들은 이런 불균등한  조세체계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에는  극력 반대하면서도, 말로는 
농민 생활의 피폐를 구실로 군비 확장에 반대했다.  물론 대동법의 경세가 김육이나 이경석처럼 
농민들의 고초를 진심으로 걱정한 문신들도 있었지만, 나머지 대다수 북벌에 반대하는 문신들은 
군비 확장이나 북벌로 인한 기득권 상실을 두려워 했다.
효종 8년 사대부들이 효종의 군비 확장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나서자 효종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사대부들이 더 이상 효종의 정책에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나서자 더 이상 군비 확장 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효종 8년(정유년) 산림의 영수 송시열이 올린 <정유봉사>였다.  
봉사란 남이 볼 수 없게 밀봉한 상소문을 말한다. 그만큼 비밀스런 내용이 많음을 암시한 것이지만, 
실상은 남송의 주희가 효종에게 올린 봉사를 본뜬 것이었다.
송시열은 <정유봉사>에서 효종의 재위 8년을 전면 부정하고 나섰다.
"전하께서 재위에 계신 8년 동안은 그럭저럭 지나갔을  뿐 한자 한치의 실효도 없습니다. 위로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와 백성들의 바람에 답하지 못함이 어찌 오늘에 
이를 수 있습니까? 백성들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해, 안에서 떠들고 밖에서 공갈하여 망할 위기가 
조석에 다다랐습니다."
송시열은 <정유봉사>에서 총 19개 항목에 걸쳐 국정의 모든 문제에 대해 진언했다. 송시열은 
오늘날까지 효종 북벌 이론의  제공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그의  사후 노론의 문인 제자들이 
자가 발전시킨 것이고 실사은 북벌의 반대자였다. 이 <정유봉사>에서도 송시열은 사실상 북벌 
중지를 요청한다. 북벌 중지의 논리 역시 주희에게서 빌려왔다.
"주자가 처음에는 효종(남송의 효종)에게 금나라를 쳐서 북벌하는 의리에 대해 극진히 말했으나, 
20년 뒤에는 다시 북벌에 관해 말하지 않고 다만 '오직 폐하께서 먼저 동남쪽의  태평하지 못한 것을 
근심하시어 마음을 바르게 하시고 한 몸의 사용을 이기셔서 조정을 바르게 하시면 진실한 업적을 
얻을 수 있어서 별다른 근심이 생기지 않아 원대한 계획이 방해받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때 효종이 편안한 데 빠져서 근본이 염려되는 것을 이길 수 없을까 염려한 것입니다."
남송의 주희가 처음에는 북벌의 의리를 논하다가 나중에는 북벌이 아니라 '수신'을 권고했는데, 이는 
남송의 효종이 편안함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는 남송의 효종에게는 해당될지 몰라도 
조선의 효종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조선의  효종은 직접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군사들과 
어울리는 임금이었으나 근본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진정 염려해야 할 것은 말로는 '북벌'과 
'춘추대의'를 외치면서도 정작 북벌에는 딴죽을 거는 송시열 같은 문신 사대부들의 이중적인 처신이었다.
청나라가 알면 오히려 좋아할 이런 내용의 상소를 굳이 봉사라는 비밀 상소의 형식을 빌려 위기를 
과장한 그 진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당시 민생을  살리기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구체적으로 양반 사대부들의 봉건적인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양반들도 일반 백성들처럼 국역의 
의무를 지는 것이 민생 안정의 첩경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정유봉사>에서 효종이 사대부를 
우대하지 않는다며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사대부를 우대하라는 것. 이것이 바로 송시열이 
효종에게 분개한 가장 큰 이유였다.
"전하께서 대신을 공경하여 예법으로 부리는 도리를 아시지 못함은 아니지만 지난번에 심하게 대신을 
꾸짖으시고 돼지처럼 여러 관원을  꾸짖었다 하는데 그것은 주자가 매우  놀라 탄식한 바입니다."
이는 얼마 전 효종이 홍문관 부제학 윤강에게 태형을 가한 것에 대한 일종의 항의였다.
"윤강은 홍문관 부제학으로서 경연을 이끄니 전하와 가까운 자인데 비록 실수한  바가 있다 하여도 
어찌 졸지에 끌어내어 볼기를 때려서 여러 백관에게 보이셨습니까."
송시열은 노골적으로 효종이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부터는 깊이 성의를 여기에  두시어 반성하시고 살피시는  공부를 더하셔서, 희노에 의해서 
움직이지 마시고 신민들을 햇볕처럼 사랑하고 하늘처럼 두려워하십시오."
