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누가 왕을 죽였는가

1. 제 12대 인종 <3>

늘푸른 봄날처럼 2019. 1. 28. 17:45



■ 제12대 인종 

■ 서른 다섯 중년 왕비의 출산
문정왕후가 왕비로 간택된 것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중종이 장경왕후 윤씨의 뒷자리를 이를 계비를 간택하려고 간택령을 내렸을 때,  
윤지임의 딸 윤씨는 와병중이었다. 그녀의 병세는 거의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때 용하다는 시골 점쟁이 한 명이 서울에 와 있었는데, 그는 스스로 점을 쳐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귀한 손님이 맨 먼저 오겠구나."
첫새벽에 찾아온 인물은 윤지임이었다. 하인이 점쟁이에게 물었다.
"겨우 종 한 명만을 데리고 왔을 뿐인데 무슨 귀한 손님입니까?"
"아니다. 이분은 귀인이다."
윤지임은 점쟁이에게 사주를 내보였다. 위독한 딸 윤씨의 사주였다. 
"병이 매우 위독하기에 살 수 있는지 보러왔소."
"이 사주는 국모의 사주입니다. 나리는 임금의 장인이 될 것이오."
과연 얼마 후 윤씨는 회복되었고 그 해에 왕비로 간택되었다. 
열일곱 한창 나이의 윤씨가 왕비로 간택되자 궁중 한 구석에서는 우려가 일었다. 
그녀가 왕자를 낳을 것에 대한 우려였다. 윤씨가 왕자를 낳을 경우 궁중의 역학관계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문정왕후 소생의 왕자가 장경왕후 소생의 원자 호를 대신해 
중종의 뒤를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문정왕후는 왕비로  책봉된 후 10년이 지나도록 왕자를 낳지 못했다. 
그러던 윤씨가 비로소 꿈에도 바라던 아들을 낳은 것은 중종 29년, 왕비로 책봉된 지 
무려 17년 만의 일이었다. 그때 문정왕후 윤씨도 서른다섯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윤씨 소생의 왕자는 태어나자마나 경원대군에 봉해졌다.
경원대군이 태어났을 때 세자의 나이 이미 스무 살이었다. 강보에 싸인 아이와 왕권을 
다툴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중종이 세상을 떠나면 왕위를 이을 인물은 성년의  세자였다. 
누가 보더라도 성인인 세자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집념이 강한 문정왕후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보에 싸인 경원대군을 
임금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윤씨는 경원대군을 임금으로 만들기 위해 세력을 길렀다. 
그리하여 경원대군이 열 살이 될 무렵 문정왕후는 자신을 지지하는 당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당을 소윤이라 하는데,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당수였다. 
이들을 소윤이라 칭한 것은 윤자를 따르는 또 다른 당, 즉 대윤이라 불리던 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윤의 영수는 세자 호를 낳다가 사망한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이었다. 장경왕후 윤씨가 
문정왕후 윤씨보다 먼저 왕비가 되었으므로 장경왕후 계열의 당을 대윤, 
문정왕후 계열의 당을 소윤이라 부른 것이다. 
윤임은 장경왕후 소생의 왕자이자 자신의 외조카인 세자를 지지했다.
문정왕후의 후원을 받는 소윤은 차차 강성해지면서 대윤과 소윤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었다. 
세자를 지지하는 대윤과 경원대군을 지지하는 소윤의 다툼은  차기 왕권을 둘러싼 당쟁이었다. 
왕권을 둘러싼 두외척간의 당쟁은 중종이 참석한 경연에서 공공연히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치열했다. 
중종 38년 대사간 구수담이 조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풍문에 의하면 간사한 의논이 비등하여 '윤임을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을 소윤이라 하는데 
각각 당여를 세웠다'고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 있어 어찌 붕우와 족류가 없겠습니까만 
하필 왕실의 친척이라는 것을 지목하여 당여라는 의논이 비등하니 매우 음험한 사론입니다.“
대윤과 소윤 간의 당쟁의 동기는 소윤에게 있었다. 소윤이 이미 책봉된 세자를 끌어내고 
경원대군을 세우려 했던 것이 당쟁 발생의 시초였던 것이다. 문정왕후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자를 갈아치우려 했기 때문에 세자는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문정왕후가 세자를 
불에 태워 죽이려 했다고 전하는 야사는, 당시 세자가  당한 핍박의 강도를 말해주고 있다. 
야사는 어느 날 밤 세자가 잠을 잘 때 갑자기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에서 불이 났다고 전하고 있다. 
세자빈이 불길에 놀라 탈출하려 했으나 문이 밖에서 잠겨 있었다. 세자가 세자빈에게 말했다. 
"내 전날에 죽음을 피한 것은 부모님에게 악한 소문이 돌아갈까 두려워서였는데, 
이제 밤중에 깊은 잠을 자다가 불에 타 죽었으면 그런 소문은 퍼지지 않을 것이니 
나는 피하지  않겠소, 빈궁이나 피해 나가시오."
지아비가 불에 타 죽겠다는데 세자빈이 홀로 살겠다고 나갈 수는 없었다. 
놀란 시종들이 피하려고 권해도 세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자가 불길을 빠져 나가려 하지 않자 
시종들은 중종에게 달겨 가 고했다. 중종이 급히 달려와 보니 둥궁이 불바다였다. 
"백돌아! 백돌아!"
다급해진 중종은 세자의 아호를 불렀다. 세자는 그제서야 아버지가 부르는데 나가지 않고 
타 죽는 것 또한 불효라는 생각에 불길을 헤쳐 나왔다고 한다. 이 사건을 '작서의 변'이라고 한다 .
