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누가 왕을 죽였는가

2. 제14대 선조 -<1>

늘푸른 봄날처럼 2019. 2. 3. 15:17



■ 제14대 선조   

■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서
조선조 전체를 통틀어 선조만큼 다사다난했던 임금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선왕의 적장자가 아니면서 
왕위에 오른 방계 승통부터가 비상한 재위 기간을 암시하는 것이다. 선조 때 있었던 동서 분당과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미 이전의 방식으로는 통치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였다. 
서울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간 임금, 명나라로 도망가려다 압록강가에서 겨우 멈춘 치욕의 군주가 
바로 선조였다. 뿐만 아니라 선조는 무려 40년 이상 재위에 있었으면서도 
죽은 뒤 독살설에까지 휘말리게 된다. 
선조는 과연 독살 당했을까? 선조 독살설은 인조반정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끈질기게 떠돌았고, 
심지어 현대에 와서도 그의 독살을 다룬 책이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주제이다. 
독살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의 죽음의 현장으로 가보는 것이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는 지름길일 
것이다. 먼저 선조 독살의 혐의를 받고 있는 광해군과 북인 측의 기록인 <선조실록>을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재위 40년 가을 선조는 병세가 위독해져 기가 막히면서 갑자기 넘어졌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선조는 기후가 조금 안정되자 "이 어찌된 일인가"라면서 불안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어의는 추운 아침에 일찍 기동하여 한기가 밖에서 엄습한 탓이라며 
인삼순기산을 권했다. 그러나 며칠 후 다시 호흡이 가빠지며 가래가 끓었다. 
의약청에서는 풍기, 즉 중풍에 가까운 증세라고 진단했다. 
그러던 선조의 병이 조금 차도를 보였다. 
병세가 차도를 보이자 선조는 또 세자 광해군을 꾸짖기 시작했다. 광해군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을 때 선조의 병이 다시 위독해졌다. 세상을 떠나는 해인 재위 41년 1월부터 
선조는 병세가 다시 심해져 약방의 입진을 받았다. 그해 2월 1일 약방의 문안을 받고 
"어제밤엔 편히 잠을 잤다"고 말했던 선조는 그날 오후부터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다. 
약방에서 강즙, 죽력, 도담탕, 용뇌소합원, 개관산 등을 들였으나 효력이 없었다. 
세자가 어의에게 진찰하게 하자 어의가 말했다. 
"일이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날 인목왕후가 선조의 병상을 지키고 있었는데 유영경 등 여러 대신들이 
"고례에 부인의 손에서 임종하지 않는다"며 왕비에게 밖으로 나와 달라고 요청하는 와중에, 
안에서 곡성이 들려 비로소 선조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 모두 통곡하였다.
이처럼 <선조실록>은 선조가 병으로 죽었으며 마지막 임종을 지킨 여인이 부인 
인목대비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서인 측의 기록인 <광해군일기>에는 선조 독살설에 대한 
서인 측의 유일한 근거이기도 한 찹쌀밥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선조가 승하하는 당일 "미시에 
찹쌀밥을 올렸는데 상이 갑자기 기가 막히는 병이 발생하여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남계집>을 인용해 선조 독살설을 간접적으로 전하는데, 
그에 따르면 입시했던 선지의원 성협이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 검푸르니 바깥소문이 헛말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고 이 말을 들은 조익과 권득기는 광해군 때 벼슬을 거절했다는 내용이다. 
과연 선조는 북인 측의 기록처럼 병사한 것일까, 서인 측의 기록처럼 독살당한 것일까?
■ 을축년에 하교받은 하성군
문정왕후는 인종 독살설을 무릅쓰고 아들을 명종으로 즉위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더 이상 
자신의 핏줄에게 왕위를 잇게 하지는 못했다. 문정왕후의 유일한 손자이자 명종의 외아들인 
순회세자가 요절했기 때문이다. 명종은 재위 18년 열세 살의 외아들 순회세자를 잃은 후 탄식했다. 
"내 울어 무엇 하랴. 을사년에 충량한 신하들이 죄 없이 떼죽음을 당해도 내가 임금이 되어 
말리지 못했으니, 내 집에서 어찌 대대로 군왕이 이어질 수 있겠는가?"
순회세자 외에 다른 아들을 두지 못했던 명종은, 그 2년 후인 재위 20년에 문정왕후가 
사망함으로써 친정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명종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문정왕후의 죽음에 대해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문정왕후가 명종에게 
"내가 아니면 네가 어떻게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으랴"라며 횡포를 부려 명종이 심열증을 
