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조선의 뒷마당

2. 劍契와 왈자-<3>

늘푸른 봄날처럼 2019. 2. 5. 16:03



        신윤복 / 유곽쟁웅 - 술집에서 싸우다

■ 재물을 분토(糞土)처럼 쓰는 사람들   
왈자는 조선후기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존재인가. 
‘서광문전후’의 광문과 표철주의 이야기를 다시 보자. 
광문이 다시 표철주에게 말하기를, 
“너도 이제 늙었구나. 어떻게 먹고 사느냐?” 
“집이 가난해서 집주름이나 하고 지낸다네.” 
“너도 이젠 살았구나. 어허! 옛날 집 살림이 여러 만금이었지. 당시 너를 황금투구라고 불렀는데 
지금 그 투구가 어디 갔느냐?” 
“이제야 나는 세정(世情)을 알게 되었다.” 
광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도 목수질을 배우면서 눈이 어두워졌구만.” 
표철주는 이규상이 말했던 것처럼 집주름이다. 그러나 젊어서의 표철주는 살림이 
‘여러 만금’이었고, 별명이 ‘황금투구’였다. 표철주는 원래 갑부였던 것이다. 
왈자를 언급하는 자료들은 왈자가 대체로 부유한 축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광문이 표철주에게 안부를 물었던 용호영, 장교를 다니는 김군경 역시 ‘돈쓰기를 똥이나 흙처럼’ 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연암이 직접 왈자라고 불렀던 김홍연의 경우도 ‘집안이 본래 부유’하여 
재물을 ‘분토(糞土)처럼’ 쓰고, 골동과 서화를 수집했던 인물이었다. 
‘무숙이타령’(‘게우사’ ‘왈자타령’)의 주인공 무숙이는 ‘대방왈자’다. 
이 소설은 무숙이가 새로 서울에 진출한 평양기생 의양이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돈을 
무진장 써대며 갖은 사치와 유흥판을 벌이다가 파멸의 길로 접어들었으나 의양이의 지혜로 
회개한다는 내용이다. 대방왈자 무숙의 출신 성분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중촌의 장안갑부’다. 
중촌은 지금 관철동 일대로 주로 역관 의원 등 중인과 시전 상인 등 서민 부자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어쨌거나 장안의 갑부 대방왈자 무숙은 유흥과 사치에 돈을 쏟아 붓는다. 
그는 오로지 돈 쓰는 것 외에는 달리 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 기생을 장악한 왈자 

