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고전 小說

홍길동전 (완판본) -<1>

늘푸른 봄날처럼 2019. 2. 15. 18:41


 

 

조선(朝鮮)국 세종대왕(世宗大王) 즉위 십오 년에 홍회문 밖에 한 재상(宰相)이 있으되, 성은 홍이요, 명은 문이니, 위인이 청렴(淸廉)강직(剛直)하여 덕망(德望)이 거룩하니 당세(當世)의 영웅(英雄)이라. 일찍 용문(龍門)에 올라 벼슬이 한림(翰林)에 처하였더니 명망이 조 정의 으뜸 되매, 전하 그 덕망을 승이 여기사 벼슬을 돋우어 이조판서로 좌의정을 하이시니, 승상이 국은을 감동하여 갈충보국(竭忠報國)하니 사방에 일이 업고 도적이 없으매 시화연풍하여 나라가 태평(太平)하더라.

 

일일은 승상 난간에 비겨 잠깐 졸더니, 한풍이 길을 인도하여 한 곳에 다다르니, 청산(靑山)은 암암하고 녹수는 양양한데 세류(細柳) 천만 가지 녹음이 파사하고, 황금 같은 꾀꼬리는 춘흥(春興)을 희롱하여 양류간에 왕래(往來)하며 기화요초(琪花瑤草) 만발한데, 청학 백학이며 비취 공작이 춘광을 자랑하거늘, 승상이 경물을 구경하며 점점 들어가니, 만장절벽은 하늘에 닿았고, 굽이굽이 벽계수는 골골이 폭포되어 오운(五雲)이 어리었는데, 길이 끊어져 갈 바를 모르더니, 문득 청룡(靑龍)이 물결을 헤치고 머리를 들어 고함 하니 산학이 무너지는 듯 하더니, 그 용이 입을 벌리고 기운을 토하여 승상의 입으로 들어오거늘, 깨달으니 평생 대몽이라. 내염(內念)에 헤아리되 "필연 군자(君子)를 낳으리라." 하여, 즉시 내당에 들어가 시비를 물리치고 부인을 이끌어 취침코자 하니, 부인이 정색 왈,

 

"승상은 국지재상이라, 체위 존중하시거늘 백주에 정실에 들어와 노류장화(路柳墻花)같이 하시니 재상의 체면이 어디에 있나이까?"

 

승상이 생각하신 즉, 말씀은 당연하오나 대몽(大夢)을 허송(虛送)할까 하여 몽사(夢事)를 이르지 아니하시고 연하여 간청하시니, 부인이 옷을 떨치고 밖으로 나가시니, 승상이 무료하신 중에 부인의 도도한 고집을 애달아 무수히 차탄하시고 외당으로 나오시니, 마침 시비 춘섬이 상을 드리거늘, 좌우 고요함을 인하여 춘섬을 이끌고 원앙지낙(鴛鴦之樂)을 이루시니 적이 울화를 덜으시나 심내에 못내 한탄하시더라.

 

춘섬이 비록 천인(賤人)이나 재덕(才德)이 순직한지라, 불의에 승상의 위엄으로 친근(親近)하시니 감이 위령(違令)치 못하여 순종한 후로는 그날부터 중문 밖에 나지 아니하고 행실을 닦으니 그달부터 태기(胎氣)있어 십삭이 당하매 거처하는 방에 오색운무 영롱하며 향내 기이하더니, 혼미중에 해태하니 일개 기남자라. 삼일 후에 승상이 들어와 보시니 일변 기꺼우나 그 천생됨을 아끼시더라. 이름을 길동이라 하니라.

 

이 아이 점점 자라매 기골이 비상하여 한 말을 들으면 열 말을 알 고, 한 번 보면 모르는 것이 없더라. 일일은 승상이 길동을 데리고 내당에 들어가 부인을 대하여 탄식 왈,

 

"이 아이 비록 영웅이나 천생이라 무엇에 쓰리오. 원통하도다. 부인의 고집이여, 후회막급(後悔莫及)이로소이다."

 

부인이 그 연고를 묻자오니, 승상이 양미를 빈축하여 왈,

 

"부인이 전일에 내 말을 들으셨던들 이 아이 부인 복중에 낳을 것을 어찌 천생이 되리요."

 

인하여 몽사를 설화(說話)하시니, 부인이 추연( ) ,

 

"차역 천수오니 어찌 인력으로 하오리까."