얻었다면서 "윤비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쓸 정도였다. 조선의 왕비 중 죽는 당일 
이런 혹평을 들은 인물은 문정왕후가 유일할 것이다. 
문정왕후의 몰락과 함께 20년 동안 권세를 누려오던 소윤 윤원형도 몰락해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동안 문정왕후의 기세에 눌려 있던 세월이 병이 되었는지, 명종도 문정왕후 사망 2년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재위 22년 6월 27일 시약청을 설치한 이튿날 새벽에 세상을 등졌으니 급서였다.
명종이 사망했을 당시 가장 큰 문제는 후사가 없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왕위가 비는 비상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나마 2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이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었다. 문정왕후가 사망한 직후 명종도 덩달아 위독해 
저승 문턱을 넘나든 적이 있었다. 그때 가망 없다고 여긴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심통원 등이 
명종에게 후사를 정해달라고 청했으나, 명종의 증세는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위독했다. 
대신들은 할 수 없이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에게 후사를 결정해달라고 요청하여 답을 받았는데, 
이를 '을축년의 하서'라 한다. 
이때 명종의 뒤를 이을 뻔했던 종친이 덕흥군의 셋째 아들 이균이다. 
덕흥군은 중종이 창빈 안씨에게서 난 아홉 번째 아들이었다 중종의 아홉 번째 서자의 
세 번째 아들이니 선원보대로라면 이균은 왕위를 꿈꿀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인순왕후가 
이균을 후사로 정하는 하서를 내렸던 것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명종도 평소 이균을 
볼 때마다 "덕흥은 복이 있다"며 아꼈다. 한 번은 명종이 종친 자제들을 궁중으로 불러 
머리 크기를 알려고 한다며 익선관을 써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여러 왕손들은 익선관을 
머리에 써보며 희희낙락했는데 제일 어린 이균만은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갖다 놓고 머리를 숙여 사양하며 말했다.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쓰는 것이오이까."
이런 행동이 명조와 인순왕후의 뜻에 꼭 맞았다. 
이런 경로로 을축년 명종이 위독할 때 이균을 후사로 결정했던 것이다. 
재위 22년 6월 영의정 이준경 등이 문안했으나 명종은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위독했다. 
이렇게 되니 다시 후사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인순왕후의 뜻은 2년 전과 같았다.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균 이균에게 다시 하교가 내린 것이다. 이런 경로를 거쳐 도승지 이양원과 
동부승지 박소립 등이 새 임금을 모셔 오기 위해 덕흥군의 집으로 떠났다. 
그런데 이때 덕흥군의 집에 도착한 이양원이 어느 아들이라고 분명히 말하지 못했던 데서, 
선조의 즉위가 얼마나 유동적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양원은 다만 이균의 외숙 정창서에게 뵙자고만 청했다. 함께 갔던 주서 황대서가 
"누구를 뵙자는 것이오. 이 같은 큰일을 그렇게 모호하게 할 수 있소?"라고 항의했으나 
이양원은 듣지 않고 정창서에게 물었다. 
"어느 군이 치장을 차리고 있습니까?"
"을축년에 하교받았던 하성군입니다."
이양원이 끝내 자기 입으로 하성군의 작호를 말하지 않은 것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였다. 즉 하성군 아닌 다른 인물이 임금으로 추대될 가능성도 있었고, 
그 경우 하성군을 모시러 갔던 인물은 죽게 되어 있었으므로 이양원은 끝내 
이름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이날 박소립은, 하성군을 호종한 인물들은 
공신이 될 거라는 궁인들의 말만 듣고, 호종한 인물들의 명단을 받았다가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은 다시 말해  
하성군의 승통이 그만큼 정통성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성군 또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대궐에 들어와서도 상차에서 
나오지 않고 사양했다. 대신들이 청하고 인순왕후도 청하자 마지못해 나왔으나 
용상에 오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물론 의례저인 거조이기는 했지만 
하성군은 한참을 사양한 후에야 용상에 올라 백관의 하례를 받고 임금이 되었다. 
그리고는 곧 인순왕후를 왕대비로 높여 수렴청정하기로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드디어 방계 승통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때 즉위한 하성군이 임진왜란을 겪고 이리저리 피난 다니는 수난의 군주 선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