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조선의 뒷마당 4. 민중의(民衆醫)-<3> 늘푸른 봄날처럼 2019. 2. 15. 19:40 중병을 앓아 피골이 상접한 환자와 이를 진료하는 의원의 모습을 그린 불암사 ‘감로탱’. ■ 명의의 전설이 탄생하는 배경 전염병이 돌면 의원에 관한 전설이 생긴다. 죽음을 앞에 둔 환자와 가족의 마음은 약해진다. 그 허약해진 심리의 대지에서 우연과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싹튼다. 난치병과 불치병을 격퇴하는 명의(名醫)의 전설은 이래서 시작된다. 적지않은 문헌과 구전은 전설상의 의원과 의술을 전하고 있다. 미신성, 비합리성을 동반하고 말이다. 유상(柳?)이란 의원이 있다. 숙종 때 사람이다. 이 사람은 숙종의 천연두를 치료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왕은 범인과 달라 천연두에 걸리면 곤란해진다. 살아나도 얼굴이 곰보가 되면 곤란하기 때문에 병을 방치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숙종은 재위 9년(계해년, 1683년)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유상의 약으로 수월하게 치료가 되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유상은 숙종 25년 세자 (뒷날의 경종)의 천연두에도 능력을 발휘하여 벼슬이 올라갔다. 유상은 양반이 아니고 감사의 얼자(孼子)였으니 의술로 꽤나 출세를 한 것이다. 임금의 천연두를 고친 유상의 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숙종실록’에는 기록이 없지만, 민간에는 기록이 있다. ‘청구야담(靑邱野談)’을 보자. 유상이 젊어 경상도 감사의 책실(冊室)로 따라갔다가 할 일도 없고 해서,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오던 길에 어떤 집에 들러 하루를 묵는데 주인이 잠시 출타한 틈에 우연히 그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는 의서를 뒤적여 보게 되었다. 주인이 돌아와 허락도 없이 남의 서책을 본다고 책망을 들었음은 물론이다. 날이 새자 주인은 유상더러 빨리 출발하고 중간에서 쉬지 말라고 채근을 한다. 유상이 탄 나귀조차 바람처럼 달려 지금의 성남 판교까지 단숨에 도착했다. 판교에는 별감 10여 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임금이 천연두를 앓고 있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유의원을 불러오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면서 유의원인가를 묻고 빨리 대궐로 가자 한다. 유상이 남대문을 통과해 구리개를 지나는데, 어떤 노파가 마마를 앓고 난 아이를 업고 있었다. 무슨 약을 썼냐고 물었더니, 거진 죽게 되었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시체탕(枾?湯)을 쓰라고 하여 나았다는 것이다. 유상의 머릿속에 번쩍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지난 밤에 언뜻 본 의서에도 시체탕에 관한 말이 있었던 것이다. 입궐하여 임금의 증세를 보니, 어제 본 어린아이의 증세와 같지 않은가? 시체탕을 썼더니 바로 효험을 보았다. 시체탕이 무어냐고? 사람 죽은 시체가 아니라 감꼭지 시체를 말린 것을 달인 물이다. 시체탕 이야기는 그야말로 신비스러움으로 착색된 이야기다. ‘전설의 고향’에는 나올지 몰라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청구야담’에는 한 가지 얘기가 더 있다. 유상이 입궐하여 진찰을 하고 저미고(猪尾膏)란 약재를 쓰기로 하자, 숙종의 어머니 명성대비(明聖大妃)가 준제 (峻劑·약성이 강한 약)라며 쓸 수 없다고 펄쩍 뛰었다. 아무리 청해도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유상은 소매 속에 몰래 약을 넣고 들어가 쓰니, 병세가 누그러졌고 이내 회복되었다고 한다. 어느 쪽이 맞는 이야기인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후자가 좀더 사실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 전염병 전문의 홍익만 전염병에 관한 의원 이야기는 제법 여럿 남아 전한다. 정조대의 문인 유한준 (兪漢雋, 1732~1811)은 ‘예의홍익만전(例醫洪翼曼傳)’이란 전을 남겼다. 주인공 홍익만은 특별하게도 전염병 전문의인데 그의 인간됨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그는 가슴 속에 경계를 두지 않아 성품이 툭 트였고 사람의 위급함을 보면 비록 평소 모르는 사이라도 오직 그 급한 처지를 구원하려는 인물이었다. 이런 인품이었기에 그는 임술년(1742, 영조18)과 계해년(1743, 영조19) 전염병이 돌았을 때 치료하여 살린 사람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홍익만이 어느 날 밤길을 가다가 길을 잃었는데 일흔쯤 된 노인이 나타나 자신이 이 고장 사람이라 소개했다. 그러고는 추운 날에 피곤하실 터이니 자신의 집으로 가서 박주(薄酒)일망정 한 잔 마시지 않겠느냐고 말을 건넸다. 익만이 노인을 따라 한참을 갔더니 노인은 홀연 보이지 않고, 움집에 시신 네댓이 가로 세로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그를 인도했던 노인이었다. 그리고 노인이 말했던 것처럼 술 한 병이 시렁 위에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신 뒤 시신을 거두어 묻어주고 떠났다. 