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 봄날처럼 2019. 2. 1. 11:35



■ 제12대 인종 

■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의 장례식
문정황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했을 때의 나이는 열  두 살이었다. 
아직 미성년이었으므로 성종 때의 고사에 따라 대비가 섭정을 해야 했다. 당시 섭정할 수 있는 
사람은 중종비인 대왕대비 문정왕후와 인종비인 왕대비 인성왕후 두 명이었다. 
그러나 대비가 스스로 섭정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었고, 대신들이 결정해 주청해야 했으므로 
조정은 회의를 열었다. 
영의정 윤인경이 누가 섭정해야 하는가를 물었으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때 소신을 밝히고 나선 인물이 사림파 이적이었다. 
"송나라 철종 때 태황태후가 정치를 대리한 전례가 있습니다. 
어떻게 형수와 시숙이 함께 궁전에 나앉을 수 있겠소."
다른 사람도 아닌 사림파 이언적이 문정황후의 대리를 주청하고 나섰으므로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문정왕후는 이처럼 모순되게도 사림파 이언적의 지지를 받아 대리청정하게 되었다. 
훗날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이언적이 을사사화 때 사림파의 기개를 지키지 못했다며 
비판했는데, 율곡의 속마음은 사림파의 기개를 지키지 못한 데 있다기 보다는, 
문정왕후의 섭정을 주장함으로써 사림파의 집권이 그만큼 늦어진 데 대한 비판인지도 모른다. 
사림파 이언적의 이 순진한 주청은 입술의 침이 채 마르기도 전에 사림파에 대한 탄압으로 돌아왔다.
인종이 위독할 때 "미안해서 못 견디겠다"며 소동을 벌였던 문정왕후는 정권을 잡자마자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녀의 속마음을 인종의 장례 절차에서 먼저 드러난다. 
윤원형과 함께 소윤을 이끌던 이기가 인종의 장례 절차에 대해 색다른 주장을 했다.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루를 모셔도 임금이건만, 인종은 임금이 아니니 대왕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 같으면 대역죄로 몰릴 주청이었다. 그러나 결국 인종의 장례는 임시로 
빨리 치르는 약식 장례인 갈장으로 치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종의 장례일이 승하한지 다섯 달이 
채 못 되는 10월 27일로 정해졌는데, 문정왕후와 소윤은 여기에서 20여일을 다시 앞당긴 10월 15일로 
장례일을 수정했다. 홍문관 부제학 나숙이 부당하다고 상소한 것은 당연했다. 
"대행대왕의 장례일을 10월 27일로 정한 것도 이미 5개월의 상기에 어긋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 또 15일로 당기니 놀라고 의혹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예에 따라 장례일을 늘려 잡으소서."
교리 정황도 갈장은 안 된다고 상소하고, 사헌부에서도 그 부당함을 아뢰었으나 
문정왕후는 허락하지 않았다. 
야사인 <영남야언>에는 윤원형이 불공을 올려 임금의 수명을 짧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고 적혀 있다 .
윤원형이 깊은 밤 남산에서 들불과 초를 켜놓은 채 손수 향을 피우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하였으며, 
궁중에서는 나무로 만든 사람을 묻어 인종을 저주했다는 것이다. 
상복을 입는 날 윤원로, 윤원형, 이기 등 소윤이 
갓을 털고 서로 하례하며 의기양양해하는 것을 보고 정황이 분노했다. 
"이 역적놈들의 기색을 보기 원통함이 더욱 심하다."
사림파를 신원하려던 인종의 시신이 궐 내에 있던 그 해 8월, 사림파들은 
'을사사화'로 대거 화를 입게 된다. 
대비 윤씨는 인종이 죽은 다음 달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려, 원형의 형 원로를 공박해 귀양 보낸 
대윤 영수 윤임과 유관 등을 치죄하라고 명령했다. 윤원형은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 등을 
배후에서 움직여 윤임과 유관 등을 공격하게 하였다. 윤원형은 대윤을 제거하기 위해 윤임이 
인종비 인성왕후에게 보내는 편지를 위조해  실수인 척 대궐에 떨어뜨렸다. 
"근래에 나라 일이 점점 수상해지니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몰라서 밤낮으로 울고 있습니다. 
판서 유인숙, 정승 유관과 함께 왕위를 봉성군에게 옮기려고 합니다. 전번 윤원로를 귀양 보낼 때 
원형마저 치죄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윤임이 인성왕후와 모의해 왕위를 중종의 여섯째 아들 봉성군에게 옮기려 했다는 조작이었다. 
