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전 /소설과 희곡

306.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늘푸른 봄날처럼 2019. 1. 15. 20:11

306.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 저작자 나관중(羅貫中

 

1494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후한 말기에 조조(曹操), 손권(孫權), 유비(劉備)가 건국한 위(), (), ()의 흥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각 장으로 나누어 사건을 서술한 구어체 소설로, ()나라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를 평이하게 다시 쓴 것이다. 정사가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기술한 데 반해, 이 책은 촉나라의 유비가 한나라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 유비를 중심으로 서술했다.

 

작자 나관중의 이름은 본(), 자는 관중(貫中)이다. 호는 호해산인(湖海散人)이며, 태원(太原) 사람이라고 한다. 원나라 말기에 태어나 명나라 초기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삼국지연의외에 현재 알려진 것은 수당지전(隋唐志傳), 잔당오대사연의(殘唐五代史演義), 삼수평요전(三遂平妖傳)등의 작품이 있고, 수호전(水滸傳)집필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또한 잡극 풍운회(風雲會), 비호자(蜚虎子), 연환주(連環珠)3편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삼국지연의는 나관중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다. 당나라 때에 벌써 삼국의 역사 이야기가 강석(講釋, 알기 쉽게 풀이한 이야기)의 재료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송나라 때에는 강담(講談, 강연식 이야기극) 속에서 삼국지이야기는 설삼분(說三分)1) 이라 하여 민중이 가장 즐기는 이야기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원나라에 이르러서는 그림과 글로 구성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가 간행되었는데, 여기서 비로소 삼국의 이야기는 이야깃거리에서 읽을거리로 변화했다. 나관중은 이 전상삼국지평화와 정사 삼국지를 토대로 하여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줄여서 삼국지연의또는 삼국연의)를 쓴 것이다.

 

현존하는 삼국지연의의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명나라 홍치(弘治) 연간의 갑인년(1494)과 가정(嘉靖) 연간의 임오년(1522)에 출판된 판본으로, 서문이 달린 24, 240절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홍치본(弘治本)’이라 한다. 그 뒤로도 다양한 판본이 나왔는데, 청나라 초기 사람인 모륜(毛綸)과 모종강(毛宗岡) 부자가 교정한 판본이 청나라 강희(康熙) 18년 전후에 출판되자, 그 이전의 판본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것을 모본(毛本)’이라 하는데, 종전에 간행된 판본의 2절을 1회로 하여 240절을 120회로 고치고 거기에 상세한 평을 달았다. 이후 모본만이 널리 읽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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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담사들이 세간에 떠돌던 이야기 중 삼국지와 야사만을 모아 이야기로 만든 것.

 

    

도원결의(桃園結義)

 

후한 말기, 환관이 권력을 장악해 기강이 흐트러지고, 흉작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특히 황건(黃巾, 노란 두건)을 두르고 장각(張角)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칭송하며 모시는 무리가 각지에서 일어나 관군도 손을 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예인 유현덕(劉玄德, 유비)이 관병을 모집한다는 방문(榜文)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뒤에서 누가 큰 소리로 불렀다.

 

대장부가 나라를 위해 일할 생각은 않고 한숨만 쉬다니!”

 

현덕이 뒤돌아보니, 키는 8척이나 되고, 표범 같은 머리에 고리처럼 생긴 둥그런 눈, 두툼한 뺨에 호랑이 수염, 천둥 같은 목소리에 달리는 말처럼 기세가 당당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기이해서 현덕은 그의 성과 이름을 물었다.

 

내 성은 장()이고, 이름은 비(), 자는 익덕(翼德)이오. 대대로 이 고장에 살고 있소이다. 나라에서 준 토지가 있고, 술과 돼지를 팔아 생계를 꾸리며 천하의 호걸들과 사귄다오. 마침 당신이 이 방문을 보고 한숨을 내쉬기에 무슨 영문인가 물어보고 싶었던 참이오.”

나는 한나라 왕실의 후손으로 성은 유, 이름은 비라 하오. 황건적이 난리를 일으키고 있으니 도적 떼를 물리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고 싶으나 힘이 미치지 못해 탄식한 것이라오.”

내게 약간의 재산이 있으니, 이 고장의 젊은이들을 모아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어떻겠소?”

 

현덕은 크게 기뻐하며 술집으로 가서 장비와 술잔을 주고받았다. 그때 한 거한이 수레를 끌고 다가오다가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사람을 불렀다.

 

냉큼 술 한 잔 갖다 주게. 관병에 들어가려면 빨리 성으로 가야 해.”

