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 도화선 (桃花扇)
319. 도화선 (桃花扇) / 저작자 공상임(孔尙任)
1699년에 만들어진 책으로, 정의감에 넘치는 선비 후방역(侯方域)과 아름다운 기생 향군(香君)의 비련과 함께 저물어 가는 명나라의 모습을 그린 이야기이다. 전 40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 공상임(1648~1718)은 자가 빙지(聘之)이고,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서 태어났다. 공자의 64세손으로 어릴 적부터 감수성이 풍부했음을 짐작게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공상임이 아직 강보에 싸여 있을 때, 이웃 사람이 어미 돼지를 장에 내다 팔려고 묶으려 했다. 그런데 어미 돼지는 새끼에게 젖을 물린 채, 주인이 아무리 때려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공상임은 들고 있던 과일을 버리고는 “으앙” 하고 울었다. 그의 울음소리가 이웃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돼지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때 공상임의 아버지는 자식의 등을 어루만지며, 이웃 사람에게 장차 이 애가 크면 천하를 위해 큰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문학가에게 필수적인 뛰어난 감수성의 소유자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아버지의 예견은 맞아떨어지지 않은 것 같다.
그가 세상에 나온 것은 36세 때로, 강희(康熙) 황제가 공자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일개 국자감 학생에 지나지 않은 그를 발탁해 국자감 박사로 임명한 데서 시작된다.
그 뒤로 각지를 전전했는데, 그때 명나라의 유민들을 만나 감동을 받은 것이 뒷날 『도화선』을 짓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명의 망국을 슬퍼하는 이 희곡을 청나라 황제가 좋아할 리 없었다. 조정의 요구로 작품을 바친 그해, 그는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석문산(石門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길로 시골에 틀어박혀 71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 작품은 대성공을 거두어 많은 ‘고신유로(故臣遺老)’들의 눈물을 자아냈으며, 오늘날에도 현대극이나 소설로 개작될 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다.
■ 명나라가 저물어 갈 무렵,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부하 완대월(阮大鉞)이 제례에 나갔다가 복사[復社, 문학결사(文學結社)]의 오응기(吳應箕) 일당에게 욕을 얻어먹었다. 분개한 완대월은 친구인 양문총에게 그런 사실을 전했다. 복사의 일원이었던 양문총은 문재(文才)가 뛰어난 후방역에게 미녀를 제공해 그들을 잘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이전에 양문총은 기생 이정려(李貞麗)의 양녀에게 향군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적이 있어 향군을 주선키로 했다.
어느 날, 후방역은 유치정(柳致亭)과 함께 정려의 집에 놀러 갔다가 거기서 향군을 보고 한눈에 반해 버렸으나, 여행 중인 몸이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때 양문총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자신이 모두 제공하겠다고 나섰고, 후방역은 기꺼이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 후방역은 성대하게 향군의 머리를 올려 주었고, 그 자리에서 하얀 부채에 정표의 시를 써서 주었다. 다음 날 양문총은 후방역에게 말했다.
“사실 이 비용은 모두 완대월이 제공했습니다. 그는 복사 사람들과 잘 지내기를 바랍니다.”
이에 후방역이 그렇게 해 주겠다고 승낙하려 하는데, 향군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완대월은 부녀자들조차 경멸하는 소인이 아니던가요? 낭군께서 승낙하시려는 것도 그 때문인가요?”
그러고는 장식품과 옷을 모두 돌려주려고 했다. 이에 후방역은 양문총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말했다.
“부녀자에게 비웃음을 사고 싶지 않네.”
한편, 무창(武昌)을 지키고 있던 원수(元帥) 좌량옥(左良玉)은 군량이 다 떨어져 병사들이 동요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 할 형편이었다. 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 혹시 그가 남경을 빼앗으려 할지 모른다고 겁을 먹고 있었다. 후방역은 곧바로 좌량옥에게 철군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편지를 써서, 경정(敬亭)을 사자로 보내 전하게 했다. 경정이 뛰어난 언설로 설득해 좌량옥은 남경으로 올라갈 생각을 거두었다. 그러나 후방역에게 원한을 품은 완대월은 그 편지를 구실로 후방역이 모반을 획책한다는 혐의를 두어 체포하려 했다. 양문총의 연락을 받고 위험을 알아챈 후방역은 사랑하는 향군에게 재회를 약속하고 급히 몸을 숨겼다.