요컨대 왈자에게는 돈이 풍부하여 무진장 써대는 그런 속성이 있다. 물론 그들이 써대는 돈이 
모두 자신만의 재산은 아닐 것이다. ‘장대장전’의 “쓰는 재물은 모두 사람을 죽이고 빼앗은 것”
이라는 증언에 의하면, 이들이 써대는 돈은 어떤 경우 살인 강도 행각으로 얻은 것도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돈을 쓴다는 것은 사실 돈을 쓸 곳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사치와 낭비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과 상품 따위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정인들의 사치와 낭비를 가능하게 했던 
전제 조건이란 무엇인가. 앞서 ‘게우사’의 왈자들이 기방에 모인 것을 묘사한 대목을 인용했는데, 
기방이 그 전제 조건의 하나다. 
조선시대의 기생은 국가 소유다. 조선전기에는 오로지 양반만 그들의 예능과 성(性)을 소비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국가에 예속되어 있던 기녀는 전쟁 전의 제도가 붕괴하는 틈을 타서 시정으로 진출했다. 
기녀들은 국가에 복역(服役)하면서 한편 시정에 기방을 열고 자신들의 예능과 성적 서비스를 팔았던 것이다. 
이 기방을 장악한 것이 곧 왈자들이다. 이들은 기방의 운영자이기도 했고, 동시에 고객이기도 하였다. 
다시 ‘서광문전후’의 광문과 표철주의 대화를 읽어보자. 앞서 김군경에 대한 언급에 이어지는 부분이다. 
“분단(紛丹)이는 어디 갔지.” 
“이미 죽었다네.” 
광문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전에 풍원군(豊原君)이 밤에 기린각(麒麟閣)에서 잔치를 하고 나서 오직 분단이만 데리고 
잔 일이 있었지. 새벽에 일어나서 풍원군이 입궐(入闕)하려고 서두는데 분단이가 촛불을 
잡고 있다가 잘못해서 초피 모자를 태웠것다. 분단이가 황공해서 어찌할 줄 모르자 풍원군이 웃으며 
‘네가 부끄러운 모양이로구나’ 하고 즉시 압수전(壓羞錢) 오천 푼을 얹어 주더군. 
내가 그때 수건을 동이고 난간 밑에 지키고 있었는데 시꺼먼 것이 우뚝 선 귀신처럼 보였겠지. 
마침 풍원군이 지게문을 밀치고 침을 뱉다가 섬뜩 놀라 분단에게 몸을 기대면서 
‘저 시꺼먼 것이 웬 물건이냐’고 소곤거리더군. 분단이 ‘천하에 누가 광문을 모르오리까’라고 아뢰었지. 
풍원군은 빙긋이 웃으며 ‘저 사람이 너의 후배(後陪)냐. 불러들여라’ 하고 내게 큰 술잔을 주셨지. 
그리고 당신은 홍로주(紅露酒) 일곱 잔을 마시고서 초헌(?軒)을 타고 가시더군. 
이게 모두 지나간 옛날 일이야.” 
“서울의 기생 중에 누가 제일 유명하지.” 
“소아(小阿)란다.” 
“그 조방(助房)군은 누구냐?” 
“최박만(崔撲滿)이지.” 
기생이야기라니, 감방에서 이제 막 나온 인물이 나누는 이야기 치고는 좀 한심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들의 주된 활동공간이 바로 기방이었기 때문에 기생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후배’ ‘조방군’이란 말이다. 이건 바로 기부(妓夫)를 말한다. 
기부는 기생의 서방으로 대개 기녀의 매니저 노릇을 한다. 조선후기의 기생은 대개 
지방에서 올라온다. 기생이 서울에 올라오면 당장 의식주 해결에 곤란을 겪게 되는 바, 
기부는 이 문제를 해결해주고 기생을 장악해 기생의 영업으로 발생하는 이익 일부를 차지한다. 
모든 사람이 다 기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전별감, 포도청 포교, 의금부 나장, 
승정원 사령 등 몇몇 제한된 부류만 기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기방의 
고객이기도 하였다. 요컨대 왈자들이 곧 기방의 운영자이고 또 고객이었던 것이다. 
앞서 김홍연은 기생을 둘이나 끼고, 김군경이 뚱뚱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기생을 끼고 
몇 장의 담을 뛰어넘었다고 한 것은 모두 이들과 기방의 밀접한 관계를 암시해 주는 이야기다. 
왈자와 기생 간 불가분의 관계를 말해 주는 증거가 ‘춘향전’의 이본(異本)인 ‘남원고사’다.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하던 춘향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히자 남원의 왈자들이 몰려들어 
춘향을 찾아가는 대목이 나온다. 옥문 앞에서 왈자들이 소란을 떨자 옥사장이 나무란다. 
옥사장(獄鎖匠) 하는 말이, 
“여보시오. 이리 구시다가 사또 염문(廉問)에 들리면 우리 등이 다 죽겠소.” 
한 왈자 내달으며 하는 말이, 
“여보아라 사또 말고 오또가, 염문 말고 소곰문을 하면 누구를 날로 발기느냐? 
기생이 수금(囚禁)하면 우리네가 출입이 응당이지 네 걱정이 웬 일이니?” 
남원의 왈자라고 했지만, 읽어보면 서울 왈자들이다. 그것은 “기생이 수금(囚禁)하면(옥에 갇히면) 
우리네가 출입이 응당”이라는 발언에서 알 수 있다. 기생과 왈자가 밀착된 관계가 아니면 
이런 발언이 나올 수 없다.  

■ 오로지 노는 것이 소업 

기방은 생산 공간이 아니라, 유흥 공간이다. 놀고 마시는 곳이다. 왈자들의 소업은 
오로지 ‘노는 것’일 뿐이다. 노는 것에서 도박을 빼놓을 수 없다. 이규상은 왈자에 대해 
“도박장과 창가(娼家)에 종적이 두루 미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도박장이라 해서 
라스베이가스의 도박장이나, 강원랜드, 혹은 합법화된 호텔의 카지노는 아닐 터이다. 
중국만 해도 송나라 때 전문 도박장이 생기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런 공식적 도박장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정식 도박장의 존재 여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도박판이 벌어지면 어디나 도박장이 된다. 
조선후기는 도박이 비상하게 발달한 시대였다. 투전, 골패, 쌍륙 등 온갖 종류의 도박이 
성행했는데, 그중에서도 중국에서 숙종 연간에 수입된 투전이 엄청난 기세로 유행하였다. 
저 지체 높은 양반에서부터 하인, 노비에 이르기까지 투전 열풍에 휩싸였음은 
여러 문헌이 증거하는 바이다. 아니 투전은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갑오니 장땡이니 하는 것도 원래 투전의 족보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실례를 한번 보자. 김양원(金亮元)이란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조희룡(趙熙龍)과 절친한 사이였다. 
조희룡이 누군가? 19세기의 빼어난 서화가이자, 비평가이자, 시인이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이기도 하였다. 이런 사람의 친구이니, 뭐 좀 고아한 사람으로 알겠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조희룡은 ‘호산외기(壺山外記)’에서 ‘김양원전’을 지었는데, 그 첫머리가 이렇다. 
김양원은 그 이름은 잊어버렸고, 자로 행세했다. 젊어서 유협 노릇을 했는데, 
계집을 사서 목록에 앉혀 술장사를 했다. 허우대가 크고 외모가 험상궂어 기생집과 도박장을 
떠돌아다녔지만, 기가 사나워 누구하나 그를 업신여기지 못했다. 
행태를 보아하니, 김양원은 왈자다. 그는 뒷날 시인으로 자처하고 시에 골몰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오로지 기방과 술집, 도박판을 쫓아다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남원고사’에도 왈자들은 춘향을 찾아가기 전에 골패노름을 한참 벌인다. 
도박장 따위를 전전하는 왈자의 생리가 짐작이 되시는지. 주먹을 휘두르고 기방과 술집, 
도박판을 쫓아다니는 왈자에 대해 시시콜콜 늘어놓는 것은 근엄한 도덕주의자들의 눈에는 
정말 쓸데없는 언어의 낭비로 비칠 것이다. 하지만 왈자에게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왈자는 조선후기 민간 예능의 주향유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남원고사’를 보면 왈자들이 춘향이를 찾아가면서 여러 행각을 벌이는 썩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 민간예능의 주 향유자 

