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한서 (漢書)
106. 한서 (漢書) / 저작자 반고(班固)
AD 90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고조의 건국과 무제의 흉노 정벌 등 전한(前漢) 제국의 역사를 기록했다. 『한서』란 한나라의 사적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으로, 후한(後漢)의 반고가 편찬했으며, 기(紀) 12권, 표(表) 8권, 지(志) 10권, 전(傳) 7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기』에 다음가는 정사로 평가받으며, 전한 고조 원년(BC 206)부터 왕망(王莽)의 지황(地皇) 4년(AD 23)까지의 사적을 기술했다. 전 100권.
『한서』 전 100권은 후한의 반고(32~92)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반고 혼자서 한 것이 아니다. 그 전에 그의 아버지 반표(班彪)가 『후전(後傳)』 65편을 편찬했고, 그 작업을 이어받은 반고가 20년에 걸쳐 『한서』를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반고가 만년에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의 흉노 정벌에 참가했다가 두헌의 황제 암살 음모에 연좌되어 옥사하는 바람에 8권의 표(表)와 「천문지(天文志)」는 완성되지 못했다.
그 뒤 여동생 반소(班昭)가 황명을 받아 편찬을 계속했고, 결국 반씨 일족의 손에 의해 30~4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완성되었다. 『한서』는 『사기』처럼 기전체를 취했으나, 『사기』가 상고시대부터 한나라 때까지를 기술한 통사임에 반해, 『한서』는 기술 대상을 전한 왕조로 한정했다. 『한서』 이후의 정사는 거의 단대사(斷代史)인데, 이는 왕조의 입장에서 보는 역사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역사 기술의 태도는 『한서』에서 비롯되었다.
최근에 중국의 중화서국이 청나라 왕선겸(王先謙)의 『한서보주(漢書補注)』를 저본으로 하여 열람하기 좋게 구두점을 찍은 활자본 『한서』를 출간했다.
■ 소무의 정절과 이릉의 배신
한나라의 사절로서 흉노 땅으로 향한 소무(蘇武)각주1) 는 자신의 부하가 선우(單于, 흉노의 왕)의 궁정 안에서 음모에 휘말리는 바람에 흉노의 땅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선우는 소무가 귀순을 거부하자, 그를 바이칼 호(북해)의 한적한 땅으로 보내고는 숫양이 새끼를 낳고 젖이 나오면 돌려보내 주겠다면서 숫양을 치게 했다.
한편, 5,000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흉노 땅으로 들어선 이릉(李陵)각주2) 은 몇 배나 많은 흉노의 군대와 싸웠다. 선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로잡히고 만 이릉은 나중에 자신의 일족이 무제의 노여움을 사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흉노에게 귀순해 우교왕(右校王, 흉노의 대관)의 지위에 올랐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이릉은 선우의 명령을 받고 옛 친구 소무를 찾아 바이칼 호로 갔다.
이전에 소무와 이릉은 한나라에서 함께 시중(侍中, 궁중의 관리)을 지낸 사이였다. 소무가 사신으로 흉노 땅에 갔던 그다음 해에 이릉은 흉노에게 항복했다. 그는 스스로 소무를 찾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선우는 이릉을 바이칼 호로 보내 소무를 위해 연회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그 자리에서 이릉은 소무에게 말했다.
“선우는 내가 자경(子卿, 소무의 자) 님과 친구라는 말을 듣고 설득해 보라며 이렇게 나를 보냈소이다. 선우는 아무런 격의 없이 그대를 대우할 생각이오. 어차피 한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렇게 외로운 땅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간들 누가 그 충성심을 알아주겠소이까? 예전에 자경 님의 형님께서 천자를 수행해 옹(雍, 섬서성의 지명) 땅의 역양궁(棫楊宮)에 갔을 때, 수레를 잡고 돌계단을 내려가다가 기둥에 부딪쳐 말채를 부러뜨렸다는 이유로 불경죄로 몰려 결국 자결하지 않았소이까? 또한 그대의 아우인 유경(孺卿) 님은 천자가 하동(河東)의 후토(后土, 대지의 신)를 제사 지내러 갔을 때 수행한 적이 있는데, 말을 탄 환관이 황문부마(黃門駙馬, 천자의 말을 관리하는 환관)와 서로 배를 빼앗다가 부마를 물속에 빠져 죽게 하고 도망친 사건이 있었지요. 유경 님은 칙명을 받고 그 범인을 잡으러 갔지만 결국 실패해 음독 자살을 하고 말았소. 내가 이곳으로 올 무렵에 그대의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직접 양릉(陽陵)까지 가서 문상을 했소이다. 듣건대, 젊은 자경 님의 부인은 재혼을 했다고 하오. 이제 두 분의 누이와 따님 둘, 아들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는데, 10년이 지나고 보니 생사조차 알 길이 없소. 사람의 목숨이란 아침 이슬과도 같은 것, 왜 이렇게 고생만 하고 지내시오? 나도 항복할 무렵에는 멍하니 미친 사람처럼 살았소. 한나라를 배신했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힌 것은 물론이고, 노모마저 보궁(保宮, 궁중의 옥사)에 갇히고 말았지. 자경 님께서 선우에게 항복하지 않으려는 그 착잡한 심정은 나의 경우보다 심하지는 않을 것이오. 게다가 폐하께서는 벌써 연로하시어 망령이 드셨는지, 죄도 없는 대신 수십 명의 가문을 멸하지 않았소? 충성을 바친들 내일의 목숨을 보장받기 어려운데, 자경 님! 대체 누구를 위해 이런 고생을 하시오? 제발 아무 말씀 마시고 내 말을 따르시오.”
