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누가 왕을 죽였는가 2. 제14대 선조 - <5> 늘푸른 봄날처럼 2019. 2. 11. 01:45 ■ 제14대 선조 ■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인물을 인목대비였다. 반정에 성공한 능양군과 반정군이 경운궁의 인목대비를 찾아가자 대비는 맨 처음 이렇게 물었다. "역괴 부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모두 궐하에 있습니다." "그는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다 .내가 친히 그들의 목을 잘라 망령에게 제사하고 싶다. 10여 년 동안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 같은 날을 기다린 것이다. 쾌히 원수를 갚고 싶다." 이는 폐모가 되어 서궁에 유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친정아버지와 형제들은 물론이고 선왕의 유일한 적자인 아들 영창대군을 잃은 한 여인의 한이 표출된 것이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 만 서른아홉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반정의 주역들은 대비의 복수에 동의하지 않았다. "무도한 임금으로는 걸의 주왕만한 이가 없었으나 탕의 무왕은 이를 추방했을 뿐입니다. 지금 내리신 하교는 신들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목대비도 물러서지 않았다. "부모의 원수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는 한 나라에 같이 살 수 없다. 역괴가 스스로 모자의 도리를 끊었으니 내게는 반드시 갚아야할 원수만이 있고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이때 만류하고 나선 인물이 이덕형이다. "옛날에 중종께서 반정하시고 폐왕을 우대하여 천수를 마치게 하였는데 이것은 본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목대비에게 광해군은 철천지원수였다. 반정 주역들이 광해군의 주륙에 동의하지 않자 인목대비는 드디어 광해군이 선조를 시해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경의 말이 옳다. 역괴는 부왕을 시해하고 형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을 간통하고 그 서모를 죽였으며, 그 적모를 유폐하여 온갖 악행를 다 하였다. 어찌 연산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인목대비는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다. 동부승지 민성징이 그 내용을 되물었다. "지금 하신 하교는 외간에서 일찍이 듣지 못한 일입니다. 시해하였다는 말은 더욱 듣지 못한 사실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데 몽둥이로 하든 칼로 하든 무엇이 다르겠는가. 선왕께서 병들어 크게 위독하였는데 고의로 충격을 주어 끝내 돌아가시게 하였으니 이것이 시해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여기에서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은 큰 혼선을 겪는다. 지금껏 서인들이 퍼뜨린 선조 독살설의 줄기는 찹쌀밥에 의한 독살이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엉뚱하게도 "고의로 충격을 주었다"는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이처럼 선조의 독살 여부에 대해 가장 잘 알 만한 위치애 있었던 인목대비가 '찹쌀밥' 대신 이런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은 선조 독살설이 두서 없이 전개되었다는 한 반증이다. 선조의 임종 현장에는 약방 도제조 등 어의들이 입시해 있었으므로 '고의적인 충격'등은 상상할 수 없는 일로 복수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아 하겠다. 그러나 광해군이 선조를 시해했다는 인목대비의 이 말은 서인들로서는 호재였다. 서인들은 대비의 이 말을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중요한 명분의 하나로 삼아 전파시켰고, 때론 <남계집>에서처럼 문집에도 남겼다.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숙종 때 일부 기간을 제외하고는 서인이 계속 집권함에 따라, 선조 독살설은 하나의 사실처럼 굳어졌다.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정권은 자신들이 왜 광해군을 폐출했는지를 내외에 설명해야 했다. 당시 명나라는 중립외교를 취했던 광해군이 폐출된 것을 환영했으므로 명나라의 책봉을 받는 것은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국내 사정은 달랐다. 시대착오적인 중화사상을 가지고 반정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 물증이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제기하지는 못하고, 비공식적이나마 조직적으로 선조 독살설을 유포했던 것이다. 만약 선조 독살설이 사실이라면 서인정권이 반정 후에도 이를 공식화시키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