송시열 같은 조선 사대부들에게 나라는 임금의 것이 아니고  천하의 것이었다. 물론 여기서 '전하'는 
만백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대부'를 뜻하는 것으로, 나라는 임금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대부의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관작은 전하의 관직이 아니고 천하의 관작이오나,  폐하가 그렇지 못한 자를 벼슬시키면서 
하늘이 기뻐하고 백성이 기뻐하기를 바라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송시열에게 사대부는 곧 모든 것이었다. 그는 임금이 사대부들  초월한 위치에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사대부이고 임금은 다만 사대부 중에서 가장 높은 제1사대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효종은 이처럼 8년의 재위 기간 전체를 부정하고 나선 송시열의 <정유봉사>에 분명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효종은 윤강에게 그랬던 것처럼 송시열을  붙잡아 볼기를 치지는 못했다. <정유봉사>는 
송시열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조선 사대부, 특히 서인 산당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효종의 군비 확장 정책은 여기저기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었고, 사대부들은 집단적으로 저항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송시열과 송준길의 산당이 위치해 있었다.  결국 효종은 
자신의 처세를 전면 부정한 송시열을 처벌하기는커녕 상당한 정치적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효종은, 송준길과 함께 '양송'으로 불리며 사대부들의 여론을 주도하던 산림의 영수 송시열과 
군비 확장에 비판적인 산당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집단 저항으로 비롯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산당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벼슬을 제수하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했다. 
이는 효종에게 정면으로 대항한 송시열의 승리이자 효종의 패배였다. 
송시열은 여러 차례  벼슬을 사양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주가를 한층 높인 후, 
효종 9년 7월  행호군을 받아들임으로써 드디어 조정에 들어왔다. 
얼마 후 산당의 또 다른  지도자인 부호군 송준길도 조정에 나왔다. 
은거와  출사를 거듭했던 산림이 
효종 재위 9년여 만에 드디어 집단적으로 출사한 것이다.

■ 북벌 대 춘추대의의 대타협

북벌을 둘러싸고 효종이 사대부들과 마찰하면서 정정이  불안해졌다. 사대부들의 집단 반발은 
또 다른 인조반정을 유발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효종은 하나뿐인 동생 인평대군을 잃은 직후라 
마음이 나약해져 있었고, 여기에 말을 타다가 낙마하여 부상까지 당해 글자 그대로 심신이 고달픈 
처지였다.  이런 처지에서 효종은 송시열과 송준길의 산당을 끌어들임으로써 정치적 난국을 
타개하려 했다. 하지만 산당은 군주가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따라오는 정당이 아니었다. 이들은  
살아 있는 조선의 군주보다 이미 죽은 남송의 주희를 더 떠받들었다. 효종이 주희의 수신론을 
비판했다는 말을 듣고, 송시열이 효종에게 따진 것은 이들이 누구를 더 섬기는가를 보여준 일례이다.
"신이 듣기에 지난번 경연에서 '오늘날 씻기 어려운 치욕을 당했는데 여러 신하들은 이런 생각은 
하지 않고 매번 나에게 수신하라고만 권하고 있으니 이런 치욕을 씻지 못한 채 수신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는데, 과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신은  전하께서 성학이 
미진한 데가 있는 것임을 두려워합니다." 
효종에게 중요한 것은 북벌이었으나, 송시열의 산당에게  중요한 것은 춘추대의와 수신이었지 
실제의 북벌이 아니었다. 군사를 일으켜 북진하는 것이  효종의 북벌이라면 산당의 북벌은 말로만 
춘추대의를 외치는 것이었다. 그러니 군비 확장에  대한 효종과 양송의 의견이 틀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효종에게 군비 확장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였지만, 
양송은 훈련도감 군사를 늘리는 것도, 군량을 늘리는 것도 반대하고  나섰다. 물론 이들은 
흉년이니 백성을 진휼하자는 것을 명분으로  내걸었으나 그 속마음이 군비 확장 반대에 있음은 
분명했다.
이들을 설득하지 않고서는 군비 확장이고 북벌이고 모두 소용없음을 안 효종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 자신이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것을 북벌을  강력히 추진하는 계기로 삼기로 한 
것이다. 효종은 자신이 뒤로 물러서고 산당에게 정권을 내주기로 결심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북벌을 적극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 송준길을 병조판서로 삼아, 
인사와 군사에 대한  전권을 주면서 북벌 추진의 대임도 함께  넘겼다. 이것은 보기 드문 군주와 
신하 사이의 대타협이었다.
