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고전 隨筆

영장산객전(靈長山客傳) / 안정복(安鼎福)

늘푸른 봄날처럼 2019. 2. 18. 13:04

영장산객전(靈長山客傳) / 안정복(安鼎福)

 

 

객은 광주인(廣州人)이니 성은 모(), 이름은 모요, 자는 모이다. 그 자를 인하여 거처하는 집에다 순()이라고 편액을 걸고는 말했다.

 

천하의 일은 순리(順理)뿐이다.”

 

영장(靈長)은 산 이름이다. 그 속에서 글을 읽으며 자호(自號)영장산객(靈長山客)’이라고 하였다. 어려서는 몸이 약하여 병을 달고 살더니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학문에 사우(師友)가 없어 마음 내키는 대로 백가서(百家書)를 두루 보았으며, 관중(管仲)1), 상앙(商鞅)2), 손무(孫武)3), 오기(吳起)4), 감공(甘公)5), 석신부(石申夫), 경방(京房)6), 곽박(郭璞)7), 순우의(淳于意)8), 편작(扁鵲)9)의 책을 모두 연구하느라고 여러 해를 보냈지만, 소득이 없었다. 뒤늦게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으나 정작 시원하게 버리지 못하다가, 26세에 성리대전(性理大全)10)을 얻어 읽어 보고서야 비로소 이 학문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탄식하였다.

 

제 집에 무진장(無盡藏)11)으로 있는 것을 버려두고 깡통 들고 남의 대문에서 비렁뱅이 노릇을 했다.’는 말은 옛사람이 먼저 깨달은 바가 아니겠는가?”

 

드디어 손수 베껴 입으로 외웠다. 한편으로는 역대의 사기를 두루 다스려 치란(治亂)의 자취를 연구하고 안위(安危)의 기미를 살피며 제작(制作)의 근원을 분석하고 시비(是非)의 단서를 분별하기를 또한 여러 해 동안 계속하였는데, 그 때문에 내면으로 향하는 공부가 또한 전일(專一)하지 못했다. 널리 본 나머지 비록 얻은 것은 없었지만 말이나 의논을 내놓으면 그런대로 들어볼 만한 것이 있었기에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간혹 실제로 터득함이 있다고 여기기도 했으나 그 내면을 알고 보면 텅텅 비어있을 뿐이요, 이로 인하여 헛된 이름으로 세상을 속인 셈이 되어 버렸다. 기사년 여름에 천거되어 후릉참봉(厚陵參奉)12)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겨울에 이르러 또 만녕전13) 참봉(萬寧殿參奉)에 제수되자 명예를 사려는 것처럼 보일까봐 명에 응하였으나 그가 좋아하는 바는 아니었다. (중략)

 

갑술년 2월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14)로 승진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15)의 품계에 이르렀는데, 모두가 순서에 따라 오른 자급(資級)16)이었다. 이 해 6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영장(靈長)의 옛 집으로 돌아가 여막(廬幕)17)을 지켰는데, 병이 나자 그대로 죽겠다는 마음을 먹고는 문을 닫아걸고 교유를 끊은 채 한결같은 마음으로 운명을 기다렸으니, 이때에 나이 43세였다.

 

객이 평일에 제갈량(諸葛亮)18)과 도연명(陶淵明)19)의 위인을 사모하였는데, 진수(陳壽)20)?삼국지(三國志)?와 진송(晉宋)의 전()은 자상함과 소략함이 뒤섞여 있고 빠진 것도 많다 하여 두루 전기(傳記)를 채집하여 두 사람의 전()을 만들어 항상 읽으면서 그들을 만나기나 한 듯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흉내를 내어 뽕나무 800그루와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집의 좌우에다 심었는데, 뽕나무는 600그루가 말라 죽고 버드나무는 한 그루가 시드니, 일찍이 웃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망령되게 옛사람을 본떴더니 사물마저도 같잖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제갈량에게는 4분의 3이 미치지 못하고 도연명에게는 5분의 1이 미치지 못하니, 내가 누구를 속이겠는가.”