 

그 사람을 보니, 키는 9척에 수염은 2척이나 되고, 얼굴빛은 붉은 대추와 같으며, 입술은 연지를 바른 듯 붉고, 봉황의 눈에 누에 같은 눈썹을 하고 있었다. 현덕은 그 사람을 자리로 불러 이름을 물었다.

 

성은 관(), 이름은 우()라 하오. 자는 장생(長生)이라 하다가 지금은 운장(雲長)으로 바꾸었소이다. 하동(河東)의 해량(解良) 출신인데, 호족 놈이 위세를 떨기에 내 그놈을 죽이고, 5~6년을 이렇게 떠돌며 살고 있다오. 그러던 중에 도적을 물리치기 위해 군사를 모은다고 해서 이렇게 응모하러 온 것이오.”

 

현덕이 자기의 뜻을 이야기하자 운장도 크게 기뻐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장비의 집으로 가서 거병에 대해 의논했다. 장비가 말했다.

 

우리 집 뒤에 복숭아 밭이 있소이다. 지금 꽃이 만발하니, 내일 거기서 천지신명께 제사를 올린 뒤 우리 셋이 형제의 의를 맺고, 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아 거병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이에 현덕과 운장도 찬성했다. 다음 날, 세 사람은 복숭아 밭에 검은 소와 흰 말 등 제물들을 차려 놓고 향을 피운 뒤 2번 절을 하고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유비, 관우, 장비는 성은 다르나 마음과 몸을 하나로 하는 형제가 되어 어려운 사람을 돕고,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구하고자 합니다. 태어난 날은 서로 다르나 죽는 날은 같기를 바랍니다. 천지신명이시여, 우리의 뜻을 굽어살피소서.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저버리는 자는 하늘과 사람의 저주로 죽게 하소서.”

 

맹세를 한 다음, 유비가 맏형, 관우가 둘째, 장비가 셋째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인근의 장정 300여 명을 모아 의용군을 일으킨 세 사람은 여러 곳을 전전하며 도적 떼를 물리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권력자의 배경을 갖지 못한 그들은 변변한 대가도 받지 못했는데, 간신 동탁(董卓)을 치기 위한 낙양(洛陽) 공략에서 여포(呂布) 군대를 물리쳐 천하에 용맹을 떨쳤고, 그 뒤 평원현(平原縣)을 다스리게 되었다.

 

한편, 헌제(獻帝)를 데리고 장안(長安)으로 도망친 동탁은 장안 서쪽의 미()라는 곳에 황궁을 세우고 예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가 왕윤(王允)의 계략으로 여포에게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동탁이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 전해지자 동탁의 부하들이 장안으로 밀고 들어가 여포를 내쫓고 왕윤을 죽인 뒤 일시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이간질로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였고, 그 혼란을 틈타 헌제는 낙양으로 천도를 결행하고, 동군(東郡)의 태수로 있는 조조에게 수비를 명했다.

 

천하삼분(天下三分)의 계책

 

조조는 칙명을 받자, 대군을 거느리고 낙양으로 입성하여 폐허로 변한 낙양에서 헌제를 허창(許昌)으로 모시고 가 천하를 호령하는 직위를 얻었다. 지난날 조조와 함께 황건적을 물리쳤던 유비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조조의 전횡을 참다못해 조조를 칠 계략을 꾸몄다. 그리고 연금 상태에 놓여 있던 허창에서 도주한 뒤 바로 서주(徐州)를 탈환했다. 그러나 조조의 대군에게 공격을 당하고 참패해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서서(徐庶)라는 책사에게 남양(南陽)의 와룡강(臥龍岡)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이라는, 천하에 둘도 없는 책사가 은거하고 있으니 찾아가 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유비는 그 말에 따라 두 번이나 공명을 찾아갔으나 헛걸음만 하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삼세번이라는 말에 따라 세 번째 와룡강으로 향했다. 공명은 집에 있기는 했지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유비는 공명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데, 참다못한 장비가 불을 질러 공명을 깨우려 했다. 관우가 이를 겨우 말리고 또 잠시 기다렸다. 그때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큰 꿈을 누가 먼저 깨우는가?

나는 내 삶을 아노라.

사랑채에서 봄 낮잠을 잤는데도

창밖의 해는 길기도 하여라.

 

노래가 끝나자 그 사람은 기지개를 켜고 동자에게 말했다.

 

누가 왔느냐?”

유 황숙(황제의 숙부)께서 오셔서 오래도록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 빨리 알리지 않았느냐. 우선 옷을 좀 갈아입어야겠다.”