이 이야기도 전염병이 돌던 상황을 배경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전염병으로 죽은 노인이 술을 미끼로 자신을 묻어줄 사람을 이끈다는 비합리적인 설정이지만, 전염병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홍익만이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을 두려움 없이 묻어주었다는 것은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홍익만이 민중을 위한 의원이었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홍익만 역시 정통 의원 출신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홍국신(洪國藎)으로 숙종 때 비변사 서리였다. 당대의 세도가이던 허적(許積)의 명으로 문서를 기초하는데 글자를 한 자 잘못 쓰니 허적이 지적하여 꾸짖었다. 홍국신은 붓을 던지고 그렇게 글을 잘 지을 수 있다면 왜 서리가 되었겠냐고 대드니 허적이 어쩌지 못하고 용서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홍국신은 원래 허적의 인간됨을 미워했던 것이다. 홍익만은 홍국신의 아들이다. 서리 집안 출신인 것이다. 의원과 서리는 아예 계통이 다른 집안이다. 아마도 홍익만 역시 어떤 계기로 하여 의학을 익혔을 것이다. 그가 정통적 의원 집안 출신이었다면 이런 민중의로서의 의식을 갖기 힘들었을 것이다. ■ 한의학 부정한 정약용 홍익만의 이야기에는 전염병을 직접 치료하는 부분이 없다. 하지만 다산의 경우라면 약간 다르다. 정약용은 이헌길(李獻吉)이란 사람을 다룬 ‘몽수전(蒙?傳)’이란 작품을 남기고 있다. 물론 의원으로 뛰어났던 인물이다. 이 이야기는 조금 뒤에 하기로 하고 먼저 다산의 의학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다산은 그야말로 백과전서파라 의학에도 적지않은 업적을 남기고 있다. 대충 꼽아보면 ‘의설(醫說)’ ‘종두설(種痘說)’ ‘맥론(脈論)’ 등의 논문이 있고, ‘마과회통(麻科會通)’과 같은 천연두 치료법을 다룬 저술이 있다. 이들 중 상당한 부분은 한의학을 부정하고 있다. 한의원에 가면 손목의 맥을 살피는 진맥부터 하는데, 다산은 이 진맥을 부정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맥을 가지고 오장육부를 진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약간 인용해 보면 이렇다. “하늘이 사람을 낼 적에 어찌 반드시 오장과 육부로 하여금 그 모습을 손목 위에 환히 벌여놓게 하여 사람에게 이를 진맥하게 하겠는가?” ‘육기론(六氣論)’에서는 오행설까지 부정해버렸다. 이쯤 되면 한의학의 기초가 무너지지 않겠는가? 다산의 의학은 상당 부분 서양의학의 영향을 받고 있다. ‘종두설’과 ‘마과회통’은 제너(Edward Jenner)의 종두법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근시론’에서는 종래 한의학의 음양오행으로 근시 원시를 설명하던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안구의 평돌(平突)에 의해서 근시 원시가 결정된다고 밝히고 있다. 초등학교 동창생 중에 한의사가 있다. 십 년 전에 몸이 좋지 않아 찾아갔더니 진맥을 한 뒤 약을 지어놓겠노라 하면서 앞으로 술 담배를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진하게 하다 보니 어느덧 늦은 오후다. 가야겠다고 하니 병원문을 닫는다. 같이 나가서 한잔 하잔다. “야, 너 나보고 술먹지 말랬잖아!” “의사하고 먹는 술은 괜찮아!” 어쨌거나 그날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흠뻑 취했다. 그런데 이 친구 술자리에서 다산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실학자라서 대단한 줄 알지만 의학 쪽은 형편없이 무식한 사람이라고. 다산의 위의 이야기를 보면 그 친구가 화를 낸 이유를 알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몽수전’의 주인공 이헌길은 정종(定宗)의 후손이고, 이철환(李喆煥)의 제자이다. 이철환은 성호 이익의 손자뻘이다. 그러니 성호학파에 속한 인물이고, 다산과도 관계가 아주 없지 않다. 다산은 어렸을 적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이헌길의 치료로 천연두를 순하게 앓았다. 오른쪽 눈썹 위에 가볍게 마마 흔적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누어졌다. 다산은 자신이 10세 이전에 ‘저작’한 시문을 모아서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 했으니, 마마의 흔적으로 인한 것이다. ■ 유혹에 빠진 민중의 ‘몽수전’에서 다산은 이헌길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으레 하는 말일 수 있지만 뒷날 그의 행적을 보면 빈말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생김새는 미남은 아니었던 듯 다산의 기억에 의하면 이헌길은 광대뼈가 튀어 나온 데다가 코주부였다고 한다. 이헌길은 원래 의원 가문 출신이 아니다. 그는 남몰래 ‘두진방(杜疹方)’을 보고 깊이 연구한 바 있었다. 영조 51년(1775)에 일이 있어 서울에 갔더니,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천연두가 돌았던 것이다. 이헌길은 그들이 불쌍하였으나 상중이라 어찌할 수가 없어 묵묵히 돌아섰다. 