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한국의 姓氏

창원 황씨(昌原 黄氏)

늘푸른 봄날처럼 2019. 2. 4. 08:13

    
    ■ 한국에는 현재 약 286개의 성,姓 (2000년 통계)이 있으며, 본(本)을 필수 요소로 한다. 
    한국의 성씨는 삼국 시대 이후 중국의 성씨 제도를 차용한 것이 많고, 
    고려 시대부터 족보를 만들고 귀족 계급의 성씨 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씨는 대부분 한 음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음절로 된 복성(複姓)도 있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성씨가 10만이 넘는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에서는 성씨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김(金)씨, 이(李)씨, 박(朴)씨인 사람이  
    전체 인구의 약 45%를 차지하여 특정 성씨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매우 높다 
    
    ■ 창원 황씨(昌原 黄氏) 
    
    경상남도 창원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황석기(黃石奇)를 파조로 하는 회산군계, 
    시중을 역임한 황충준(黃忠俊)을 파조로 하는 시중공계, 
    황양충(黃亮沖)을 파조로 하는 호장공계의 3파가 있다.
    ◎관향 -경상남도 창원시
    ◎시조 -황락(黃洛)
    ◎주요 중시조 -황석기(黃石奇) -황충준(黃忠俊) -황양충(黃亮沖)
    ◎주요 집성촌 -인천시 강화군 -황해도 신천군 -평남 강동군
    전남 영광군 -경남 함안군 -충남 부여군 -전남 여수시 -전북 고창군
    ◎주요 인물 -황상, 황거정, 황사우, 황응규, 황섬, 황신, 황도창, 황흠, 황자, 황인검, 황인점, 
    황기천, 황사영, 황인성, 황석영, 황우여, 황주홍, 황우석, 황교안
    ◎인구(2000년) -252,814명 (33위)
    ●기원
    조선 후기 정시술(丁時述)이 저술한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라는 문헌에 의하면 
    황씨(黃氏)의 도시조(都始祖) 황락(黃洛)은 중국 절강(浙江) 사람으로 후한의 유신(儒臣)
    이라고 한다. 28년(신라 유리왕 5)에 한(漢)나라 장군으로 교지국(交趾國, 베트남)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중 풍랑을 만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정의 안아진(安我鎭)에 
    표류하였고, 황락(黃洛)의 셋째 아들인 황병고(黃丙古)가 창원백(昌原伯)에 봉해지면서 
    창원황씨를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선계를 고증할 수 없어 세 계통이 
    각각 1세조를 다르게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파조
    창원 황씨는 크게 3개의 계파가 있다. (공희공파 · 호장공파 · 시중공파)
    공희공파 - 고려 충정왕 때 도첨의 참리를 지냈고 회산군에 봉해져 
                    문하평장사에 오른 황석기(黃石奇)
    시중공파 - 시중을 역임한 황충준(黃忠俊)
    호장공파 - 황양충(黃亮沖)
    ●역사
    공희공파에서는 파조(派祖)인 황석기의 아들 황상(裳)이 문하찬성사·서강도원수 등을 지냈다. 
    황상의 현손 황형(衡)은 공조판서를, 그의 아들 황기(琦)는 직제학·대사간을 거쳐 도승지 ·
    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황형의 증손 황신(愼)은 이율곡(李栗谷)의 문하생으로 
    정여립의 옥사(1589) 때 정언(正言)으로서 대신들이 서로 직언(直言)을 회피한 사실을 
    논박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후에 공조·호조판서를 지냈다.
    시중공파에서는 조선 개국공신 황거정(黃居正)과 조선 숙종 때 이조판서 황흠
    (黃欽, 1639년 ∼ 1730년), 황흠의 손자인 호조참판 황자(梓), 황자의 아들인 형조판서 황인검
    (仁儉), 창성위(昌城尉) 황인점(仁點) 3부자가 유명하다. 황자는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갑인연행록》과 《경오연행록》을 편술하였다. 
    황자의 큰아들 황인검은 형조판서를 지냈고, 둘째아들 황인점은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결혼하여 정조 때에는 동지 겸 사은사가 되어 일곱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호장공파에서는 황사우(士祐), 황응규(應奎), 황섬(暹)의 3대가 두드러진다. 
    황사우는 호조 예조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역임하였으며,아들 황응규는 이퇴계의 
    문하생으로 임진왜란 때 절충장군에 오르고 돈녕부지사를 지냈다. 손자 황섬은 소북파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慶)의 처남으로 부제학 ·대사헌이 되었으나, 
    계축옥사(1613) 이후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 밖에 창원황씨의 인물로는 영조 때 노론의 중진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구하(龜河), 
    신유박해 때 순교한 백서(帛書)사건의 주인공 황사영(嗣永), 순조 때의 명문장 ·명필 
    황기천(基天), 고종 때의 학자 황재영(在英)과 명의(名醫) 황필수(必秀) 등이 있다. 
    현대 인물로는 국무총리 황인성, 황교안이 있다.
    ●본관 연혁
    창원(昌原)은 경상남도 남쪽에 위치하는 산업도시이며 도청소재지이다. 고대에는 금관가야
    (金官伽倻)에 속했으나 신라가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굴자군(屈自郡)이 설치되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의안군(義安郡)으로 이름을 바꾸고, 합포현(合浦縣: 馬山)·웅신현
    (熊神縣: 熊川) 칠제현(漆隄縣: 漆原)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금주
    (金州: 金海)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뒤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독립되었다. 1274년(원종 15)과 
    1281년(충렬왕 7)에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의 일본 정벌 때 창원지방은 합포를 중심으로 연합군의 
    기지가 되었다. 그 공으로 1282년에 의안군이 의창현(義昌縣)으로, 합포현이 회원현(會原縣)으로 
    승격되었다. 1408년(태종 8)에 회원현을 병합하여 창원부(昌原府)로 승격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영이 설치되었으며, 1413년에는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가 되었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1년(선조 34)에 창원대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603년(선조 36)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영이 
    진주로 옮겨갔다. 1661(현종 2)~70년(현종 11)에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창원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상남도 창원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창원군에 다시 편입되었다. 
    1980년에 마산시 의창동을 편입하여 창원시로 분리 승격되었다. 
    ●항렬표
    공희공파(중시조로 1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종(鍾) 연(淵) 수(秀) 환(煥) 규(奎) 인(寅)/진(鎮) 환(煥) 교(敎)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진(鎭) 순(淳) 근(根) 사(思) 규(珪) 호(鎬) 철(澈)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창원황씨는 1985년에는 총 53,593가구 220,812명, 2000년에는 총 78,894가구 252,81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 양원군(성종의 서자) 사위 황수천 화유옹주(영조의 서녀) 부마 황인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