 

공명은 안으로 들어가 한참이 지나서야 의관을 갖추고 나왔다. 유비가 보니 공명의 키는 8척이요, 얼굴은 흰 옥과 같고 머리에는 굵은 실로 짠 푸른 두건을 두르고 있었으며, 몸에는 학의 깃털로 짠 도사복을 걸쳐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 유비는 인사를 하며 말했다.

 

한나라의 황실 족보 끝자락에 올라 있는 탁군(啄郡)의 어리석은 장부가 오래전부터 선생의 고명을 익히 들어 왔습니다. 두 번 찾아왔으나 공교롭게도 안 계셔서 이름만 적어 두고 갔는데 보셨는지요?”

남양의 야인이 게으른 탓에 장군께 여러 차례 수고를 끼치고 말았습니다.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두 사람은 인사를 마치고 제각기 자리에 앉아 동자가 내주는 차를 마셨다. 공명이 입을 열었다.

 

어제 편지를 보고 백성을 걱정하시는 장군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제가 미숙하고 재주가 없어서 장군께 도움이 되지 못함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사마덕조(司馬德操, 사마휘)와 서원직(徐元直, 서서) 님이 어찌 공연한 말을 하셨겠습니까? 청하건대 저를 내치지 마시고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덕조와 원직 두 분은 천하에서 찾기 힘든 인재이십니다. 저는 일개 농부로 어찌 천하의 일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 두 분이 잘못 추천하신 게지요. 장군께서는 어찌 아름다운 옥을 버리고 돌멩이를 구하려 하십니까?”

대장부가 천하를 구제할 재주를 갖추고 있으면서 어찌 초야에 묻혀 헛되이 늙어 가야 한단 말입니까. 천하의 백성을 생각하시어 이 유비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유비의 말에 공명은 웃었다.

 

그렇다면 장군께서는 어떤 뜻을 품고 계신지요?”

 

유비는 주위 사람을 물리고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한나라 황실은 무너지고 간신들이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는 이때, 부족하나마 천하를 구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재주가 부족해 뜻을 펴지 못하고 있소이다. 선생께서 저를 지도해 주신다면 천하를 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동탁이 반란을 일으킨 이후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원소(袁紹)의 힘에 못 미치는 조조가 원소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뜻도 있었지만 책략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조는 100만 대군에다 황제를 등에 업고 제후를 다스리고 있으니, 여기에 대항할 자가 없습니다. 손권은 강동(江東) 지방에서 벌써 3대째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천연의 요새를 갖춘 데다 백성의 지지까지 받고 있으므로 함부로 그를 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형주는 북으로는 한수(漢水)와 면수(沔水)에 접해 있고, 남으로는 자원이 풍부한 남해(南海)에 닿아 있으며, 동으로는 오()와 회계(會稽)로 이어지고, 서로는 파()와 촉()으로 통하니 이보다 더 좋은 땅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이 장군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익주(益州)는 요새이면서도 기름진 평야가 1,000리나 뻗어 있는 좋은 땅입니다. 그래서 한나라 고조께서 그곳을 도읍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백성이 많고 부유한 그곳을 지금 유장(劉璋)이 다스리고는 있으나, 원래가 음험하고 줏대가 없어 백성을 품을 줄 모릅니다. 뛰어난 선비들은 좋은 군주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장군은 황실의 후예로 그 신의는 천하에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호걸을 부하로 거느리고 계십니다. 장차 형주와 익주를 차지해 그 요새를 지키면서 서융(西戎, 서쪽 오랑캐)과 화친하는 한편, 서남의 오랑캐와 손을 잡고, 밖으로는 손권과 협력하며, 안으로는 백성을 잘 다스리면서 천하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리십시오. 그러다 장수 하나에게 형주의 병사를 주어 낙양을 치게 하고, 장군 스스로 익주의 병사를 거느리고 진천(秦川)으로 나아가시면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장군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장군께서는 대업을 이루시어 한나라 황실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장군께 권하는 계책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공명은 그렇게 말하면서 동자에게 지도를 벽에 걸라고 하고는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서촉(西蜀) 54개 주의 지도입니다. 장군이 패업을 이루시려면 북쪽은 천시(天時)를 얻은 조조에게 양보하고, 남쪽은 지리적인 강점을 가진 손권에게 양보한 다음, 장군은 인화(人和)를 꾀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형주를 장악해 발판으로 삼고, 그다음 서촉을 손에 넣고 기반을 다져서 3개의 솥발 형세를 이룬다면 나중에 중원까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공명에게서 천하삼분의 계를 얻은 유비는 공명의 출마를 간청했다. 공명도 유비의 성의에 감복해 마침내 군사(軍師)로서 출마하게 되었다.