문정왕후가 쥐꼬리에 불을 붙여 동궁에 들여보내 불이 났다는 뜻이다. 
작서의 변은 이보다 훨씬 전인 중종 22년에도 있었다. 
세자의 열두 번째 생일날 사지와 꼬리가 잘리고 입과 귀, 눈을 불로 지진 쥐 한 마리가 
동궁의 북쪽 정원 은행나무에 걸린 것이다. 이때는 문정왕후가 아직 아들은 낳기 전으로, 
중종의 후궁 경빈 박씨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아들 복성군과 함께 서인으로 강등되어 쫓겨났다. 
그러나  사건 발생 5년 후에 범인이 권신 김안로의 아들 김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거듭되는 작서의  변은 어머니가 없는 세자의 지위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를 잘 말해준다.
불붙은 쥐를 동궁에 들여보낸 장본인이 문정왕후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것은, 
세자 핍박의 한 가운에 문정왕후가 있다는 증거였다. 중종은 세자를 사랑했으나 문정왕후도 
총애했기 때문에, 문정왕후를 추궁하기 보다는 감싸 안으려 했다. 동궁에 불이 났을 때도 
중종은 이 불이 방화가 아니라 한 궁녀의 실화라고 주장에 파문을 가라앉히려 했다.
"전에 동궁에 불이 난 사건을 끝까지 추문하려 했으나 일이 분명하지 못해서 추문하지 않았다. 
불이 처음 났을 때 내게 고한 자들이 무수비의 방에서 불이 났다고 하기에 내가 직접 가서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세자가 불을 피해 앉아 있기에  데리고 대내로 왔는데 그 불은 당초 
밖에서 난 것이 아니었다. 환관들에게 들어보니 한 방  안에 네 명의 잡물을 두었는데 덕지라는 
여종이 제 집의 목면을 그 방에 보관해두고는 밤에 살펴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등불을 떨어뜨렸다고 한다. 그 여종이 열쇠를 쥐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나 문을 열 줄 몰랐다. 
문을 바로 열지 못했으므로 불을 즉시 끄지 못하여 불길이 매우 치열해졌다고 한다. 
따라서 그 불은 처음 잠긴 방에서부터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중종은 문정왕후를 두고 떠도는 항간의 소문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중종은 
항간의 소문처럼 불이 밖에서 난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났으며, 문이 밖에서 잠겨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안에서 잠겨 있었다고 말했지만, 덕지가 문을 열 줄 몰랐다면 어떻게 잠긴 방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라는 기초적 의문도 해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말은 설득력이 없다. 
중종마저 세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으니 세자의 지위는 점점 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조정 신하들은 대윤과 소윤으로 갈려, 차기 임금을 미는 불안한 게임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다. 
중종이 사망하기 두달 전인 재위39년 9월에도 이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었다. 
영사 홍언필은 대윤,소윤에 대해 중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대윤 당이라는 것은 동궁을 부호하고 소윤 당이라는 것은 대군에게  마음을 두었다 하는데, 
위에 주상이 계신데도 사사로이 동궁을 부호하는 자는 간사한 꾀를 형용할 수 없는 소인일 것이고 
대군에게 마음을 두는 자라면 패역의 정상을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릇 이런 말이 도는 것은 
동궁에게 후사가 없기  때문인데 동궁에게 조만간 후사가 있게 되면 종사와 신민의 복이겠고, 
불행히 후사가 없으면 종사의 만세를 위한 계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대군이 많지 않고 
한 사람이 있을  뿐이므로 형제 사이에 조금도 의심이 없는데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홍언필의 말처럼 문제는 세자에게 후사가 없다는 데 있었다. 당시 세자의 나이 이미 서른이었으나 
불행히 후사가 없었다. 만약  세자에게 후사가 있었다면 소윤은  발호하지 못했을 것이며, 
설혹 세자에게 이상이 있더라도 세손이 뒤를 이를  것이므로 세자를 흔들지 못했을 것이다 .
그러나 세자는 정비 인성왕후 박씨와 후궁 귀인 정씨를 두었음에도 끝내 후손을 생산하지 못했고, 
그 공백을 문정왕후의 소윤이 파고들었다. 세지만 없으면 홍언필의  말대로 
"대군이 많지 않고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으므로 유일한 대군인 경원대군이 
뒤를 이을 것이었다. 이즈음에는 중종도 훗날 두 당 사이에 살육전이 벌어질 것을 
염려할 정도로 중종의 후사를 둘러싼 당쟁은 심각하였다.
"소인이 군자를 해칠  때에는 반드시 붕당이라 지칭하여
 일망타진하니 지극히  염려스럽다."
중종의 이 우려는 정확한 예언이었다. 
그러나 당쟁에 대한 중종의 한계는 뚜렷했다. 
중종은 과거 조광조 중심의 사림파는 명분도 신의도 저버린 채 과감하게 제거했으나, 
세자의 지위를 흔드는 당파의 제거에는 소극적이었다. 
그 소극성 때문에  세자는 혼란스런 조정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되었다. 
중종이 재위 39년 11월 사망함으로써 세자 인종이 즉위했으나, 
그는 모든 백성의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고 
더욱이 소윤에게는 충성의 대상이 아니었다. 
인종의 즉위로, 소윤과 인종의 정면충돌은 불가피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