송시열과 송준길, 이른반 양송은 효종이 자신들에게 정권을 맡긴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효종이 한 발 물러서고 산당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최대공약수는 북벌이었다. 산당정권은 
적극적으로 북벌을 추진할 때에만 유지될 수 있었다.  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반대하던 군비확장을 
적극 추진해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비밀 서신을 보내 북벌을 다그치기도 했다.  이러한 효종의 비밀 서신에 대한 
송시열의 답신이 <상영릉문>이다. 하지만 <상영릉문>의 내용은  대단히 모호했다. 북벌을 하자는 
것인지 말자는 것인지 본심을 알 수 없었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분명한 북벌 의지를 재천명하고 
또한 북벌에 대한 산당의 분명한 당론을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효종이 전례를 깨고 송시열과 독대한 것은 바로 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조선에서 독대는 
금지되어 있었다. 국왕은 반드시 승지와 사관이 입회한  자리에서 정사를 처리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국왕과 신하의 독대는 매우 이례적인 행위였다.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는 효종 10년 
기해년에 있었다고 해서 기해독대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독대이다. 그 해 3월 11일이었다.
이날 효종은 이조판서 송시열을  제외한 나머지 신하들은 물론  승지와 사관, 내관까지도 내보냈다. 
흥정당에 단 둘이 남은 효종과 송시열 사이엔 긴장이 흘렀다. 효종이 독대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분명했다. 북벌을 채근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현재의 대사(북벌)를 논의하기 위함이오."
송시열도 이 자리가 북벌을 논의하는 자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효종의 북벌론은 계속된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소, 정예 포병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할 때 곧장 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면 중원의 의사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소.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붙잡혀 간 수만 명의 포로가 그곳에 억류되어 있으니, 어찌 내응하는 자가 없겠소."
효종의 북벌 전략은 허황한 것이 아니었다. 청의 지배층은  소수민족인 만주족인 반면 피지배층은 
다수민족인 한족이었다. 만주족은 한족의 10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중화사상을 지닌 피지배자층 
한족이 만주족에 대해 민족감정이 없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북벌군이 기세를 올리면 
청은 급속히 분열될 수 있었으며, 효종의  말대로 조선 포로 수만 명은 물론이고 한족도 궐기할 수 
있었다. 조선과 한족의  연합전선을 구축해 만주족에 대응하는 효종의 전략은 탁월한 것이었다. 
효종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오늘의 대사는 과감하게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을 걱정할 필요는 없소."
효종은 이어 다른 신하들이 북벌에 무관심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을 질타했다.
"내가 만수전을 지을 때 몇 명을 만나 은밀히  시험해보았는데, 모두 무관심하여 깊이 
생각하는 자가 없으니, 이처럼 통탄할 일이 어디 있겠소. 신하들이 모두 눈앞의 부귀만을 도모하면서 
북벌을 하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듯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말하면 모두 간담이 
서늘해서 놀라니, 나 혼자 부질없이 탄식할 뿐이오. 저들이 모두 자기 자손들을 위한 
계획만 세우고 나를 도우려 하지 않고 있소."
그랬다. 당시의 조선 사대부는 나라는 뒷전이고 식구만 생각했다. 병자호란 때 판서의  자제를 
인질로 데려간다 하자 앞다투어 사직서를 내고 서로 그 자리를 맡지 않으려 했던 지배층이 그대로 
이어져왔으니, "자기 자손들을 위한 계획만  세우고" 있었던 상황은 차라리 당연했다. 
그러나 효종의 이런 질타를 송시열은 정면에서 반박했다.
"예로부터 제왕들은 수신제가한 후 법도와 기강을 세웠으니  이것이 일의 순서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혼잡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떨쳐버리지 못하시니 지기가 있는 선비들의  마음이 
게을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으며, 뭇 신하들이 제 집안을 살찌우는 데에만 
힘쓰는 것도 전하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는 진실로 
심신을 깨끗이 하시어 잡다한 모든 일들을 일체 제거하시고 마음과 생각에 한결같이 이 일만을 
위주로 하신다면, 신하들도 어찌 감히 나라를 위해 제 몸을 바치려 하지 않겠습니까?"