 

세월이 여류하여 길동의 나이 팔세라. 상하(上下) 다 아니 칭찬할 이 없고 대감도 사랑하시나, 길동은 가슴의 원한이 부친(父親)을 부친(父親)이라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매 스스로 천생(賤生)됨을 자탄(自嘆)하더니, 칠월 망일에 명월을 대하여 정하에 배회하더니 추풍은 삽삽하고 기러기 우는 소리는 사람의 외로운 심사를 돕는지라. 홀로 탄식하여 왈,

 

"대장부 세상에 나매 공맹(孔孟)의 도학(道學)을 배워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대장인수를 요하(腰下)에 차고 대장단에 높이 앉아 천병만마를 지휘중에 넣어두고, 남으로 초를 치고, 북으로 중원을 정하며, 서로 촉을 쳐 사업을 이룬 후에 얼굴을 기린각에 빛내고, 이름을 후세에 유전함이 대장부의 떳떳한 일이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씨없다.' 하였으니 나를 두고 이름인가. 세상 사람이 갈관박이라도 부형을 부형이라 하되 나는 홀로 그렇지 못하니 어떤 인생으로 그러한고."

 

울울한 마음을 걷잡지 못하여 칼을 잡고 월하(月下)에 춤을 추며 장한 기운 이기지 못하더니, 이때 승상이 명월(明月)을 사랑하여 창을 열고 비겼더니, 길동의 거동을 보시고 놀래 가로되, "밤이 이미 깊었거늘 네 무슨 즐거움이 있어 이러하느냐?"

 

길동이 칼을 던지고 부복( ) 대왈,

 

"소인은 대감의 정기를 타 당당한 남자로 낳사오니 이만 즐거운 일이 없사오되, 평생(平生) 설워하옵기는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옵고, 형을 형이라 못하여 상하 노복(奴僕)이 다 천히 보고, 친척 고두도 손으로 가르쳐 아무의 천생이라 이르오니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사오리까?"

 

인하여 대성통곡(大聲痛哭)하니, 대감이 마음에 긍측(矜惻)이 여기시나 만일 그 마음을 위로하면 일로조차 방자할까 하여 꾸짖어 왈.

 

"재상의 천비 소생이 너 뿐 아니라. 자못 방자한 마음을 두지 말라. 일후(日後)에 다시 그런 말을 번거이 한 일이 있으면 눈앞에 용납치 못하리라."

 

하시니, 길동은 한갓 눈물 흘릴 뿐이라. 이윽히 엎드려있더니, 대감이 물러가라 하시거늘, 길동이 돌아와 어미를 붙들고 통곡 왈,

 

"모친(母親)은 소자와 전생연분으로 차생(此生)에 모자 되오니 구로지은( 勞之恩)을 생각하오면 호천망극하오나, 남아(男兒)가 세상에 나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위로 향화를 받들고, 부모의 양육지은(養育之恩)을 만분의 하나라도 갚을 것이거늘, 이 몸은 팔자 기박하여 천생이 되어 남의 천대를 받으니, 대장부 어찌 구구히 근본을 지키어 후회를 두리요. 이 몸이 당당히 조선국 병조판서 인수를 띠고 상장군이 되지 못할진대, 차라리 몸을 산중에 붙여 세상(世上)영욕(榮辱)을 모르고자 하오니, 복망(伏望) 모친은 자식의 사정을 살피사 아주 버린 듯이 잊고 계시면 후일에 소자 돌아와 오조지정을 이를 날 있사오니 이만 짐작하옵소서."

 

하고, 언파에 사기 도도하여 도리어 비회 없거늘. 그 모 이 거동을 보고 개유(開諭)하여 왈,

 

"재상가 천생이 너뿐 아니라.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되 어미의 간장을 이다지 상케 하느냐? 어미의 낮을 보아 아직 있으면 내두에 대감이 처결하시는 분부 없지 아니하리라."

 

길동이 가로되,

 

"부형의 천대는 고사하옵고, 노복이며 동유의 이따금 들리는 말이 골수에 박히는 일이 허다하오며, 근간에 곡산모의 행색을 보오니 승기자를 염지하여 과실없는 우리 모자를 구수같이 보아 살해 해할 뜻을 두오니 불구에 목전(目前)대환(大患)이 있을지라. 그러하오나 소자 나간 후 이라도 모친에게 후환(後患)이 미치지 아니케 하오리다."

 

그 어미 가로되.

 

"네 말이 자못 그러하나 곡산모는 인후한 사람이라. 어찌 그런 일이 있으리요?"