상중이라면 이런 궂은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다 홀연 깨달았다. “나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술을 가지고 있는데도 예법에 구애되어 모른 체하고 떠나간다는 것은 불인(不仁)한 것이다.” 이 장면은 흡사 ‘마태오복음’의 한 부분과 같지 않은가? 예수께서 다른 데로 가셔서 그곳 회당에 들어가셨다. 거기에 마침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어도 법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하고 넌지시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럴 때에 그 양을 끌어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그 불구자에게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다른 손과 같이 성해졌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러가서 어떻게 예수를 없애버릴까 하고 모의하였다.(‘마태오복음’ 12장) 어느 사회나 율법주의자들은 있는 법이다. 예(禮)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가, 사람이 예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헌길의 내부에 예수와 부처가 있었던 것이다. 어디 이헌길만 그러랴? 모든 사람의 속에는 예수와 부처가 있지 않은가? 찾지 않아서일 뿐이지. 이헌길이 의술을 펼치자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열흘 만에 명성이 나서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문을 메우고 길을 메울 정도였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몰려들었는지 알아보면 이렇다. 몽수가 문을 나가서 다른 집으로 가면 수많은 남녀가 앞뒤에서 옹호하였는데, 그 모여 가는 형상이 마치 벌레가 움직이는 것과 같았으므로 그가 가는 곳에는 뿌연 먼지가 하늘을 가리어, 사람들은 바라만 보고도 이몽수가 온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니 유혹이 없을 수 없다. 정약용은 ‘하루는 못된 무리의 꾐으로 어느 궁벽한 곳에 가서 문을 잠그고 자취를 감추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돈을 받고 치료를 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사방을 뒤져 그의 거처를 찾아내었다. 사태가 심각했다. “어떤 사람은 사나운 기색을 띠고 면전에서 욕을 하고 심한 자는 몽수를 때리려고 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이 애써 말린 덕에 봉변을 면할 수 있었다. 이헌길은 사과를 하고 재빨리 처방을 알려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었음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 돈이 부족해 죽는 사람들 조선시대에도 국가가 만든 공식적인 의료기관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 질병을 이겨내기란 턱도 없었다. 민중은 의료혜택에서 거의 제외돼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을 보완한 것이 바로 민중의가 아닌가 한다. 현대의 인간은 질병 치료술의 부족으로 죽는 것이 아니다. 지구 전체를 두고 생각한다면 오염된 물로 인해 죽는 숫자가 가장 많다고 한다. 제3세계의 국민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다면 사망률은 절반 이하로 떨어질 것이다. 서구사회에서는 몇 푼 하지 않는 값싼 백신이 부족해 죽는 사람이 허다하다. 무언가 잘못되어 있지 않은가?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확실한 의료기술의 혜택을 누구나 입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요즘 사람들은 의술의 부족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돈의 부족으로 죽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술은 누구를 위해 있어야 하는가? 나는 홍양호의 ‘조광일전’을 보면서 이 짤막한 전기(傳記)에서 제기한 문제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음을 본다. 사족으로 몇 마디 더. TV 드라마 ‘허준’을 보고 나는 늘 궁금했다. 유의태의 집은 마치 현대의 병원처럼 묘사됐다. 병자들이 누워 있는 곳도 있고 진료를 하는 곳도 있다. 병부잡이라 해서 병자를 인도하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예쁜 간호원도 있었다. 약을 짓는 탕약실도 따로 있었다. 또 진료할 때 의원들의 복색도 평복과는 달라 가운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조선시대 산청(山淸)과 같은 오지 시골에서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또 서울의 혜민서를 마치 병원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과연 그것은 PD의 상상력의 소산인가? 아니면 무슨 근거라도 있는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앞으로 찬찬히 따져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