 

적벽(赤壁)의 전투

 

유비는 병력 증강을 위해 민병을 모집하고 공명의 지도를 받아 들판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한편, 여포와 원소를 격파하고 중원의 패권을 쥔 조조는 그 소식을 듣고 유비를 단숨에 무찌르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다. 유비는 공명의 계략을 활용해 2차례에 걸쳐 승리했지만, 중과부적이라 강동(오나라)의 손권과 손을 잡았다. 이렇게 하여 조조와 유비 · 손권 양군은 적벽에서 장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강동군의 대도독(大都督) 주유(周瑜)각주1) 는 조조 군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화공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우선 노장 황개(黃蓋)에게 고육책(苦肉策)’을 펴도록 했다. 황개는 미리 약속한 대로, 적과 내통하는 자가 보는 앞에서 주유에게 창피를 당하는 장면을 연출해 그를 속인 다음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주유에게 원한을 갚고 싶으니 협조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어서 강동에서 천재적 두뇌로 널리 알려진 책사 방통(龐統)각주2) 을 조조의 군대로 보내 연환계(連環計)’를 헌책하게 했다. 조조의 군대는 익숙지 않은 배 위의 생활 때문에 병에 걸리는 병사가 많았는데, 쇠사슬로 배를 연결하고 그 위에 판자를 올리면 육지와 별다를 바가 없으므로 병사들의 건강에 좋을 뿐 아니라 그 같은 거대한 선단을 거느리고 다시 남쪽을 치면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계책이었다. 연환계에 대해 조조의 참모들 가운데서는 화공을 당할 위험이 있다고 해서 반대하는 목소리도 나왔으나, 조조는 이런 엄동설한에 남풍이 불어올 리 없다고 일소하고 방통의 헌책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고육책연환계를 완성하기는 했으나 동남풍만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 주유의 고뇌를 안 공명은 하늘에 제사를 올려 동남풍을 일으켜 보겠다고 약속했다. 공명은 남쪽 기슭으로 가서 단을 세운 뒤, 목욕재계를 하고 하늘에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조조는 진중에서 장수들과 작전 회의를 열고, 오로지 황개의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날 세찬 동남풍이 불기 시작했다. 책사 정욱(程昱)이 진언했다.

 

오늘은 동남풍이 불고 있으니 각별히 경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조는 그 말을 웃어넘겼다.

 

동짓날에 동남풍이 부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걱정할 필요 없다.”

 

그때 한 병사가 강동에서 한 척의 거룻배를 타고 황개의 밀서를 가지고 왔다. 조조는 황급히 그 병사를 불러들여 밀서를 읽었다.

 

주유의 감시가 엄해 탈출할 기회가 없었는데, 파양호(鄱陽湖)에서 새로 온 군량미가 있어 주유가 나에게 호송하라 하므로 비로소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강동의 명장을 죽여 그 수급을 가지고 가서 항복하려 합니다. 오늘 밤 2시경 갑판에 청룡이 그려진 깃발을 꽂고 가는 배가 바로 군량 운송선입니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고, 장수들과 함께 진에 있는 큰 배에 올라 그 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편, 세 번째 화선(火船)에 올라탄 황개는 가슴을 가리는 갑옷만 걸치고 예리한 칼을 든 채 선봉 황개라고 쓴 깃발 아래 서 있었다. 황개는 순풍을 타고 적벽으로 나아갔다.

그때 동풍이 크게 일어나 파도가 넘실거렸다.

 

조조는 본진에서 장강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침 달이 훤히 떠올라 강물은 마치 1만 마리의 황금 뱀이 물결 위를 미끄러져 가는 것 같았다. 조조는 온몸으로 바람을 받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때 병사 하나가 와서 말했다.

 

강남 쪽에서 선단이 바람을 타고 접근하고 있습니다.”

 

조조가 망대 위에서 강 쪽을 살펴보고 있는데 다시 보고가 들어왔다.

 

모든 배에는 청룡의 깃발이 꽂혀 있고, 그중 큰 깃발에는 선봉 황개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습니다.”

 

조조는 웃으며 중얼거렸다.

 

황개가 항복을 하러 오는구나. 하늘이 나를 도왔다.”

 

정욱은 점점 다가오는 배를 살펴보고 있다가 말했다.

 

저 배는 수상합니다. 진 가까이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러느냐?”

군량이 실렸다면 무거워서 느려야 마땅한데, 저 배는 물 위에 가뿐히 떠 있습니다. 지금 동풍이 불어오고 있는데, 만일 그게 계략이라면 무슨 수로 막겠습니까?”

 

조조는 그제서야 깨닫고 크게 외쳤다.

 

저 배를 막아라!”