소무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부자는 아무런 공도 없는데 폐하의 은덕으로 장수의 대열에 들고 후(侯)의 작위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 몸이 가루가 되도록 충성할 생각입니다. 지금 이 몸이 죽어 충성을 다할 수 있다면, 허리가 잘리고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도 좋습니다. 신하가 천자를 섬기는 것은, 자식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같을진대,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 죽은들 무슨 억울함이 있겠습니까? 제발 다시는 그런 말씀 마십시오.” (······)
소제(昭帝)가 즉위(BC 86)하고 몇 년이 지난 뒤, 흉노와 한나라는 화친조약을 맺었다. 그때 한나라가 소무를 돌려보내 달라고 하자, 흉노는 소무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중에 한나라의 사자가 흉노 땅으로 갔을 때 상혜(常惠, 소무를 따라 흉노 땅으로 갔던 사람)가 보초에게 부탁해서, 그가 밤에 자리를 비운 사이 한나라의 사자를 만나 자세한 사정을 전했다.
그는 사자에게 선우를 만나면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일러 주었다. 그 내용은 ‘천자가 상림(上林)에서 사냥을 하다가 활로 기러기를 잡았더니 그 발목에 비단으로 싼 쪽지가 묶여 있었는데, 내용을 보니 소무가 어떤 습지에 살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었다.
사신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상혜의 말대로 선우에게 따졌다. 선우는 깜짝 놀라 좌우를 돌아보며 안절부절못하다가 어쩔 수 없이 사신에게 사과하고, 소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릉은 주연을 베풀어 소무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이제 그대는 돌아갈 것이오. 그 이름을 흉노에 떨치고, 그 공은 한나라 조정에서 빛날 것이오. 역사에 남아 궁전의 벽에 그려진 공신들 가운데 누가 자경 님보다 더 뛰어나다 하겠소. 나는 어리석고 겁이 많지만, 만일 그때 한나라가 늙으신 어머니를 죽이지 않고 내 죄를 널리 용서해 설욕할 기회를 주었더라면 가(柯)의 맹약에서 조귀(曹劌, 춘추시대 노나라의 장수로서 자신을 인정해 준 노공을 위해 제나라와 가에서 조약을 맺을 때 검으로 제공을 습격해 실지를 회복하는 공을 세웠다)가 보여주었던 그런 공을 세웠을 것이오.
나는 옛날부터 그런 생각을 품고 살아왔다오. 그렇지만 천자는 내 일가를 몰살하고 세상의 웃음거리로 만들었으니 난들 무슨 미련이 있겠소이까? 이제 모든 것이 끝났소이다. 자경 님! 내 마음을 이해해 주시오. 우린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 되고 말았소이다. 이제 헤어지면 다신 만날 수 없을 테지요.”
이릉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며 이렇게 노래했다.
만 리를 지나 사막 건너
그대는 장군이 되어 흉노와 싸웠으니
길은 끊어지고 칼과 활은 부러져
병사들은 쓰러지고 이름마저 잃었노라
노모는 세상을 떠났으니
어디로 가 그 은혜 갚아야 하나
이릉은 눈물을 흘리며 소무와 헤어졌다. 선우는 소무의 부하들을 끌어모았으나, 벌써 흉노에게 항복했거나 세상을 떠난 사람이 많아 소무와 함께 한나라로 돌아간 사람은 9명뿐이었다. 「이광소건전(李廣蘇建傳)」