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 백거이(백낙천) (白居易(白樂天)
409. 백거이(백낙천) (白居易(白樂天)
민중을 위한 문학과 정치를 지향한 최고의 민중파 시인이다. 현존하는 작품은 약 2,800수로, 당나라 때의 시인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다. 『백씨문집(白氏文集)』이 전해지며, 전편에는 풍유(諷諭) · 한적(閑適) · 감상(感傷)과 관련된 200여 수와 잡률(雜律) 약 800수, 후편에는 격시[格詩, 고체시(古體詩)] 약 200수, 율시[근체시(近體詩)] 약 1,200수가 분류되어 실려 있다.
당나라 중기의 시인(772~846)으로, 자는 낙천(樂天)이며,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이다. 가난한 지방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6세 때 시단에 이름을 알렸고, 29세 때 과거에 합격해 순조로운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정치적 이상에 불타, 문벌 출신의 관료와 궁정을 지배하는 환관 세력의 악에 대항하는 강직한 선비로 알려졌다. 풍유시의 대부분과 「장한가(長恨歌)」는 이 시기의 작품이다.
그의 거리낌 없는 언행은 권력자의 미움을 샀고 결국 44세 때 월권행위를 구실로 강주(江州) 지사고문(知事顧問)이라는 한직으로 쫓겨났다. 3년에 걸친 그 생활은 그의 내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때부터 불교와 도교에 접하면서 자신의 내면과 삶을 청정하게 유지하려는 한적(閑適)의 정을 노래하는 작품이 늘어났다. 뒤에 충주(忠州) 지사가 되어 백성들로부터 민생을 중시하는 훌륭한 지사로 찬양을 받아 이윽고 중앙 정부로 복귀했는데, 언행이 한층 신중해지고 예전의 전투적 성향은 사라졌다.
그즈음부터 신관료와 구관료의 항쟁으로 유명한 ‘우이당쟁(牛李黨爭)’이 격화되기 시작했으나, 그는 그 대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방으로 전출되어 항주와 소주의 지사를 역임한 뒤, 수도로 돌아와 57세의 나이에 법무차관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자연에 은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점점 강해져 병을 구실로 황태자 고문이라는 한직을 얻어 낙양으로 이주한 뒤 다시는 장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72세에 법무대신 칭호를 받고 벼슬에서 물러나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재상의 지위를 추증(追贈)받았다.
그의 생애는 천하의 백성을 구하려는 ‘겸제(兼濟)’의 뜻과, 물러나 일신을 깨끗이 지키려는 ‘독선(獨善)’의 갈등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시를 겸제의 뜻을 표현한 ‘풍유시’, 독선을 갈구하는 ‘한적시’, 애상을 노래하는 ‘감상시’, 운율과 수사의 미를 중시하는 근체(近體)의 ‘잡률시’ 등 크게 4가지로 구분한 뒤, 스스로 풍유시를 최상으로 삼고, 한적시와 감상시가 그 다음이며, 잡률시는 취미 정도라고 했다. 그는 『시경』에 나오는 민간 가요의 사회성을 중국 시의 귀중한 전통이라 여기고, 그것을 실제 시작에 응용한 민중파 시인의 최고봉이다. 작품은 평이하고 통속적인 취향을 드러내어 문학을 모르는 서민이라도 들으면 알 수 있게 했다. 속어를 대담하게 사용하고 민간 가요풍의 표현을 근체시의 영역으로 끌어왔다. 형식뿐 아니라 내용에서도 고답적인 문인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같은 민중시인으로 칭송받는 두보와 크게 다르다.
1. 풍유시(諷諭詩)
정치나 사회 현상을 풍자한 시로서 악부(樂府, 한나라 때의 민간 가요로 구절 수와 글자 수에 정해진 규칙이 없다)의 형태에 착안한 「신악부」 50편이 여기에 속한다. 그 가운데서도 궁중의 기관인 물자조달국의 전횡을 비판한 「매탄옹(賣炭翁)」(숯 파는 늙은이), 침략 전쟁의 비참함을 호소한 「신풍절비옹(新豊折臂翁)」 등이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매탄옹」
賣炭翁
숯 파는 늙은이
伐薪燒炭南山中
남산에서 나무를 베어 숯을 굽는다.