 

길동 왈,

 

"세상사를 측량치 못하나이다. 소자의 말을 헛되이 생각지 마시고 장래를 보옵소서."

 

하더라.

 

원래 곡산모는 곡산 기생으로 대감의 총첩이 되어 뜻이 방자하기로, 노복이라도 불합한 일이 있으면 한 번 참소(讒訴)에 사생이 관계하여 사람이 못되면 기뻐하고 승하면 시기하더니, 대감이 용몽을 얻고 길동을 낳아 사람마다 일컫고 대감이 사랑하시매, 일후 총을 앗길까 하며, 또한 대감이 이따금 희롱하시는 말씀이 "너도 길동같은 자식을 낳아 나의 모년재미를 도우라." 하시매, 가장 무료하여 하는 중에 길동의 이름이 날로 자자하므로 초낭 더욱 크게 시기하여 길동 모자를 눈의 가시같이 미워하여 해할 마음이 급하매, 흉계를 짜아내어 재물을 흩어 요괴로운 무녀 등을 불러 모의말 말하고 축일왕래하더니, 한 무녀 가로되,

 

"동대문 밖에 관상하는 계집이 있으되, 사랑의 상을 한 번 보면 평생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판단하오니, 이제 청하여 약속을 정하고 대감전에 천거하여 가중 전후사를 본 듯이 이른 후에 인하여 길동의 상을 보고 여차여차히 아뢰어 대감의 마음을 놀래면 낭자의 소회를 이룰까 하나이다."

 

초낭이 대희하여, 즉시 관상녀에계 통하여 재물로써 달래고, 대감댁 일을 낱낱이 가르치고, 길동 제거할 약속을 정한 후에 날을 기약하고 보내니라.

 

일일은 대감이 내당에 들어가 길동을 부른 후에 부인을 대하여 가로되,

 

"이 아이 비록 영웅의 기상이 있으나 어디다 쓰리요."

 

하시며 희롱하시더니, 문득 한 여자 밖으로부터 들어와 당하에 뵈거늘, 대감이 괴히 여겨 그 연고를 물으신대, 그 여자 복지 주왈.

 

"소녀는 동대문 밖에 사옵더니, 어려서 한 도인을 만나 사람의 상보는 법을 배운 바 두루 다니며 관상차로 만호장안을 편람하옵고, 대감댁 만복을 높이 듣고 천한 재주를 시험코자 왔나이다."

 

대감이 어찌 요괴로운 무녀를 대하여 문답(問答)이 있으리요마는 길동을 희롱하시던 끝인 고로 웃으시며 왈,

 

"네 아무렇거나 가까이 올라 나의 평생을 확론하라."

 

하시니, 관상녀 국궁하고 당에 올라 먼저 대감의 상을 살핀 후에 이왕지사를 역역히 아뢰며 내두사를 보는 듯이 논단하니, 호발도 대감의 마음에 위월한 마디 없는지라. 대감이 크게 칭찬하시고 연하여 가중 사람의 상을 의논할새, 낱낱이 본 듯이 평론하여 한 말도 허망한 곳이 없는지라. 대감과 부인이며 좌중제인이 대혹하여 신인이라 일컫터라. 끝으로 길동의 상을 의논할새, 크게 칭찬 왈,

 

"소녀가 열읍에 주류하며 천만인을 보았으되 공자의 상같은 이는 처음이려니와 알지 못게라, 부인의 기출이 아닌가 하나이다."

 

대감이 속이지 못하여 왈,

 

"그는 그러하거니와 사람마다 길흥영욕이 각각 때있나니 이 아이 상을 각별 논단하라."

 

하니, 상녀가 이윽히 보다가 거짓 놀라는 체 하거늘, 괴히 여겨 그 연고를 물으신대 함구하고 말이 없거늘, 대감이 가로되,

 

"길흉을 호발도 기이지 말고 보이는 대로 의논하여 나의 의혹(疑惑)이 없게 하라."

 

관상녀 가로되,

 

"이 말씀을 바로 아뢰면 대감의 마음을 놀래일까 하나이다."

 

대감 왈,

 

"옛날 곽분양같은 사람도 길한 때 있고 흉한 때있었으니 무슨 여러 말이 있느냐? 상법 보이는 대로 기이 말라."

 

하시니. 관상터 마지 못하혀 길동을 치운 후에 그윽히 아뢰되,

 

"공자의 내두사는 여러 말씀 버리옵고 성즉 군왕지상이요, 패즉 측량치 못할 환이 있나이다."