 

글을 읽으면 항상 대의(大義)만을 보고 심하게 해석하려 들지 않았으니 이 또한 두 사람이 하던 바를 사모한 것이다. 자질과 성품이 촌스럽고 어두우며 엉성하고 우활(迂闊)21)하여 백에 하나도 능한 것이 없었으나, 한 가지 스스로 허여한 것은 남의 선()을 보면 좋아하고 남의 능함을 보면 몸을 굽혀 배우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사물을 대하여는 거스르는 법이 없고 남을 심하게 꾸짖지 않았기에 일찍이 한 번도 남에게 무안을 당한 일이 없었고, 벼슬하는 5년 동안 분수에 맞게 분주하여 한 사람도 채찍질한 적이 없고 사()로써 공()을 해치지 않았으며 옛것을 고집하여 세속을 어기지 않았으므로 아랫사람들은 그 간편함을 즐거워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화락하고 평이함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은 처세를 잘한다고 했지만 그것 또한 마음을 쓰지 않았다.

 

집이 가난하여 서책이 없으므로 즐겨 적어서 잊어버리는 것에 대비하였으나 글을 짓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 또한 문사(文辭)에는 재주가 없음을 알아서 그런 것이었다. 저술한 것이 농 안에 가득 차 있지만 모두 탈고(脫藁)되지 않은 것이니, 비록 연석(燕石)22)처럼 스스로 귀중하게 여기지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으로서 한갓 심력만 소모했을 뿐이지 긴요하지도 않은 것이 분량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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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중(管仲): 중국 춘추 시대 제나라의 재상(?-B.C.645). 이름은 이오(夷吾). 환공(桓公)을 도와 군사력의 강화, 상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으며, 환공을 중원(中原)의 패자(霸者)로 만들었다. 포숙아와의 우정으로 유명하며, 이들의 우정을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한다. 저서에 ?관자(管子)?가 있다.

2) 상앙(商鞅): 중국 진()나라의 정치가(?-B.C.338).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 진나라의 법가(法家)를 대표하는 중요한 정치가였다. ()은 희(), (: 요즘의 본관에 해당함)는 공손(公孫), 이름은 앙()이다. 또 다른 별칭으로 위나라 공족(公族) 출신이라서 위앙(衛鞅)이라 불렸다. ()에 봉함을 받았기 때문에 상앙(商鞅)이라고도 한다. ?상군서(商君書)?는 그의 저작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목지신(徙木之信)’(나무를 옮겨 믿음을 얻는다)는 고사성어가 태어나게 만든 장본인이다.

상앙이 수도의 남문에 큰 말뚝을 세웠다. 그것을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는 상을 준다고 했다. 여러 사람들은 믿지 않았지만 어떤 이가 장난삼아 말뚝을 옮겼다. 상앙은 약속대로 상을 주었다. 이때부터 백성들은 국가의 명을 믿기 시작했다. 상앙은 백성들에게서 믿음을 얻어야 법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그러한 그는 388년 효공의 죽음과 함께 영향력을 잃게 되자 바로 자기가 정해 놓은 법인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3) 손무(孫武): 중국 춘추 시대의 병법가(?-?). 기원전 6세기경의 사람으로, 오나라 왕 밑에서 초나라, 진나라를 위압하고 절도와 규율 있는 군사를 양성하였다. 저서에 병서 ?손자?가 있다.

4) 오기(吳起): 중국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병법가(B.C.440?-B.C.381). ()나라 사람으로 노()나라, ()나라에서 벼슬한 뒤에 초()나라에 가서 도왕(悼王)의 재상이 되어 법치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저서에 병법서 ?오자(吳子)?가 있다.

강국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자 다급해진 노나라 군주는 병법에 능한 오기를 장군으로 임명하려 했다. 그런데 오기의 아내는 제나라 사람이었다. 오기는 망설임 없이 아내를 죽여 버리고 장군이 되어 제나라를 크게 무찔렀다. 오기는 장수가 되자 신분이 가장 낮은 병사들과 똑같이 옷을 입고 밥을 먹는 등 병사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었다. 뿐만 아니라 종기가 난 병사의 고름을 빨아 주기까지 하여 신망을 얻어 드디어 그가 원하던 위()나라 문후(文侯)에게 발탁되기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그는 초()나라에 가서 도왕(悼王)의 재상이 되어, 법치적 개혁으로 초나라를 강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초나라 귀족들의 질시를 받아, 도왕이 죽은 뒤 대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피살되었다.

