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는 현재 약 286개의 성,姓 (2000년 통계)이 있으며, 본(本)을 필수 요소로 한다.
한국의 성씨는 삼국 시대 이후 중국의 성씨 제도를 차용한 것이 많고,
고려 시대부터 족보를 만들고 귀족 계급의 성씨 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씨는 대부분 한 음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음절로 된 복성(複姓)도 있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성씨가 10만이 넘는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에서는 성씨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김(金)씨, 이(李)씨, 박(朴)씨인 사람이
전체 인구의 약 45%를 차지하여 특정 성씨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매우 높다
■ 장수 황씨(長水 黃氏)
전라북도 장수군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황경(黃瓊)은 신라 경순왕 때 시중(侍中)을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선계가 실전되어,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 황석부(黃石富)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중시조 황석부는 조선 세종 때 영의정에 오른 황희(黃喜)의 증조부로
사후에 호조참의로 추증되었다
◎관향 -전라북도 장수군
◎시조 -황경 (黃瓊)
◎주요 중시조 -황석부 (黃石富)
◎주요 집성촌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면 덕산리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유평리-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면 황교리
◎주요 인물 -황군서, 황희, 황치신, 황수신, 황사효, 황여헌, 황정욱, 황윤길, 황진, 황대중,
황경원, 황현, 황의필 황의돈, 황낙주, 황윤석, 황승민, 황인용, 황진하, 황인자
◎인구(2000년) -146,575명 (54위)
●역사
장수 황씨의 시조는 신라 말기 인물인 황경(黃瓊)이다.
1723년(景宗 癸卯)에 편찬된 《장수황씨세보(長水黃氏世譜)》에 '시조는 경(瓊)이며
신라(新羅)에서 벼슬하여 지위가 시중(侍中)에 이르렀고,배(配)는 경주김씨 (慶州金氏)니
경순왕(敬順王) 부(溥)의 딸이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후일 대제학(大提學)과 영의정
(領議政)을 지낸 조인영(趙寅永)도 1831년 운계(雲溪) 황신구(黃信龜)의 비문에 ‘신라(新羅)
상주(尙主 = 駙馬) 경(瓊)이 비로소 득성(得姓)하였다’라 하여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조선 후기 정시술(丁時述)이 저술한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라는 문헌에 의하면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무신(武臣) 구대림(丘大林)과 문신(文臣) 황락(黃洛)이 교지국
(交趾國)에 사신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평해(平海)에 표류하였는 바 황락이 그곳에 거주하여
황씨(黃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라 되어있고, 그 차자(次子) 을고(乙古)가 장수황씨의
조상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헌(文獻)은 모화사상(慕華思想)이 극에 달했던
조선 후기(後期)의 저술로 추정할 뿐 작자와 연대가 모두 미상이고 신라시대 ‘군(君)’이라는
벼슬에 봉한 것도 확인되지 않으며, 내용이 황당하여 장수 황씨는 대부분 이 전설을 부인하고 있다.
시조 경(瓊)으로부터 8세손까지의 기록은 없다. 9세손 황공유(黃公有)는 고려 명종 때에
전중감(殿中監)으로 무신 이의방(李義方)의 난을 피해 고향인 장수로 돌아왔다가
현관들의 물색을 피해서 가솔을 거느리고 남원으로 옮겨 자손이 세거하였는데
지금의 남원 광한루가 옛 집터라고 한다.15세손 황감평(黃鑑平)이 태학에 유학하여 재명으로
날렸으나 두번 과거에 등과하지 못하자 고향으로 낙향하여 서당을 짓고
문적으로써 스스로 즐겨 지내니 학도들이 사사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18세손까지 중간 계대를 고증할 수 없어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 황석부(黃石富)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중시조 황석부는 세종 때 18년 동안 영의정에 재위한
황희(黃喜)의 증조부로서 사후 호조참의로 추증되었다. 그 후 후손들은 황석부를
기세조로 하고 장수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영의정 황희 정승의 장남 황치신
(黃致身)은 우의정에 오르고, 셋째 아들 황수신(黃守身)도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장수 황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4명을 배출하였다.
●본관
여지승람 전라도 장수현 성씨조(輿地勝覽 全羅道 長水縣 姓氏條)에 본현 황씨(本縣黃氏)라
되어있으며, 경(瓊)의 9세손(世孫) 공유(公有)가 고려 명종(明宗)때 무신(武臣)의 변(變을)
피하여 고향(故鄕) 장수(長水)로 돌아왔고, 다시 지방 관헌을 피하여 남원(南原)으로 옮겼다.
이어 후손이 이곳에 살았으니 광한루(廣寒樓)가 그 구기(舊基)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장수(長水)는 본래 백제의 우평(雨坪)이었는데, 신라때 고택(高澤)으로 고쳐 장계군
(長溪郡)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남원부(南原府)에 속하게 하였다‘
라고 같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고려 명종(明宗) 이전부터 장수(長水)를 관향(貫鄕)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수(長水)는 전라북도에 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우평현(雨平縣)이었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고택현(高澤縣)으로 개칭하여 벽계군(壁溪郡: 長溪縣)에 속하였다.