송시열은 지배층인 사대부들의 부패와 안일을 효종의  책임으로 돌렸다. 자나깨나 북벌만 생각하는 
효종에게 이는 모욕이있다. 그러나 효종은 송시열의 이런 말까지도 받아들였다. 북벌을 위해서는 
송시열의 지지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경의 말이 옳소."
효종이 이렇게까지 양보한 이유는 물론 송시열을 북벌로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효종의 이런 
양보에 대한 송시열의 답변은  공허했다. 처자의 근본 도리는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뜻의 
'수기형가'인데 이것이 북벌의 선결조건이라는 허무한  메아리였던 것이다. 훗날 송시열이 반대 
당파로부터 '수기형가'란 네 글자로 북벌의 책임을 때우려 했다는  비난을 받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송시열의 북벌관은 이미 효종 즉위년의 <기축봉사>에서 다  드러났다. 송시열은 그때 이렇게 피력했다.
"이렇게 우리 힘의 강약을 살피고 저 오랑캐 세력의  성하고 쇠함을 엿본다면, 비록 창을 들고 
저들의 죄를 따지면서 중원을 깨끗이 쓸어 신종황제(임진왜란 당시의 명 황제)의 망극하신 은혜를 
갚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혹시 오랑캐와 국교를 끊고 이름을 바르게 하여 이치를 밝게함으로써 
우리의 의리를 지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
즉 송시열의 북벌관은 실제로  만주와 중원을 점령하는 군사적  정벌이 아니라, 청나라가 약해지면 
국교를 단절해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자는 시대착오적이고 사대주의의 극치인 명분론에 불과했던 것이다. 
송시열은 효종이 앞으로 10년을 기한으로  북벌을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나서자  다급해졌다. 효종은 
독대에서, 조만간 송시열에게 큰 임무를 맡기고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직하게 한다고 말했다. 
"큰 임무"란 두말 할 것도 없이 북벌이었다. 만약 송시열이  큰 임무를 저절하면 효종은 현재의 
이조판서직마저 박탈해버릴 것이었다.  그러니 송시열은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려면 북벌을 
적극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북벌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주자학자 송시열에게 '춘추대의'란, 명분을 
제공해주는 도구일 뿐 군사를 일으키는 명분은 아니었다.
기해독대 이후 송시열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북벌을 추진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송시열은 영의정 정태화를 끌어드이려 했다. 정태화를  찾아간 송시열은 
곧 군사를 이끌고 북벌에  나설 것처럼 호언장담하면서 정태화의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거의 평생을 
조정에서 보낸 정태화는 산림에  있었던 송시열보다 노련한 정치가였다. 자신들 끌어들여 북벌의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송시열의 의도를 간파한 정태화는 이렇게 답했다.
"공의 지략이 성상의 위임을  받아 천하의 대의인 대사(북벌)를  경영하시니 무슨 일인들 못하겠소. 
나는 이미 늙고 무능하여  아무것도 도와드리지 못하지만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살아서 
대감이 비상한 공을 세우고 천하에 대의를 펴는 것을 한 번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오."
"나는 이미 늙고 무능하여 아무것도 도와드리지  못한다"는 거절이었다. 송시열이 실망한 낯빛이 되어 
돌아가자 정태화의 아들이 물었다.
"아버님은 지금 국제 정세가 어떤데 북벌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정태화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언제 북벌한다고 말했더냐. 송  대감은 지금 북벌을 임무로  삼아 성상에게 무한한 위임을 받았으나, 
시간이 흘러도 성공할 묘책이 없으니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그의  생각에 내가 북벌이 가망없다고 하면 
그 한마디를 구실 삼아 나에게 죄를 돌리고 발을 빼려  하는 것인데, 
내가 왜 남에게 팔린단 말인가. 그가 나에게 권모술수로 대하니 
나 또한  권모술수로 답한 것이다. 
우리 속담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하지 않더냐."
이들의 대화는 북벌에 대한 조선 지배층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북벌을 효종 혼자만의 꿈이라고 생각했다. 
청을 건국한  만주족이 조선보다 인구가 적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으며, 효종처럼 청의 취약한 구조에 대해 분석하지도 않았다. 
그저 북벌은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송시열도 정태화와 같은 생각이었으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효종의 전폭적 신임을 바탕으로 북벌을 소리 높여 외쳤지만 
조선의 국력으로 북벌은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벌이 불가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순간 효종과 맺은 암묵적 연합전선은 깨질 것이고 
산당은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야 했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협곡이었다. 
이때 송시열을 구해주는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효종이 급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