이 사건으로 봉성군은 귀양을 가고, 윤임과 유관숙, 유관은 모두 귀양들을 당하게 된다. 
인종의 시신이 싸늘해지기도 전에 대윤이 몰락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이 완전한 조작이라는 것은 
이들을 처벌하는 전지에 죄명을 명시하지 못한 데서 드러난다. 적시할 죄명이 없었던 것이다. 
문정왕후가 "전지에 사연을 언급하지 않으면 아무 까닭 없이 죄 준 것 같을 것이니, 윤임은 
종묘사직과 크게 관련된  말을 만들어냈고 유관과 유인숙은 권간과 결탁했다고 적으면 어떻헸는가?"
라고 제의했으나, 인심이 동요할 것이라며 반대하자 죄목도 없이 치죄했던 것이다 .
결국 윤임은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리고 유관과 유인숙은 "무슨 행적이 있다"는 
이유로 치죄되었으니 이는 이들이 무죄임을 말해주는 좋은 증거라 하겠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권을 장악한 소윤은 자신들에게 불만을 가진 사림파들을 마저 제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사화가 다시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를 을사년에 벌어졌다 하여  을사사화라고 부른다. 
소윤은 홍문관과 대간 등에 자리 잡은 사림파가 윤임 등의 치죄에 반대하자 
이들마저 윤임과 유관 일파로 몰아 공격했다. 이 일로 수찬 이휘, 장령 정희등, 박광우 등 
젊은 사림파 관료들이 잡혀 와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장형을 받던 박광우가 울부짖었다.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는가? 곤장이 다립다 더 굵으니 어찌 감당하란 말이냐?"
정희등은 울부짖는 박광우를 타일렀다. 
"죽고 사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곤장의 굵고 얇은 것을 비교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돌아가신 임금의 관이 가까운 곳에 있으니 고통 소리가 안에 들리지 않게 하자."
이들은 심문받을 적마다 인종의 관이 있는 곳을 향해 부복해, 형을 집행하던 사령들도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기는 눈을 부릅뜨며 꾸짖었다.
"그렇게 하면 구제를 받을 듯하여 쓸데없이 애를 쓰느냐?"
이처럼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인종을 지지했던 대윤과 사림파는 급전직하 몰락했다. 
윤임, 유관, 유인숙, 이휘 등은 참형에 처해졌고 많은 사림파가 귀양 또는 파직당했다. 
하지만 이것은 끝은 아니었다. 
을사사화 2년 후인 1547년에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 다시 옥사가 벌어졌다. 
양재역 객사에 "여왕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니 
나라가 망할 것을 기다리는 격이다"라는 내용의  벽서가 붙은 것이다. 
이로 인해 봉성군과 송인수, 이약해 등이 사형에 처해지고, 
"형수와 시숙이 한 궁전에 나앉을 수 없다"며 문정왕후의 섭정을 제안한 이언적도 
먼 변방으로 쫓겨나 위리안치 당했다.
그러나 문정왕후와 소윤의 공세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양재역벽서 사건 다음해인 
1548년 무신년에는 전 사관 안명세의 사초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관 안명세가 사초에 
윤임 등을 옹호하고 이기가 사건을 조작했다고 비난하면서, "중종의 소상도 지나지 않았고 
인종의 발인도 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빈전 옆에서 대신 세 사람을 죽였다"고 
개탄했던 것이다 .춘추필법을 지향한 안명세는 혹독한 고문 끝에 
"부디 자식들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마시오"라는 유언을 남긴 채 사형당했다.
그 후 명종4년에는 이홍윤 사건이 일어나 또 한 차례 피비린내가 일어났다.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사형당한 이약빙의 아들이자 윤임의 사위였던 이홍윤이 
"연산군도 사람을 많이 죽이더니 중종반정을 당했는데, 지금 임금인들 
사람을 많이 죽이나 어찌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겠느냐?"라고 불평하곤 했는데, 
그 아우 이홍남이 조정에 고발함으로써 옥사가 재연된 것이다. 
이 사건은 충주 지역에 사는 이약빙의 문인들을 초토화시켜 
무려 3백여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또한 명종이 쫓겨날 것이라는 이홍윤의 발언에 분노한 문정왕후는 
충청도의 도명을 청홍도로 바꾸어버렸다. 
원래 대읍인 충주와 청주의 첫 음을 따서 충청도의 도명으로 삼았는데 
사건 발생지인 충주대신 지금의 홍성인 홍주를 넣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