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태일초례청사문(祈雨太一醮禮靑詞文) / 권근(權近)
비 내리기를 비는 태일 초례 청사문(祈雨太一醮禮靑詞文) / 권근(權近)
초헌(初獻)
하늘은 백성으로부터 보고 들어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반드시 따르고, 달이 필(畢)1)에 걸리면 비가 줄줄 오게 되어 그 음함이 매우 빠릅니다. 이럼으로써 깨끗한 기도를 닦아 참 은혜에 흠뻑 젖기를 기대하옵나이다.
이헌(二獻)
도(道)는 하나를 얻어서 가장 높게 되어 묵묵히 생성(生成)의 화(化)를 운행하고, 예(禮)는 두 번을 행해야 더욱 공경하게 되므로, 밝게 이르는 마음을 다하여 이제 부지런히 모시오니, 성한 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삼헌(三獻)
하늘은 사사로움이 없어 덕 있는 사람을 도와주시는데, 항상 총명하게 굽어 살피시고, 사람에게 과실이 있어 괴이한 일은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니, 어찌 두려워하여 닦고 살피지 아니하겠나이까? 구부려 지극한 정성을 다하고 우러러 현묘한 기틀을 찾나이다. 돌아보건대 덕이 적은 몸으로 외람하게도 큰 대통을 이어 정사는 덕으로써 해야 하므로 밤낮 없이 조심하고 부지런해야 함은 아오나 하는 일은 번거롭기만 하니 어찌 상과 벌이 참람함을 면하겠나이까? 이것이 어그러진 기운을 불러, 나쁜 징조가 겹쳐 이르러 가뭄의 재앙이 되어, 봄에 비가 오지 않더니 여름에는 더 심하고, 명충(螟虫)2)이 곡식을 해쳐 싹도 먹고 잎도 먹어 마침내 병들었습니다. 선조(先祖)의 꺾임을 아프게 여긴지라 제사지내지 아니한 신이 없습니다. 비록 두루 빠짐없이 기도하였으나, 드러난 보응을 받지 못하였나이다. 겨우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는가 하면 곧 바로 해가 쨍쨍 나오고, 또 김맬 달에 우박이 떨어져서 이미 농사가 손상을 입었고, 하물며 장마철에 눈이 내리니 더욱 사람들이 듣고 놀랐습니다. 어찌 곡식만이 모두 말라 죽을 뿐이리까? 초목까지도 모두 타버립니다. 이런 것은 비록 인사(人事)에 허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천심(天心)의 생물(生物)을 이지러지게 하지 않을까 염려되옵나이다. 덕 없는 소자(小子)인 나4)야 진실로 견책을 받아도 마땅하오나, 저 죄 없는 백성들의 헐벗고 굶주림을 어찌 차마 보겠나이까? 매양 이것을 생각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어찌 나를 만나서 이런 고통을 당하는고 하옵니다. 선택[簡]하심은 상제의 마음에 있사오나, 백성을 위하여 비를 청함이 옳을 것으로 생각하옵고, 사람[伻]5)을 도전(道殿)6)으로 달려 보내 엄숙하게 기도의 의식을 펴오니, 진실한 정성이 밝고 밝은 살피심을 이르게 하며, 요사스러운 기운을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알맞은 비가 두루 적시어, 사시가 순행하여 만물이 생육하며 천도(天道)는 순조로워 어김이 없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육부(六府)7)가 닦여지고 삼사(三事)8)가 다스려져, 민생은 더욱 부유해져서 기자(箕子) 홍범구주(洪範九疇)9)에 복을 거두게 하고, 햇수는 주나라 구정(九鼎)10)을 넘도록 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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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畢): 별이름. 서방 백호 7수(西方白虎 七宿) 중의 하나로, 호랑이의 상(주둥이)에 해당한다.
2) 명충(螟虫): 벼의 마디를 먹는 벌레.
3) 나: 원문 ‘予’. 임금을 대신하는 글이므로 ‘나[予]’라는 지칭을 한 것으로 보인다. ?훈민정음? 「어지(御旨)」, ?일성록(日省錄)? 등에서 국왕을 1인칭인 '여(予 · 나)'로 기록하고 있다.