 

한대, 대감이 크계 놀래어 이윽히 진정한 후에 상녀를 후이 상급하시고 가로되,

 

"이같은 말을 삼가 발구치 말라."

 

엄히 분부하시고, ,

 

"제 늙도록 출입치 못하게 하리라."

 

하시니, 상녀 왈,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디 씨 있으리까?"

 

대감이 누누당부하시니, 관상녀 공수 수명하고 가니라.

 

대감이 이 말을 들으신 후로 내념에 크게 근심하사 일념에 생각하시되,

 

"이놈이 본래 범상한 놈이 아니요, 또 천생됨을 자탄하여 만일 범람한 마음을 먹으면 누대 갈충보국(竭忠報國)하던 일이 쓸데없고 대화 일문에 미치리니 미리 저를 없애어 가화를 덜고자 하나 인정에 차마 못할 바라."

 

생각이 이러한즉 선처할 도리없어 일념이 병이 되어 식불감 침불안하시는지라. 초낭이 기색을 살핀 후에 승간하여 여쭈오되,

 

"길동이 관상년의 말씀같이 왕기 있어 만일 범람한 일이 있사오면 가화 장차 측량치 못할지라. 어리석은 소견은 적은 혐의를 생각지 마시고 큰 일을 생각하여 저를 미리 없이 함만 같지 못할까 하나이다."

 

대감이 대책 왈,

 

"이 말을 경솥히 할 바가 아니거늘, 네 어찌 입을 지키지 못하느냐? 도시 내 집 가운을 네 알 바가 아니라."

 

하시니, 초낭이 황공하여 다시 말씀을 못하고, 내당에 들어아 부인과 대감의 장자를 대하여 여쭈오되,

 

"대감이 관상녀의 말씀을 들으신 후로 사념에 선처하실 도리 없사와 침식이 불안하시더니 일념의 병환이 되시기로 소인이 일전에 여차여차한 말씀을 아뢰온즉 꾸중이 났는 고로 다시 여쭙지 못하였거니와, 소인이 대감의 마음을 취택하온즉 대감께서도 저를 미리 없애고자 하시되 차바 거처치 못하오니, 미련한 소견으로는 선처할 모책이 길동을 먼저 없앤 후에 대감께 아뢰면 이미 저질러진 일이라 대감께서도 어찌 할 수 업사와 마음을 아주 잊을까 하옵나이다."

 

부인이 빈축 왈,

 

"일은 그러하거니와 인정천리에 차마 할 바가 아니라."

 

하시니, 초낭이 다시 여쭈오되,

 

"이 일이 여러 가지 관계하오니, 하나는 국가를 위함이요, 둘은 대감의 환후를 위함이요, 셋은 홍씨 일문을 위함이오니, 어찌 적은 사정으로 우유부단(優柔不斷)하여 여러 가지 큰 일을 생각지 아니하시다가 후회막급(後悔莫及)이 되오면 어찌 하오리까?"

 

하며, 만단으로 부인과 대감의 장자를 달래니, 마지 못하여 허락하시거늘, 초낭이 암회하여 나와 특자라 하는 자객을 청하여 수말을 다 전하고 은자를 많이 주어 오늘 밤에 길동을 해하라 약속을 정하고, 다시 내당에 들어가 부인전에 수말을 여쭈오니, 부인이 들으시고 발을 구르시며 못내 차석(嗟惜)하시더라.

 

이때의 길동은 나이 십일세라. 기골이 장대하고, 총맹이 절륜하며, 시서백가어를 무불통지하나, 대감 분부에 바깥 출입을 막으시매, 홀로 별당에 처하여 손오의 병서를 통리하여 귀신도 측량치 못하는 술법이며 천지조화를 품어 풍운을 임의로 부리며, 육정육갑이 신장을 부려 신출귀몰(神出鬼沒)지술을 통달(通達)하니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더라. 이날 밤 삼경이 된 후에 장차 서안을 물리치고 취침하려 하더니 문득 창 밖에서 까마귀 세 번 울고 서로 날아가거늘, 마음에 놀래 해혹(解惑)하니, "까마귀 세 번 '객자와 객자와' 하고 서로 날아가니 분명 자객이 오는지라. 어떤 사람이 나를 해코자 하는고? 암커나 방신지계를 하니라." 하고, 방중에 팔진을 치고 각각 방위를 바꾸어, 남방의 이허중은 북방의 감중련에 옮기고, 동방 진하련은 서방 태상절에 옮기고, 건방의 건삼련은 손방 손하절에 옮기고, 곤방의 곤삼절은 간방 간상련에 옮겨, 그 가운데 풍운을 넣어 조화무궁페 벌리고 때를 기다리니다.

