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누가 왕을 죽였는가

1. 제 12대 인종 <2>

늘푸른 봄날처럼 2019. 1. 27. 14:48



■ 제12대 인종 

■ 폐비 신씨와 두 윤씨 왕후
인종의 아버지 중종은 맏아들이 아니었으므로 왕이 될 수 없었다.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이었고 성종의 맏아들은 폐주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조선의 역대 임금 중,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른 유일한 임금이었다.  
탁월한 시인이었던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 이데올로기를 거부했다. 
그는 공자를 모신 성균관을 기생들의 유원지로 삼음으로써, 
조선에서 그 누구도 거부하지 못했던 공자마저 무시했다. 
성균관에 모셨던 공자 이하 모든 선현들의 위패는 고산암으로 내쳐졌다가 
다시 음악을 맡아보는 관청인 장악원에 방치되었다. 
이렇듯 사대부들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공자의  위패를 방치하고 제사까지 폐지한 것은  
큰 사건이었다. 이는 조선의 지배이념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서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아랑곳 하지 않고 국립 관료 양성소인 태학의 선비들을 쫓아내고 
무당을 불러 모아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만약 연산군이 자신의 쾌락과 유흥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리학에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런 행위를 했다면 
그는 오늘날 새로운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기조의 이념과 가치 체계를 우숩게 여겼을 뿐,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정치이념이나 
가치 체계를 수립하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연산군이 성균관과 태학을 폐하자 사대부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선은  임금 개인의 나라가 아니라 전체 사대부들의 나라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결국 사대부둘은 1506년 쿠데타를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낸다. 이것이 중종반정이다. 
조선 개국 이래 최초로 신하들이 임금을 끌어내린 이 사건은, 중종의 이름을 따 
'중종반정'이라고 불렀지만 정작 중종은 반정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반정 당일 반정군이 사저를 에워싸자 진성대군은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오해해 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부인 신씨의 만류로 하인을 시켜  집 주변을 살펴보니 말 머리가 집 밖으로 향해 있어, 
자신을 죽이려는  군사가 아님을 알고 자살하지 않았다. 
자신의  집을 에워싼 군사가 자신을 죽이려는 연산군의 군사인지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반정군인지도 몰랐던 진성대군이 반정 초에 힘을 가질 수 없음은 분명했다.
즉위 초에 중종이 어떤 처지였는지는 부인 신씨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중종의 장인은 연산군 때 좌의정 신수근이었는데, 그는 연산군의 처남이기도 했다. 
즉 연산군의 부인 신씨가 신수근의 여동생이었던 것이다. 
진성대군을 추대하기로 결정한 반정세력에게 신수근은 어떻게는 처리해야 할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반정세력의 핵심 인물인 박원종이 신수근을 찾아가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소중합니까?"라고  물었다. 
이는 곧 연산군을 선택하겠는가 아니면 진성대군을 선택하겠는가 하는 물음이었고, 
동시에  누이를 포기하고 딸을 선택하라는 권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수근은 연산군을 선택했다.
"임금은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신수근은 반정군의 제의를 거부해, 결국 반정 당일 반정세력에게 처형되고 만다. 
이렇게 되니 중종의 부인 신씨가 문제가 되었다. 
반정세력으로서는 자신들이 추살한 인물의 딸을 왕비로 받들 수 없었다.  
중종은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반정공신들이 신씨  폐출을 주청하자 
'조강지처'를 버릴 수 없다고 주저했으나 이들은 강경했다. 
"사사로운 정 때문에 종사의 대사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빨리 결단하십시오." 
권력과 사랑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중종은 권력을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신씨는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정 7일 만에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해 숙의로 있던 윤여필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니, 그녀가 바로 장경왕후 윤씨였다. 
윤씨는 중종 10년인 1515년 아들을 낳았지만 산후조리를 잘못해 7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때 낳은 아들이 인종이다.
장경왕후 윤씨가 죽은 지 2년이 지나 새로운 왕비 책봉 문제가 대두되면서 조정은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신진 정치세력인 사림파가 새 왕비를 책봉하지 말고  반정 직후 
사저로 쫓겨난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자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먼저  사림파인 순창 군수 김정과 담양 부사 박상이 중종의 구언을 이용해 문제의 상소를  올렸다. 
"원자가 강보 속에 있는데 친아들 복성군이 있는 숙의 박씨같은 후궁을 왕비로 책봉하면 
원자의 처지가 어려워질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들의 언사는 명분과 의리에 목숨을 거는 사림파답게 거침이 없었다. 
"신씨를 폐한 것은 무슨 명분이 있습니까? 반정 때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이 
신수근을 죽이고 나서 훗날 환난이 미칠  것을 두려워해 보전책으로 폐비시킨 것이니,  
이 일은 본래 무고하고 또 명분도 없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정공신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왕비를 페위시켰다는 주장이었다. 
이때는 반정공신들이 세상을 떠난 뒤였으므로 이런 상소를 올릴  수 있었지만, 
이는 반정의 정당성 자체를 부인하는 발언이었다. 상소 내용에 놀란  중종은 
파문을 우려해 상소문을 승정원에 두어 공론화시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반정이념 자체를 부인하는 엄청난 내용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사실 신씨가 복위되어도 문제였다. 
대사간  이행이 대사헌 권민수에게 물은  내용은 이런 문제를 말해준다. 
"만약 신씨를 왕위로 세웠다가 왕자가 태어나 가례의 순서를 따지게 되면  
전하께서 잠저에 계실 때 혼인한 신씨가 먼저가 되니 이 경우 원자의 처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씨는 중종과 연산군 5년인 1499년에 가례를 올렸고, 
장경왕후  윤씨는 중종 2년인 1507년에 가례를 올렸으니 신씨가 8년 먼저였다. 
만약 신씨가  복위된 후 아들을 낳으면 신씨의 아들이 원자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신씨 복위를 주장한 
김정과 박상의 상소는 사론으로 몰렸고, 
중종도 비망기를 내려 이들을 질책했다. 
반정세력은 이들의 상소를 옥사로 확대시키려 했으나 
사림파인 정언 조광조가 무마하는 바람에  귀양으로 일단락되었다. 
사림파의 신씨 복위 주장은 결국 무위로 돌아갔고, 
중종  재위12년인 1517년 윤지임의 딸이 계비로 간택되었다. 
당시 중종의 나이 서른 살이었으나 윤씨는 이팔청춘을 갓 지난 열일곱 살이었다. 
이처럼 앳된 나이에 조선의 국모가 된 문정왕후 윤씨가 
훗날 조선 사대부들의 표적이 될 줄을 가례 당시만 해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윤씨는 심지어 사대부들로부터 '여왕'이란 비난을 받았으며, 
이보다 더한 소문, 즉 인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에 휩싸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