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한국의 姓氏

경주황씨(慶州黃氏)

늘푸른 봄날처럼 2019. 2. 22. 16:50

    
    ■ 한국에는 현재 약 286개의 성,姓 (2000년 통계)이 있으며, 본(本)을 필수 요소로 한다. 
    한국의 성씨는 삼국 시대 이후 중국의 성씨 제도를 차용한 것이 많고, 
    고려 시대부터 족보를 만들고 귀족 계급의 성씨 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씨는 대부분 한 음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음절로 된 복성(複姓)도 있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성씨가 10만이 넘는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에서는 성씨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김(金)씨, 이(李)씨, 박(朴)씨인 사람이  
    전체 인구의 약 45%를 차지하여 특정 성씨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매우 높다 
    
    ■ 경주황씨(慶州黃氏) 
    
    ■ 시조 : 황사청(黃士淸)
    시조 황사청(黃士淸)은 조선 선조 때 사람으로 학자(學者)였다. 
    그는 평해(平海. 경주에 속한 현))에서 살다가 임진왜란 때 양주(楊州)로 피난하여 정착하였다. 
    그뒤 후손들이 선조의 세거지인 경주를 본관으로 삼아 계대(系代)하고 있다.
    황사청(黃士淸)의 선조는 평해황씨로 황란(黃鸞)의 5세손이며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좌위(忠佐衛) 황진운(黃進雲)의 둘째 아들임이 '평해황씨세보(平海黃氏世譜)'에서 밝혀졌다.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황전(黃傳, 1613 癸丑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황응해(黃應海, 1611 辛亥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황헌(黃獻, 1607 丁未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 모두 3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무과 3명)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 본관 연혁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
    이라 하였다. 65년(신라 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
    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을 주었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유수(留守)를 두어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하였다. 1008년(목종 11) 때 낙랑군(樂浪郡)이라 별칭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202년(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로 개칭한 이후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으로 이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면 폐합으로 
    경주군이 되었고,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으며,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는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에는 경주군과 통합하여 시로 승격하였다.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경주황씨는
    1985년에는 총 142가구 653명, 
    2000년에는 총 2,643가구 8,50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