 

이때에 특자 비수를 들고 길동 거처하는 별당에 가서 몸을 숨기고 그 잠들기를 기다리더니, 난데없는 까마귀 창 밖에 와 울고 가거늘 마음에 크게 의심하여 왈,

 

"이 짐승이 무슨 앎이 있어 천기를 누설하는고? 길동은 실로 범상한 사람이 아니로다. 필연 타일에 크게 쓰리라."

 

하고, 돌아가고자 하다가 은자에의 욕심이 몸을 생각치 못하여 이시한후에 몸을 날려 방중에 들어가니, 길동은 간 데 없고, 일진광풍(一陣狂風)이 일어나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천지(天地) 진동(震動)하며 운무 자욱하여 동서(東西)를 분별치 못하며 좌우를 살펴보니 천봉(千峰)만학(萬壑)이 중중(重重)첩첩(疊疊)하고, 대해 창일하여 정신을 수습치 못하는지라. 특자 내념에 헤아리되,

 

"내 아까 분명 방중에 들어왔거늘 산은 어인 산이며, 물은 어인 물인고?"

 

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더니, 문득 옥적(玉笛)소리 들리거늘, 살펴보니 청의(靑衣)동자(童子) 백학을 타고 공중에 다니며 불러 왈,

 

"너는 어떠한 사람이관대 이 깊은 밤에 비수(匕首)를 들고 누구를 해코자 하느냐?"

 

특자 대왈,

 

"네 분명 길동이로다. 나는 너의 부형의 명령을 받아 너를 취하러 왔노라."

 

하고 비수를 들어 던지니, 문득 길동은 간 데 없고, 음풍이 대작하고 벽력이 진동하며, 중천에 살기 뿐이로다. 중심에 대겁하여 칼을 찾으며 왈,

 

"내 남의 재물을 욕심하다가 사지(死地)에 빠졌으니 수원수구(誰怨誰咎)하리요."

 

하며, 길게 탄식하더니, 문득 이윽고 길동이 비수를 들고 공중에서 외쳐 왈,

 

"필부는 들으라. 네 재물을 탐하여 무죄한 인명을 살해코자 하니 이제 너를 살려두면 일후에 무죄한 사람이 허다히 상할지라. 어찌 살려 보내리요."

 

한대, 특자 애걸 왈,

 

"과연 소인의 죄 아니오라 공잣댁 초낭자의 소위오니, 바라옵건데 가련한 인명을 구제하셔서 일후에 개과하게 하옵소서."

 

길동이 더욱 분을 이기지 못하여 왈,

 

"너의 약관이 하늘에 사무쳐 오늘날 나의 손을 빌어 악한 유를 없애게 함이라."

 

하고, 언파에 특자의 목을 쳐버리고, 신장을 호령하여 동대문 밖의 상녀를 잡아다가 수죄하여 왈,

 

"네 요망한 년으로 재상가에 출입하며 인명을 상해하니 네 죄를 네 아느냐?"

 

관상녀 제 집에서 자다가 풍운에 쌓이어 호호탕탕이 아무 데로 가는줄 모르더니, 문득 길동의 꾸짖는 소리를 듣고 애걸 왈,

 

"이는 다 소녀의 죄가 아니오라 초낭자의 가르침이오니 바라건대 인후하신 마음에 죄를 관서하옵소서."

 

하거늘, 길동이 가로되,

 

"초낭자는 나의 의모라 의논치 못하려니와 너같은 악종을 내 어찌 살려 두리요. 후 사람을 징계하리라."

 

하고. 칼을 들어 머리를 베어 특자외 주검한테 던지고, 분한 마음을 걷잡지 못하여 바로 대감전에 나아가 이 변괴를 아뢰고 초낭을 베려하다가 홀연 생각 왈, "영인부아언정 무아부인이라." 하고, "내 일시 분으로 어찌 인륜(人倫)을 끊으리요." 하고, 바로 대감 침소에 나아가 정하에 엎드리더니, 이때 대감이 잠을 깨어 문 밖에 인적 있음을 괴히 여겨 창을 열고 보시니, 길동이 정하에 엎드렸거늘, 분부 왈,

 

"이제 밤이 이미 깊었거늘 네 어찌 자지 아니하고 무슨 연고로 이러하느냐?"