滿面塵灰煙火色
연기와 재로 시커먼 얼굴
兩鬢蒼蒼十指黑
잿가루를 뒤집어쓴 머리와 새카만 열 손가락.
賣炭得錢何所營
숯 팔아 번 돈 어디다 쓰는가 하니
身上衣裳口中食
겨우 옷 한 벌 걸치고 목구멍에 풀칠만 하지.
可憐身上衣正單
입고 있는 옷 고작 홑겹이지만
心憂炭賤願大寒
행여 숯 값이 떨어질까 봐 추워지라고 빌고 있네.
夜來城外一尺雪
어젯밤 성 밖에 눈이 한 자 내려서
曉駕炭車輾氷轍
새벽에 수레 몰고 빙판길 위로 숯을 나른다.
牛困人飢日已高
해는 중천에 떠서 소는 지치고 사람은 허기지네.
市南門外泥中歇
시장 남문 밖 진흙길에 앉아 쉬고 있노라니
翩翩兩騎來是誰
기세등등하게 달려오는 저기 말 두 필.
黃衣使者白衫兒
노란 옷의 사자와 하얀 옷의 젊은이
手把文書口稱勅
손에는 공문서, 입으로는 칙령이라 외치며
廻車叱牛牽向北
수레를 북쪽 궁중으로 돌려 끌고 가 버리네.
一車炭重千余斤
수레 가득 실은 숯은 1천 근
客使驅將惜不得
관리를 상대로 어찌 싸우리.
半匹紅綃一丈綾
고작 붉은 비단 반 필과 무늬비단 한 조각만
繫向牛頭充炭直
소머리에 걸어 놓고 숯 값이라 하는구나.
2. 한적시(閑適詩)
조용히 즐기는 심경을 노래한 시를 말한다. 백거이 자신이 이 항목으로 분류한 것은 모두 고체(古體) 작품들인데, 근체(近體, 잡률) 작품에도 한적의 정을 노래한 시가 많다. 다음에 소개하는 시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향려봉하신복산거초당초성우제동벽
(香爐峰下新卜山居草堂初成偶題東壁)」
日高睡足猶慵起
해는 높이 솟고 잠은 깼지만 일어나기 싫어
小閣重衾不怕寒
이층에 이불을 깔아 두고 따뜻함을 즐기네.
遺愛寺鐘欹枕聽
머리맡에 울리는 유애사 종소리에
香爐峰雪撥簾看
발을 걷으니 눈 덮인 향려봉(香爐峰)이 눈에 가득하다.
匡廬便是逃名地
여기 여산은 세상과 동떨어진 별천지
司馬仍爲送老官
사마라는 관직도 늙은 몸에는 과분한 사치.
心泰身寧是歸處
마음 고요하고 몸이 편한 곳이 본래 자리이니
故鄕何獨在長安
장안만이 어찌 고향이라 하리오.
3. 감상시(感傷詩)
인간의 슬픈 정을 노래한 시이다. 부모와, 친구, 연인을 생각하고 사계절의 풍물에 마음을 태운다. 그리고 명확하게는 말하지 않지만 이상을 이루지 못한 고뇌가 담긴 작품도 많다.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2편이 가장 유명하다. 특히 현종 황제와 양귀비의 비극을 각색한 백거이의 「장한가」는 불후의 명작이다. 전편 120구 840자로 이루어진 장편인데, 그 가운데 원문의 일부를 인용하고 개요를 소개하겠다.
「장한가」
漢皇重色思傾國
황제는 여색을 밝혀 아름다운 여인을 구했으나
御宇多年求不得
여러 해가 되도록 얻지를 못했다.
楊家有女初長成
양씨 집안에 딸이 있어 겨우 장성하였는데
養在深閨人未識
규중에 갇힌 몸이라 사람들이 모르는구나.
天生麗質難自棄
천성의 아름다운 자태 그래도 숨길 수 없는 법
一朝選在君王側
궁중으로 뽑혀 가 군왕을 모시게 되었네.
回眸一笑百媚生
눈동자 굴려 한 번 웃으면 백 가지 교태가 나타나니
六宮紛黛無顔色
육궁의 미녀들 모두 빛이 바래 보이네.
春寒賜浴華淸池
추운 봄날 화청궁(華淸宮)에서 목욕을 하니
溫泉水滑洗凝脂
온천물이 기름 엉긴 살결을 부드럽게 씻어 주네.