고려 초에 장수현으로 이름을 바꾸고, 1018년(현종 9)에 남원부(南原府)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391년(공양왕 3)에 장계감무(長溪監務)가 이 지역을 함께 다스렸다.
1392년(태조 1)에 장수현을 복구하여 장계현을 병합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남원부 장수군(長水郡)이 되었고, 1896년 전라북도
장수군이 되었다. 1979년에 장수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분파
호안공파(胡安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열성공파(烈成公派)
●인물
황군서(黃君瑞, 1328년 - 1402년 3월 22일)는 고려시대 말기와 조선시대 초기의 무신,
정치인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조선시대에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방촌 황희는
그의 차남이었다. 영의정을 지낸 황수신과 황치신의 할아버지이다.
고려때 판강릉대도호부사를 지냈고, 조선에 와서도 충주절제사와 선위사로 활동했다.
사후 서자 황희의 출세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다. 전라북도 출신
황희(黃喜, 1363년 3월 8일 (음력 2월 22일) ~ 1452년 2월 28일 (음력 2월 8일) )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재상이다. 고려 개경(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초명은 수로(壽老),자(字)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시호는 익성(翼成)이다. 본관은 장수(長水)다.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가
문과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서, 재상 등을 지내며 맹사성 등과 함께 세종대왕을 잘 보필하였다.
고려에서 음서(蔭敍)로 출사하여 복안궁 녹사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1389년(창왕 1년)
별장으로 과거에 급제했으나, 1392년(공양왕 3년) 고려 멸망 후 은거하였다. 그러나 동료들과
이성계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성균관학관으로 출사하여 조선에서 형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사후 1455년(세조 1년) 증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성격이 원만하여 존경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났고 관료생활 중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
사후 청백리로 규정되어 일반적으로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뇌물수수 , 간통, 부패 등
좋지 않은 물의를 빚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세종대왕의 신임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복직했다.여러가지 비리와 이권 청탁의 의혹이 있었음에도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임했다.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세종대왕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의 한사람으로서 세종대왕
치세기간 중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였다.한편에서는 그의 청렴성은 청빈함으로 과장되었으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조선의 양반 계층에 의해 의도적으로 미화, 신격화되었고,
이후 양반집단 기득권 유지 위해 '황희 신화'를 창조하고 확대했다는 주장이 있다.
황치신(黃致身, 1397년 ~ 1484년)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처음의 이름은 동(董)이었다가 뒤에 치신으로 개명하였으며 자는 맹충(孟忠)이고 시호는
호안(胡安)이다. 정승 황희의 아들이다. 조선왕조 역사에서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
정승이 된 몇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황수신(黃守身, 1407년 ∼ 1467년)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정치인으로 자는 수효(秀孝) 또는 계효(季孝)이고 호 나부(懦夫)·췌부(侁夫), 시호는
열성(烈成). 재상 황희의 아들이며 판서 황치신의 아우이다. 계유정난을 지지하여
좌익공신에 녹선되었고 세조의 명을 받아《법화경》《묘법연화경》의 언해를 주관하였고,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의 찬진을 감독하였다. .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2대에 걸쳐 영의정이 되었으며, 남원부원군에 봉군되었다.
과거 시험을 거치지 않고도 정승을 지낸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황여헌(黃汝獻, 1486년 ~ ?)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자는 헌지, 호는 유촌, 본관은 장수이다.
황희의 5세손이며,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울산군수 등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는데, 소세양·정사룡 등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당시 이름이 높았다. 그가 지은 <죽지사>는
명나라 사람들에게까지 격찬을 받았다. 저서로 <유촌집>이 있다.
황윤길(黃允吉, 1536년 ~ 몰년 미상)은 조선 중기의 문신, 외교관, 정치인이다.
자는 길재, 호는 우송당, 본관은 장수이다. 당색으로는 서인이다. 1590년 선조 때 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변란의 가능성을 보고했지만, 채택되지 못했다.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견하여 유명하여졌다. 1591년(선조 24) 특별히 광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황진(黃進, 1550년 ~ 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장수, 자는 명보(明甫),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고조부는 황희(喜)이고, 증조부는 지중추부사 황사효(事孝),
할아버지는 부사직 황개(塏), 아버지는 증좌의정 황윤공(允恭)이며, 어머니는 남양 방씨
(房氏)로 봉사 방응성(房應星)의 딸이다
황의필(黃義弼, 1866년 9월 2일 ~ 1951년 2월 9일)은 대한제국의 언론인 겸 일제 강점기의
관료로, 자는 재경(載卿), 호는 운재(橒齊), 본관은 장수이며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황낙주(黃珞周, 1928년 3월 22일~ 2002년 12월 12일)는 국회의장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8대, 제9대, 제10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황인용(黃仁龍, 1940년 1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방송인이다. 본관은 장수.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
순화군(선조의 서자)정비 군부인 장수 황씨
●집성촌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 남원시 사매면 수월리 - 남원시 대산면 대곡리
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 예촌리 -전라북도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면 덕산리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가신2리
●인구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장수황씨는
1985년에는 총 29,971가구 126,746명,
2000년에는 총 45,567가구 146,57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