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 봄날처럼 2019. 1. 31. 13:29



■ 제12대 인종 

■ 문제의 '주다례'
이런 일들은 부왕 중종의 장례를 치르느라 몸이 쇠약해진 인종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인종의 병세가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승하하기 한 달 전쯤인 재위 1년 6월 4일인데, 
이날 인종은 최초로 약방제조들의 문안을 받는다. 그때 인종의 대답은 심상했다. 
"더위 증세가 조금 있을 뿐이니 문안하지 말라." 
그리고 첫 문안 이틀 후인 6월6일 약방제조들이 문안했을 때 인종의 답은 한층 환해진다.
"이제는 기후가 덜하니 문안하지 말라. 이렇게 몹시 더운데 문안하니 도리어 미안하다."
이후 약 보름 동안 <인종실록>에는 약방의 문안 기록은 보이지 않고 정상적으로 집무를 본 
기사만 나온다. 그러다 6월17일 문제의 '주다례'기록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인종이 
문정왕후가 내놓은 다과를 먹고 독살 당했다는 야사를 뒷받침해주는 기록이다. 
6월 17일 영의정 등 삼공이 인종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내일 경사전의 주다례를 지낸 뒤에 대비전에 문안하시겠다고 전교하셨습니다. 
지금 전하의 옥체가 강녕하시지 못한 데다 날씨는 매우 덥습니다. 
이런 때에 노동하시면 혹시 중병이 생길까 염려되오니 멈추소서."
"내 기후가 이제 매우 좋아졌으니, 무더위를  당했더라도 편안히 앉아서 
오래도록 제례를 그만둘 수 없다."
이렇듯 삼공이 주다례와 대비전 문안을 그칠 것을 아뢰는 판국에도 대비 문정왕후는 이에 관해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이는 곧 주다례와 문안을 강행하라는 뜻이었다. 다음날 인종은 예정대로 
주다례를 지내고 대비에게 문안하였다. 이날 대비는 어가를 따른 시종과 제장에게 술을 먹이고, 
또 시종에게 호초를 넣은 흰 주머니를 내리는 등 일행을 극히 환대했다. 
그 동안 인종은 대비전의 내전에서 문정왕후의 다과를 나누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인종은 갑자기  
약방에 명하여 약을 지어 들이게  하였다. 인종의 병은 이질, 즉 심한 설사였다. 주다례 직후부터 
설사가 나더니 그 이틀 후인 20일 무렵부터  증세가 심해져 약방의 입진을 받은 것이다.
"이질 증세가 잇달아 음식을 먹지 못하니, 권제를 따르는 것이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의원은 별다른 증세가 없다 한다."
닷새 후인 6월25일 승지 박한종은 인종이 "설사를 많이 하기 때문에 기운이 매우 지쳐 있고 
구역 증세도 있어서 그저께부터 통 수라를 들지 못한다"고 말했다. 
바로 그 다음날부터 인종의 증세가 갑자기 위급해졌다. 눈동자가 술취한 사람처럼 흐릿해지고 
손바닥이 매우 더워졌다. 그러다가  기운이 가라앉아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헛소리하는 증세가 나타났다. 
인종의 병이 위급해지자 의원들은 별각의 고요한 곳으로 옮겨 조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인종은 경복궁 안 한복판에 있는 아마산 동쪽의 청연루로 옮겼는데, 이 조치가 
조금 효험이 있었는지 스스로 일어날 정도로 기운을 점점 회복했으며 
열도 잠시 내려 미음을 들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문정왕후가 소동을 일으킨다. 갑자기 궁을 나가 의혜공주 집에 머물러 쉬면서 
청연루로 가 인종의 병세를 살펴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미안해서 못 견디겠다."는 명분이었다. 
인종의 증세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가주서 안명세, 검열 윤결 등은 한결 같이 
문정왕후의 이 의외의 거조를 만류하고 나섰다. 
"상의 옥체가 위급하시더라도 대비께서 친히 문안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다만 경동만 더할 뿐입니다. 인심이 의구하고 경동하여 위아래가 황급하면 변고가 일어나는 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정왕후가 벌인 거동 소동은 의혜공주의 집이 궐 밖 여염에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 
평소에도 대비는 밖에 나갈 수 없었다. 한번 왕비가 되면 죽을 때까지 궐 밖 구경을 할 수 없었는데 
심지어 과부인 대비가 궐 밖에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인종이 병환중인 상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하들의 만류로 일단 주저 앉은  문정왕후는 다음날 다시 의헤공주의 집으로 거동하겠다고 
소동을 일으켰다. 이는 분명 의도적인 것이었다. 왕비가 된 날부터 인종을 핍박했던 그녀가 
인종의 병세를 걱정해 소동을 일으킬 리는 만무했다. 문정왕후가 이런 소동을 벌이는 이유는 
분명했다. 모든 백성들에게 인종이 와병중임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사실 대궐 밖의 일반백성들은 
구중궁궐에서 일어나는 사실들을 잘 알 수 없었다.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인자하다고 소문이 
자자했으므로, 그가 즉위 한지 1년이 채 안 돼 급서할 겨우 그 죽음을 둘러싸고 의혹이 일 것은 분명했다.