侍兒扶起嬌無力
부축해 일으키는 시녀에게 힘없이 몸을 맡기네.
始是新承恩澤時
아, 오늘 밤 처음으로 황제의 은총을 받을 것이니
雲鬢花顔金步搖
구름머리에 꽃 같은 얼굴을 하고 걸을 때마다 금장식이 하늘거리네.
芙蓉帳暖度春宵
꽃무늬 장막에 싸여 따스한 봄밤은 깊어 가는데
春宵苦短日高起
봄밤은 왜 이리 짧은지, 일어나니 해 높이 떠 있네.
從此君王不早朝
그 후로부터 황제는 나랏일을 돌보지 않네.
황제는 양귀비와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밤이고 낮이고 같이 지냈고, 양씨 일족을 모두 제후로 봉했다. 그러자 세상의 부모들은 행여나 하는 마음에 딸만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 일행은 촉 땅으로 도망쳤는데, 도중에 근위병의 불만이 폭발해 불쌍한 양귀비는 희생양이 되어 싸늘한 주검으로 변하고 말았다. 슬픔에 빠진 황제는 도성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제의 고통을 보다 못한 한 도사가 법력으로 양귀비의 혼백을 찾다가 마침내 동해의 신선이 사는 섬에서 선녀가 된 그녀를 발견했다. 선녀는 금비녀를 둘로 잘라 하나를 도사에게 주면서 금비녀처럼 지금은 비록 명계에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臨別殷勤重寄詞
헤어질 때 간곡히 말하기를
詞中有誓兩心知
말 가운데 맹세가 있으니 두 사람만이 알리라.
七月七日長生殿
7월 7일에 장생전(長生殿)에서
夜半無人私語時
깊은 밤 사람이 없을 때 속삭이던 말씀.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는 두 가지가 하나로 붙은 나무 연리지가 되자고.
天長地久有時盡
영원해 보이는 하늘과 땅도 다할 날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이 한은 끊일 날 없으리.
4. 잡률시(雜律詩)
다양한 율시(음악적 규칙을 가진 시, 곧 근체시)라는 뜻이다. 형식미를 중시하는 시체이므로 백거이 자신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작품 수가 가장 많고 배율(排律)처럼 경직되고 난해한 시 형식을 구사해 100~200구에 달하는 걸작을 창작하는 등 경이로운 재능을 보였다.
제재는 한적함과 감상, 증답(贈答), 서경(敍景) 등 여러 가지이며, 애창하기에 적합한 노래가 적지 않다. 가벼운 표현의 이면에 정치적 고뇌가 감추어진 경우가 많다. 다음에 소개하는 시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팔월십오일야금중독직대월억원구
(八月十五日夜禁中獨直對月億元九)」
銀臺金闕夕沈沈
어전도 궐문도 조용한 밤
獨宿想思在翰林
한림원에 숙직하며 누구를 생각한다.
三五夜中新月色
오늘은 보름밤, 새로 떠오른 달을 보고
二千里外故人心
2천 리 먼 땅에 있는 옛 친구의 마음 떠올린다.
渚宮東面煙波冷
그쪽 물가의 궁전에는 차가운 파도 치겠지
浴殿西頭鐘漏深
여기 서쪽 궁에는 물시계 소리 들린다.
猶恐淸光不同見
저 달은 여기나 거기나 한결같이 밝을는지
江陵卑濕足秋陰
강릉은 어둡고 음습한 곳이라 하던데.
백거이는 정치적으로나 문학적으로 가장 절친했던 동지 원진(元稹)을 그리며 이 시를 썼다. 원진은 그때 좌천되어 강릉에 가 있었다고 한다.
「동중편복」
千年鼠化白蝙蝠
천 년 묵은 쥐는 하얀 박쥐로 변신하여
黑洞深藏避網羅
그물을 피해 깊은 동굴로 숨었다네.
遠害全身誠得計
몸을 지키기 위해서야 좋은 계책이지만
一生幽暗又如何
평생 어둠에 숨어서 어찌 살려 하나.
70세 무렵에 숭산(嵩山)에 놀러갔다가 동굴 속의 박쥐를 보고 즉흥적으로 지은 시인데, 여기서 박쥐는 바로 백거이 자신을 비유한다. 관직에서 물러나는 날까지 정치적으로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치지 못했던 작자의 씁쓸한 마음을 엿볼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