 

길동이 체읍(涕泣) 대왈,

 

"가내에 흉한 변이 있사와 목숨을 도망하여 나가오니 대감전에 하직차로 왔나이다."

 

대감이 상량하시되, "필연 무슨 곡절이 있도다." 하시고 가로되,

 

"무슨 일인지 날이 새면 알려니와 급히 돌아가 자고 분부를 기다리라."

 

하시기, 길동이 복지 주왈,

 

"소인이 이제로 집을 떠나가오니 대감 체후만복하옵소서. 소인이 다시 뵈올 기약이 망연하오이다."

 

대감이 헤아리되, 길동은 범류 아니라 만류하여도 듣지 아니 할 줄 짐작하시고 가로되,

 

"네 이제 집을 떠나면 어디로 가느냐?"

 

길동이 부복 주왈,

 

"목숨을 도망하여 천지로 집을 삼고 나가오니 어찌 정처 있사오리까마는 평생 원한이 가슴에 맺혀 설원( )할 날이 없사오니 더욱 설워하나이다."

 

하거늘. 대감이 위로 왈,

 

"오늘로부터 네 원을 풀어주는 것이니 네 나가 사방에 주류할지라도 부디 죄를 지어 부형에게 환을 끼치지 말고 쉬이 돌아와 나의 마음을 위로하라. 여러 말 아니하니 부디 겸염하여라."

 

하시니. 길동이 일어나 다시 절하고 주왈,

 

"부친이 오늘날 적년소원을 풀어 주시니 이제 죽어도 한이 없사올지라. 황공무지오니 복망 아버님은 만수무강하소서."

 

하며, 인하여 하직을 구하고 나와 바로 그 모친 침실에 들어가 어미를 대하여 가로되,

 

"소자가 이제 목숨을 도망하여 집을 떠나오니 모친은 불효자(不孝子)를 생각지 마시고 계시오면 소자 돌아와 뵈올 날이 있사오니 달리 염려 마옵시고 삼가 조심하여 천금귀체를 보중하옵소서."

 

하고, 초낭의 작변하던 일을 종두지미하여 낱낱이 설화하니, 그 어미 그 변괴를 자세히 들은 후에 길동을 만류치 못할 줄 알고 인하여 탄식 왈,

 

"네 이제 나가 잠깐 화를 피하고 어미 낯을 보아 쉬이 돌아와 나로 하여금 실망하는 병이 없게 하라."

 

하며 못내 설워하니, 길동이 무수히 위로하며 눈물을 거두어 하직하고 문 밖에 나서니 광대한 천지간에 한 몸이 용납할 곳이 없는지라. 탄식으로 정처없이 가니라.

 

이때에 부인이 자객을 길동에게 보낸 줄 아시고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무수히 탄식하시니, 장자 길현이 위로 왈,

 

"소자도 능히 마지 못하온 일이오니 저 죽은 후에라도 어찌 한이 없사오리까? 제 어미를 더욱 후대하여 일생을 편케 하옵고, 제의 시신을 후장하여 야처한 마음을 만분지일이나 덜을까 하나이다."

 

하고 밤을 지내더, 이튿날 평명에 초낭이 별당에 날이 밝도록 소식 없음을 괴히 여겨 사람을 보내 탐지하니, 길동은 간데 없고 목 없는 주검 둘이 방중에 거꾸러져 있거늘, 자세히 보니 특자와 관상녀라. 초낭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래어 급히 내당에 들외가 이 사연을 부인께 고하니, 부인이 대경(大驚)하여 장자 길현을 볼러 길동을 찾으되 종시 거처를 알지 못하는지라. 대감을 청하여 수말을 아뢰며 죄를 청하니, 대감이 대책왈,

 

"가내에 이런 변고를 지으니 화 장차 무궁할지라. 간밤에 길동이 집을 떠나노라 하고 하직을 고하기로 무슨 일인지 몰랐더니 원래 이일이 있음을 어찌 알았으리요."

 

하고, 초낭을 대책 왈,

 

"네 앞 순에 괴이한 말을 자아내기로 꾸짖어 물리치고 그같은 말을 다시 내지 말라 하였거늘, 네 종시 마음을 고치지 아니하고 가내에 있어 이렇듯이 변을 지으니 죄를 의논컨대 죽기를 면치 못하리라. 어찌 내 안전에 두고 보리요."

 

하시고, 노복을 불러 두 주검을 남이 모르게 치우고 마음 둘 곳을 몰라 좌불안석(坐不安席)하시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