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한국사의 亂 ■ 김흠돌의 난 / 신라 늘푸른 봄날처럼 2019. 1. 26. 23:06 ■ 김흠돌의 난 김흠돌(金欽突), ? ~ 681년 (신문왕 1) 신라 중대의 장군 반란자 가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딸이 신문왕 비가 된 것을 보면 왕과 가까운 혈족이었을 것이다. 김유신(金庾信) 김인문(金仁問)을 도와 고구려 정벌에 큰 공을 세운 대표적인 장군이다. 661년 (문무왕 1) 7월 고구려 원정군 편성에 김인문 김진주(金眞珠)와 같이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참여해 김유신을 도와 시이곡정(始飴谷停)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백제 잔민의 반란 진압이 급선무였고 또한 군량미 보급이 주 임무여서 중도에서 회군하였다. 668년 6월에는 대아찬(大阿飡)으로서 김인문 김흠순(金欽純) 천존(天存)문충(文忠) 진복(眞福)지경(智鏡) 양도(良圖) 개원(愷元) 등과 함께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전국의 총관과 병마를 동원해 고구려 정벌을 떠났다. 그 해 9월 평양성을 함락했으며 출정의 공으로 파진찬(波珍飡)이 되었다. 곧이어 소판(蘇判)으로 승진했으나 그 뒤의 기록은 없다. 신문왕비가 된 딸은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681년 (신문왕 1) 8월에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모반을 꾀하다 주살되었다. 곧이어 그 딸 신문왕 비도 폐출되고 신문왕은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모반 죄목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고 다만 김군관(金軍官)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신문왕의 교서 내용뿐이다. 즉 왕의 장인으로서 역모를 했으며 이를 고발하지 않았다고 병부령인 김군관이 처형된 것을 보면 상당히 큰 사건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무엇보다도 신문왕의 전제 왕권 확립이나 제도 정비 및 율령 정치 구현의 한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불휼국사(不恤國事)나 수명망구(授命忘軀) 등 7세기 이후 더욱 강화된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과 투철한 국가관이다. ●가족 관계 ◐선대 ◎조부 : ? ◎조모 : ? ◎아버지 : 달복(達福) ◎외조부 : 김서현(金舒玄) ◎외조모 : 만명부인 김씨(萬明夫人 金氏) ◎어머니 : 정희(政姬) ◎동복동생 : 흠운(欽運):흠신(欽信) ◎매제 : 제26대 풍월주 진공 ◐부인과 후손 ◎부인 : 진광(晉光) - 제15대 풍월주 유신공의 딸 ◎딸 : 폐비김씨(廢妃 金氏) ◎사위 : 신라 제31대 국왕 신문왕(神文王) ◎정인 : 언원(言元) - 진평왕의 손녀 ◎아들 : 제31대 풍월주 흠언(欽言) ◎생모미상자녀 딸 : 기록없음 - 선품공과 사통 ◎딸 : 기록없음 ◎사위 : 제30대 풍월주 천관(天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