4) 나: 원문 ‘我’. 백성들이 만나는 ‘나’이므로 ‘予’가 아닌 ‘我’을 쓴 듯하다.
5) 사람[伻]: ‘伻’은 부릴 팽(사람[亻]을 평평하게[平] 다스리다. 부리다)→심부름꾼.
6) 도전(道殿): 도교에서 신을 모셔놓은 사당.
7) 육부(六府): 금ㆍ목ㆍ수ㆍ화ㆍ토ㆍ곡[穀].
8) 삼사(三事): 정덕(正德)ㆍ이용(利用)ㆍ후생(厚生).
9) 홍범구주(洪範九疇): 홍범구주(洪範九疇)란 조선의 기자(箕子)가 주(周) 무왕(武王)이 선정 방안을 물었을 때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이치를 이용하여 보인 9가지 법칙이다. 홍범(洪範)이란 우(禹)왕이 요순(堯舜) 이래의 정치, 도덕, 사상을 집대성한 우주자연과 세상사회의 대헌법(大憲法)을 말한다.
10) 구정(九鼎): 하(夏)의 우왕(禹王)이 구주(九州)에서 금을 거두어 들여 만든 솥. 하(夏)·은(殷) 이래 전국보(傳國寶)로 삼았다. 따라서 대대로 계속 이어지게 해 달라는 뜻.
♣해설
이 글은 ?동문선? 제115권에 실린 「청사(靑詞)」이다. 청사(靑詞)는 도교(道敎)의 제사에 쓰는 문체와 문장을 말한다. 청등지(靑藤紙)라는 청지에 주자(朱字)로 쓰기 때문에 청사라고 한다. 한마디로 기우제(祈雨祭)의 제문(祭文)인 셈인데, 도교적인 의식(儀式)에 해당한다. 제문이야 당연히 수필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문학개론?(한국문학개론편찬위원회 편, 혜진서관, 1991.)에서는 상량문(上樑文), 제문(祭文), 축문(祝文), 도량문(道場文), 재사(齋詞), 청사(靑詞), 애사(哀詞), 뢰(誄), 행장(行狀), 비명(碑銘), 묘지(墓誌) 등은 모두 수필(隨筆)’로 분류하였다.(p.543 참조.)
지은이 권근(權近:1352-1409)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양촌(陽村),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우왕 때 친명정책(親明政策)을 주장하여 원나라 사절의 영접을 반대하였고, 이후 수차례 유배생활을 하면서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후일 이황(李滉)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이 개국되자 1393년(태조 2)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짓는 등 새 왕조에 출사하여,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예문관 대제학, 대사성,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등을 역임하였고, 왕명으로?동국사략(東國史略)?을 찬하였다. 문집으로 ?양촌집(陽村集)? 등이 있고, 작품으로는 「상대별곡(霜臺別曲)」이 있다.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하였으나, 이 글과 같이 큰 가뭄 따위가 들 때에는 도교적인 행사도 마다하지 않았음을 볼 수가 있다.
참고로 가물이 계속될 때 틀림없이 비를 내리게 해주는 기우제의 주문) 하나를 보자.
“龍雨龍雨龍雨龍龍龍不雨龍龍龍雨龍雨.” 해석이 만만치 않은데, 이 글은 일단 다음과 같이 띄어 써 놓고서 보아야 한다.
“龍雨 龍雨 龍雨龍龍 龍不雨龍龍 龍雨 龍雨.”
“용아 비를 내려라, 용아 비를 내려라, 용이 비를 내려야 용이 용이지, 용이 비를 내리지 아니하면 용이 용인가, 용아 비를 내려라, 용아 비를 내려라.”11)
이 주문을 외면 틀림없이 용이 비를 내려줄 것이다. 용도 체면이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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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용아 비를 내려라: 권중구(權重求). ?한문대강(漢文大綱)?, 통문관(通文館), 1971.10. ‘권두사’의 내용을 변형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