그 무렵 숭정(崇禎) 황제가 붕어하자, 간신 마사영(馬士英)은 완대월과 짜고 복왕(福王) 옹립을 책동해 병권을 쥔 병부상서 사가법(史可法)에게 협력을 구했다.
후방역은 마침 그때 사가법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는데, 복왕의 3가지 대죄(大罪)와 그를 옹립해서는 안 되는 5가지 이유를 들어 사가법을 설득했다. 이에 사가법은 마사영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마사영 일당은 문서를 날조해 억지로 복왕을 홍광(弘光) 황제로 옹립했다. 마사영은 그 공으로 재상이 되었고, 사가법은 미움을 받아 강북의 태수로 좌천되었다. 충의로운 사가법은 그래도 불만을 품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다했지만, 그의 부하인 고걸(高傑) 장군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형세가 불리해지자 협상을 하려 했다. 후방역은 멀리 황하를 지키는 허정국(許定國)의 원조를 요청하는 것으로 죄를 면하려 했으나, 사가법은 고걸이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염려해 후방역을 감독으로 삼아 같이 가도록 했다.
한편, 도성에서는 마사영 일파가 전횡을 일삼고 있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향군의 소문이 화제로 올랐다. 후방역에게 지조를 지키기 위해 벼락출세한 전앙(田仰)에게 수청 들기를 거부했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난 마사영은 억지로라도 향군을 전앙에게 데리고 가라고 명령했다. 걱정이 된 양문총은 향군의 집으로 갔다. 억지로 끌려간 향군은 후방역에게 받은 부채로 몸을 지키며 저항하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바람에 피가 부채에 튀었다.
놀란 양문총은 자기 대신 이정려를 내세워 소란을 수습했다. 그리하여 향군은 가까스로 난을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홀로 외롭게 살아가던 향군에게 어느 날 양문총이 찾아왔다. 자세히 보니 부채에 튄 핏자국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림 솜씨가 뛰어난 양문총은 부채에 가지를 그려 넣어 그 핏자국을 복숭아꽃으로 만들었다.
“제 모습을 그려 주셨군요.”
향군은 그 그림을 보고 자신의 비운을 탄식했다. 향군의 가련한 처지를 동정한 양문총은 향군의 노래 스승인 소곤생(蘇崑生)에게 후방역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저의 슬픔과 고통은 모두 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향군은 이렇게 말하고는 소곤생에게 글 대신에 도화선을 맡겼다.
한편, 후방역은 고걸의 포악한 행동을 참지 못해 그 곁을 떠났다. 그날 밤 허정국은 고걸을 죽이고 청나라에 항복함으로써 명나라의 멸망에 힘을 보탰다. 후방역은 돌아오는 길에 소곤생을 만나 도화선을 건네받고 서둘러 남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향군은 사라지고 없었다. 향군은 잡혀가 궁중의 기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후방역은 복사의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나가던 완대월의 눈에 띄는 바람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런 처사를 지켜보던 옥리 장미(張薇)는 출가해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충신 좌량옥은 태자를 모시고 군사를 일으켰으나, 뜻하지 않은 역적의 누명을 쓰고 피를 토하며 죽었다. 도성의 홍광 황제는 도망치다가 역신들에게 잡혀 북조(北朝)로 호송되었다. 마사영과 완대월 일당은 죽고, 양문총은 겨우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사가법은 혼자 양주(揚州)를 지키다가 “나는 나라를 망하게 내버려 둔 불충한 신하이다. 의관을 지닐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의관을 벗은 뒤 강물에 몸을 던졌다.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향군과 후방역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쳐 은자로 지내는 장미의 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장미는 기뻐하는 두 사람에게 “나라가 망하고, 가문과 황제도 없는 이 지경에 처했는데도 남녀의 정을 끊지 못하는가?” 하고 도화선을 찢으며 나무랐다. 그 순간 깨달음을 얻은 두 사람은 출가해 각자 다른 산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