왈자들은 먼저 노래를 부르는데, 선소리와 ‘신선가(神仙歌)’ ‘춘면곡’ ‘처사가’ ‘어부가’ 등이 
주 레퍼토리다. 선소리는 ‘서울 중심의 경기요와 서도 소리의 속된 노래의 일종’이며, 
‘신선가’는 경기잡가이고, ‘춘면곡’ ‘처사가’ ‘어부사’는 십이가사의 레퍼토리다. 
이 노래들은 서울의 기방에서 오입쟁이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것들이었다. 왈자들은 이런 
민간 가요의 주 향유자였던 것이다. 나는 조선후기의 음악을 비롯한 예능이 이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실제 왈자들은 연예인을 지배하고 있었다. 앞서 인용했던 ‘게우사’에서 기방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노래 명창 ‘황사진’ 가사 명창 ‘백운학’ 선소리의 ‘송흥록’ ‘모흥갑’이었다. 
황사진과 백운학은 알 길이 없지만, 송흥록과 모흥갑은 국문학사를 장식하는 판소리 광대들이다. 
이들 역시 왈자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 그 증거로 ‘게우사’의 주인공 무숙이는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거창한 유흥판을 벌이면서 삼남의 제일가는 광대, 산대놀음을 하는 산대도감의 
포수와 총융청 공인, 각 지방의 거사 명창 사당패를 모으고, 우춘대,·하은담,·김성옥,·고수관·,
권삼득·모흥갑·송흥록 등 22명의 명창 광대를 불러들인다. 
물론 과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장은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그 증거로 가사 ‘한양가’의 
‘승전(承傳)놀음’을 들 수 있다. 승전놀음은 왈자의 한 부류인 대전별감이 서울의 기생을 총동원하여 
거창하게 벌이는 놀이판인데, 별감은 금객, 가객 등을 불러 모으고 있다. 
왈자들은 연예인의 예능을 소비하는 주체였으며, 돈 이외에도 그들을 불러올릴 권력이 있었던 것이다. 
왈자는 책 읽고 공부하는 그런 세계와는 팔만구천리나 떨어진 존재다. 왈자를 기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력 폭력이다. 말이 아니라 주먹이 통하는 세계에 살던 인간인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왈자와 검계는 집합의 관계다. 왈자가 전체집합이라면, 검계는 그 속에 포함된 
부분집합이다. 그들의 폭력이 반사회성을 띠면 검계가 되었던 것이다. 

■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이들은 주로 먹고 마시고 노는 데 골몰하던 부류다. 조선후기 시정 공간을 북적대게 만든 
흥미로운 존재인 것이다. 왜 이런 부류가 나타나게 되었던가. 
조선사회는 상업과 농업 분야의 발달로 약간의 경제적 잉여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 경제적 잉여를 바탕으로 사치와 유흥이 발달할 소지가 있었다. 
그런데 앞서 살폈듯 왈자란 대개 중간계층을 모집단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이 부를 축적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당시의 사회 체제로 보아, 과거를 통해 고급관료가 되거나 
학문을 하여 명예를 누린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들이 유흥으로 빠진 것은 거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어쨌거나 조선은 조용한 아침이란 이미지와는 결코 맞지 않는 나라였다. 
검계가 살인과 강간과 강도를 저지르고, 
왈자가 술집과 기방과 도박판에서 왁자하게 야단법석을 떠는 곳이었다. 
조용하긴 뭐가 조용하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