5) 감공(甘公): ()나라의 사관(史官)으로 천문(天文)과 점성(占星)을 관장하였던 감덕(甘德). 그는 열네 살의 도겸(陶謙)이 대나무 말을 타며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고귀한 면모를 보고 장차 성공할 사람이라 하여 자신의 딸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천문에 능했던 위()의 석신부(石申夫)와 함께 일러서 감석술(甘石術)이라고 하면 바로 천문학(옛날의 천문학이란 주로 점성술 따위를 의미한다)을 가리키는 말이다.

6) 경방(京房): 전한(前漢)의 사상가(?-?). 자는 군명(君明), 본래의 성은 이(). 초연수(焦延壽)에게 역학(易學)을 공부하였는데, 재변(災變)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여 원제(元帝)의 총애를 받았으나 뒤에 권신(權臣) 석현(石顯)의 참소로 41세 때 처형되었다. 저서에는 ?경씨역전(京氏易傳)?이 있다.(?한서(漢書)? 「경방전(京房傳))

7) 곽박(郭璞): 중국 서진(西晉) 말에서 동진(東晉) 초의 학자시인(276-324). 자는 경순(景純). 박학하고 시문과 점술에 뛰어나 원제에게 상서랑(尙書郞)으로 임명되었다. 322년에 중신인 왕돈(王敦)이 반란을 일으켜 관군이 패하자 살해되었다. ?목천자전(穆天子傳)?(작자 미상의 중국 최고[最古]의 역사소설. 주목왕[周穆王]이 여덟 필의 준마를 타고 천제[天帝]의 딸인 서왕모를 만나는 등 환상적인 내용이다.), ?초사(楚辭)?, ?산해경(山海經)? 따위의 주석이 유명하다.

8) 순우의(淳于意): ()나라 때 침구(鍼灸)와 약치(藥治)에 능한 명의(名醫) 창공(倉公). 그는 일찍이 태창(太倉) 고을의 장()을 지냈으므로 창공(倉公)이라고 한다. 꿈에 봉래산(蓬萊山)에 가서 금빛 찬란한 상지선관(上池仙館)이라는 궁전에 이르렀는데, 한 동자(童子)가 일배수(一杯水)를 가져다 주므로 그것을 마시고 나니, 오장(五臟)이 서늘하였고, 그 이후로 진맥(診脈)에 신통력을 얻었다고 한다.(?사기(史記)?)

9) 편작(扁鵲): 중국 전국 시대의 의사(?-?). 성은 진(). 이름은 월인(越人). 원래 직업은 객관(客館)의 사장(舍長)으로, 요즘으로 말하면 호텔 지배인이다. 그런 그가 장상군(長桑君)이라는 사람을 만나 비전(秘傳)의 의술을 전수받고, 사람의 장기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의원이 되었다.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치료하였다고 한다. ()의 태자가 시궐(尸厥)이라는 병에 걸려 죽게 된 것을 고치면서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난경 難經?의 편찬자라는 설이 있다.

10) ?성리대전(性理大全)?: 중국 명나라 성조(成祖) 13(1415)에 호광(胡廣) 등이 황제의 명에 따라 편찬한 책. 주자(周子), 장자(張子), 주자(朱子) 등 여러 학자의 성리설(性理說), 이기설(理氣說)을 모아 수록하였다. 70.

11) 무진장(無盡藏): 끝없이 많은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말로 당송팔대가의 소식(蘇軾: 호는 東坡)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 나오는 말이다.

且夫天地之間(차부천지지간) 物各有主(물각유주) 苟非吾之所有(구비오지소유) 雖一毫而莫取(수일호이막취) 惟江上之淸風(유강상지청풍) 與山間之明月(여산간지명월) 而得之而爲聲(이득지이위성) 目遇之而成色(목우지이성색) 取之無禁(취지무금), 用之不竭(용지불갈), 是造物者之無盡藏也(시조물자지무진장야). (천지 사이에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어, 나의 소유가 아니면 터럭 하나라도 취하지 말 것이나,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면 빛을 이루어서,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조물주[造物主]의 다함이 없는 갈무리로다.)

12) 후릉참봉(厚陵參奉): 후릉(厚陵)은 정종(定宗)과 비()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金氏: 慶州)의 능() 으로 개성직할시 판문군(板門郡) 영정리(嶺井里)에 있다. 참봉(參奉)은 조선 시대에, (: 왕과 왕비 의 무덤), (: 왕세자와 왕세자비나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 등 여러 관아에 둔 종9품 벼슬.