 

문빙(文聘)이 즉시 작은 배에 올라타고 순시선 10척을 따르게 했다. 문빙이 뱃머리에서 외쳤다.

 

그러나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문빙은 날아온 화살에 왼쪽 어깨를 맞고 배 위에 쓰러졌다. 이를 본 다른 병사들이 깜짝 놀라 앞을 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강동군의 배는 적진의 2리 앞까지 다가왔다. 그때 황개가 큰 칼을 휘두르자, 앞에 있던 배에서 일제히 불길이 치솟았다. 불은 바람을 타고, 바람은 불길을 도와 화살처럼 돌진하니, 불길이 하늘을 덮었다. 불타는 20척의 배가 북군의 진으로 돌진했다. 조조의 수군은 도망치려 하였으나 배들이 쇠사슬에 묶여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사방에서 불화살이 날아오고 화선이 밀고 들어와 장강은 화염으로 붉게 물들었다.

 

조조는 육지의 진을 돌아보았다. 거기서도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황개는 화염 속에서도 조조를 찾으려 했다. 조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기슭으로 도망치려 하는데 장요(張遼)가 거룻배를 타고 와 그를 구출했다. 조조는 10여 명의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기슭으로 향했다.

 

이렇게 하여 조조는 자신을 따르던 병사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허창을 향해 도망쳤다.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달아나게 하다

 

강동에서 돌아온 공명은 형주를 빼앗아 촉나라로 진격할 발판을 마련했다. 현덕은 촉나라의 지도를 입수하고, 형주 수비를 관우에게 맡긴 다음 촉나라로 들어가 주인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완전한 위 · · 오 삼국의 정립 시대로 들어섰다.

 

한편, 조조는 신하로서는 최고의 지위인 위공(魏公)의 신분이었으나 마침내 위왕(魏王)으로 호칭을 바꿈으로써 제위 찬탈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유비도 한나라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이 되었다. 다음 해, 조조가 죽고 아들 조비(曹丕)가 그 뒤를 이었다. 조비는 그해 말에 헌제에게 퇴위를 강요하고, 선양의 의식을 행한 뒤 스스로 위나라의 제위에 올랐다. 그 순간, 한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이듬해 제위에 오른 유비는 한나라 왕실의 뒤를 이음과 동시에, 관우를 죽인 손권에게 복수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장비는 자는 동안에 부하의 손에 목이 잘리고, 출진한 유비의 군대도 화공으로 참패하고 말았다. 223년 유비는 겨우 백제성(白帝城)까지 물러났지만, 거기서 병으로 쓰러져 모든 것을 공명에게 맡기고 숨을 거두었다.

 

공명은 후방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몇 번이나 남쪽 오랑캐를 정벌하고, 마침내 북정의 길에 올랐다. 한때는 장안을 위협하는 태세를 갖추기도 했으나, 마속(馬謖)각주3) 의 실책으로 허무하게 물러나야 했다. 그 뒤로 거의 해마다 위나라와 전투를 벌였고, 234년 오장원(五丈原)에서 사마의[司馬懿, 자는 중달(仲達)]와 대치하는 동안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마의는 공명이 죽고 촉군이 물러간다는 소식을 듣고 추격했다. 어느 산기슭을 돌아가는데, 저쪽에 촉군이 보여 말을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화살이 날아오고 함성이 들려왔다. 어느새 촉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깃발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그 깃발에는 한승상무향후제갈량(漢丞相武鄕侯諸葛亮)’이라고 적혀 있었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니, 수십 명의 장수가 사륜 수레 한 대를 호위하며 나타났다. 그런데 그 수레에 앉은 사람은 흰 도포에 깃털 부채를 든 공명, 바로 그가 아닌가.

 

공명, 아직 살아 있었구나. 내가 너무 깊이 추격하다 이렇게 당하고 마는구나.”

 

그렇게 말하고는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는데, 뒤에서 강유(姜維)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적장을 놓치지 마라! 승상의 계책에 걸려들었다!”

 

이틀 뒤, 사마의는 그 지역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촉군은 계곡으로 들어서자 슬피 울었습니다. 공명이 죽은 것입니다. 지난번 수레에 앉아 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목상이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사마의는 탄식했다. 그때부터 촉나라 사람들은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달아나게 했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촉군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어리석은 황제 유선(劉禪) 때문에 세력은 점점 약해져 갔다.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司馬昭)가 대군을 이끌고 촉나라를 침략해 마침내 촉나라는 망하고 만다. 그 뒤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위나라 황제 조환(曹奐)을 퇴위시키고, 위나라를 대신해 진()나라를 세웠다. 얼마 뒤, 오나라도 진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삼국 정립 시대는 진나라의 통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