문정왕후가 이런 소동을 벌이는 동안 임금의 병석을 지킨 사람은 인종의 외숙인 대윤 영수 윤임 이었다. 
윤임은 병석에 있는 인종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그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18일 주다례 후 대비전을 문안했을 때의 일을 의심하고 있었다. 
인종이 다과를 들고 며칠 만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대비전에서 마련한 다과에  
의혹의 눈길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증거도 없는 그 일을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인종이 사망하기 이틀 전인 6월 28일 어의 박세거는 드디어 소생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한다. 
"애통하여 수척한 것이 극도에 이르렀기 때문에 장부가 매우 손상되어 병이 뿌리가 있는 듯합니다."
손상된 장기는 비위였다. 그러나 부왕의 사망에 지나치게 애를 태워 비위가 손상되었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비장과 위는 음식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장기로, 음식물에 의해 손상되는 
장기이지 슬픔 때문에 손상되는 장기는 아니다 .또한 비위는 독극물이 투입되었을 경우 
가장 먼저 반응을 일으키는 장기이기도 하다.
내외의 이런 의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정황후는 세 번째 거동 소동을 일으킨다. 
인종이 사망하기 하루 전이었다. 거동 장소는 여전히 딸인 의혜공주 집이었다. 대비의 소동은 
병구완에 정신이 없는 대신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영의정 윤인경이 만류하며 타협안을 제시했다. 
"공주의 집은 여염에 있으므로 결코 옮겨서는 안 되니, 
마지못하면 승정원으로 옮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승정원은 경복궁에 있으므로 임금이 투병하는 청연루와 가까웠다. 그러나 승정원이 비록 궐 내에 
있다고 해서 문제가 없을 수는 없었다. 대비가 승정원을 차지하고 있으면 승정원이 집무를 
볼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간단하게 말해 문정왕후가 인종을 도와주는 거조는 그냥 대비전에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양사와 홍문관에서 대비의 승정원 이어를  반대했고, 문정왕후도 승정원을 
"불편"하다며 의헤공주의 집으로 거동하겠다고 계속 고집하다가, 
대신과 대간에서 거듭 만류하자 겨우 소동을 멈추었다.
문정왕후는 이런 식으로 인종의 병 치료에 바쁜 신료들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이런 소동 속에서 인종은 어의 박세거가 올린 소시호탕을 들기를 거부하고 나선다. 
"내 병이 어찌 이 약을 마시고 곧 낫겠는가?"
인종은 생애 대한 미련을 포기한 듯 윤임 등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광조의 복직과 현량과의 복설은 내가 늘 마음속으로 잊지 않았으나 
미처 용기 있게 결단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평생의 큰 한이다."
윤임이 만류했다.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잡언을 많이 하십니까? 병환만 빨리 나으면 
무엇이든지 어찌 수행하지 못하겠습니까?"
인종은 혀를 차면서 탄식할 뿐이었다. 죽음을 앞둔 인종에게 가장 큰 한은 조광조 같은 사림파를 
신원하지 못한 것이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느낀 인종은 대신들에게 유교를 내린다. 
"조광조 등의 일은 내가 마음속으로 늘 잊지 않았으나 선왕께서 전에 하락하지 않으셨으므로 
내가 감히 가벼히 고칠 수 없어 천천히 하려 하였다. 이제는 내 병이 위독하여 다시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으므로 비로소 유언하여 민심을 위로하려 한다. 
조광조 등의 벼슬을 일체 전일처럼 회복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현량과도 전에 아뢴대로 회복하여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라."
그리고는 이어 전위 교서를 내렸다. 
"경원대군 이환에게 전위한다. 경들은 더욱 힘쓰고 도와서 내 뜻에 부응하라."
결국 인종은 투병하던 청연루 아래 소침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7월 1일, 재위에 있은 지 불과 여덟 달 만이었다. 
그날 밤 서울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서울 사람들이 스스로 놀라 움직이며 뭇사람이 요사한 말을 퍼뜨리기를 
"괴물이 밤에 다니는데 지나가는 곳에는 검은 기운이  캄캄하고 
뭇 수레가 지나는 듯한 소리가 난다"고 하였다. 
서로 이런 소문을 전해 미친 듯이 현혹되어 떼를 지어서 모여서 
함께 떠들고, 궐하로부터  네거리까지 징을 치며 쫓으니 막을 수  없었다. 
이런 소동이 3-4일 계속된 후에야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