13) 만녕전(萬寧殿): 1745(영조 21)에 설치한 강화(江華)에 있는, 영조(英祖)의 영정(影幀)을 봉안(奉安) 하고 있는 전각.

14)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사헌부(司憲府)는 중앙과 지방의 행정을 감찰하고, 관리를 규찰하는 등의 업무를 맡은 고려와 조선의 행정기관으로, 종친(宗親)과 문무백관을 규탄함은 물론 국왕에 대해서도 언제나 극간(極諫)하는 것을 본령(本領)으로 삼았다. 헌부(憲府백부(栢府상대(相臺오대(烏臺어사 대(御史臺감찰사(監察司) 등의 별칭을 가졌다. 오늘날의 감사원에 해당한다. 감찰은 비록 정6품직으 로 하위에 해당하지만 제1선의 사법기능을 담당하였던 만큼 그 위풍이 삼엄하였다.

15) 통훈대부(通訓大夫): 조선시대 동반(東班)인 문관(文官)에게 주던 정3(正三品) 품계(品階)이다. 정삼 품의 하계(下階)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보다 아래 자리로 당하관(堂下官)의 최상이다. 경국대전(經國 大典) 이후로 문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 임금의 4대손까지의 친족)과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에게도 이 품계를 주었다.

16) 자급(資級): 벼슬아치의 위계.

17) 여막(廬幕): 궤연(几筵: 죽은 사람의 영궤[靈几=靈座]와 그에 딸린 모든 것을 차려 놓는 곳) 옆이나 무덤 가까이에 지어 놓고 상제가 거처하는 초막.

18) 제갈량(諸葛亮):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정치가(181-234). ()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忠武).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 유비를 도와 오()나라와 연합하여 조조(曹操)의 위()나라 군사를 대파하고 파촉(巴蜀)을 얻어 촉한을 세웠다. 유비의 사후 출사표(出師表)를 후주 유선(劉禪)에게 올린 후 중원 을 도모하였으나 적수 사마의(司馬懿)와의 대결 도중 오장원(五丈原)에서 나이 54세로 병사하였다. 그는 집 주위에 뽕나무 800그루를 심었었다.

19) 도연명(陶淵明): 중국 동진의 시인(365-427). 이름은 잠(). 연명은 자().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이 되었으나, 80여 일 뒤에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남기고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한 후, 집 근처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자연을 노래한 시가 많으며, 당나라 이후 육조(六朝) 최고의 시인이라 불린다. 시 이외의 산문 작품에 오류선생전 (五柳先生傳)」「도화원기(桃花源記)등도 있다.

20) 진수(陳壽): 중국 서진(西晉)의 역사가(233-297). 자는 승조(承祚). 삼국 시대에 촉나라를 섬기었으나, 후에 진()나라에 봉사하였다. 중국 정사(正史)의 하나인 ?삼국지(三國志)?를 편찬하였다. 이에 비해 원나라 말기에서 명나라 초기의 소설가인 나관중(羅貫中: ?-?)이 지은 소설의 명칭은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또는 ?삼국지(三國誌)?라고 한다.(‘는 역사책, ‘는 소설책이다.)

21) 우활(迂闊)하다=오활하다: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다.

22) 연석(燕石): 송나라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연산(燕山)에서 주운 돌을 옥이라 믿어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된 고사.

 

 

 

해설

 

 

지은이 안정복(安鼎福)은 조선 정조 때의 학자(1712-1791)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百順), 호는 상헌(橡軒) 또는 순암(順菴)이다. 제천(堤川)에서 태어나 조부의 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다니다가, 25세 때 경기도 광주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에 정착하였다. 그의 집안은 당시의 중앙정계로부터 소외되고 있었던 남인 계열로 아버지는 관직에 나간 적이 없었으며, 그 자신도 과거에 응시한 적이 없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문인으로 지내면서 그의 학문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학문과 덕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이익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가 사헌부감찰, 목천현감(木川縣監) 등을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라 광성군(廣成君)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특히 과거의 역사, 지리학을 비판하고 우리 역사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세웠다. 저서에 동사강목(東史綱目), 순암집(順菴集), 가례집해(家禮集解), 잡동산이(雜同散異) 및 가전체 작품 여용국전(女容國傳)등이 있다. 좌참찬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영장산객전(靈長山客傳)은 순암집(順菴集) 19권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